칠레 와이너리 로드 투어를 하며
한국과 계절이 정반대인 칠레는 지금 안데스 산맥 위에 내려앉은 눈의 찬 기운이 아직은 전부 물러가지 않은 겨울의 끝자락과 그 찬기운 속에서 한층 더 뜨거워진 햇살의 기운을 받아 막 피어나는 봄의 시작, 그 경계에 있다. 이미 너무나 많은 이곳의 와인이 한국시장에 수출되고 있기에 이미 포화 시장이긴 하지만 혹시라도 아직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 원석 같은 와인과 역사 있는 와이너리를 찾는 것이 이번 출장 목표였다.
처음 구경하러 들른 곳은 Viña Montes. Montes 혹은 Purple Angel 등의 브랜드명으로 이미 한국에서도 많이 소비되고 있는 와인이다. 1987년에 본격적으로 시작한 꽤나 젊은 와이너리인데도 불구하고 규모도 꽤 크고 일단 도착하면 넓게 뚫린 모래길을 지나 넓게 펼쳐진 포도밭을 향해 달리다 보면 저 멀리서 커다란 화덕이 있는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맛있는 연기가 지나가던 사람들을 붙잡는다. 여기를 들어오는 그 누구라도 잠깐 들러 훌륭한 식사와 함께 그들의 와인도 맛볼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만들어 놨다.
칠레는 아주 오래전부터 와인을 만들긴 했지만 프랑스나 스페인 등의 유럽 국가들에 영향을 받아 양조기술이 발달되어 본격적으로 세계시장에 수출을 시작한 것은 대략 90년대 초반 정도부터 밖에 되지 않는다. 일교차가 크고 건조해서 병충해에 매우 강하고 포도가 자라기에는 천혜의 환경을 갖고 있어서 품질 좋은 와인을 타 유럽 국가들에 비해 저렴한 가격에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커피맛을 잘 모른다는 사람도 갓 볶은 신선한 원두에 맛있게 내린 커피를 마시면 본인도 모르게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지듯, 와인도 그렇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도, 비싼 와인이 아니더라도, 균형 잡힌 맛과 향은 대화와 식사를 더 맛있고 감칠맛 나게 돋우는 기분 좋은 역할을 톡톡히 한다. 그 말은 다시 말해, 아주 훈련된 전문가가 아니고서야 중상급 이상 정도의 와인들은 우리가 즐기기에 충분히 부족함이 없다는 의미이며, 칠레의 와이너리 대부분에서는 이미 그중상급 레벨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번에 방문한 와이너리들은 Montes 같이 잘 알려진 곳들보다 사실 더 역사가 깊고 지리적 특징이 확실한 곳들이었다. 한 와이너리의 포도밭에는 100년이 넘은 포도나무들이 있었으며 오래된 포도나무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진한 맛을 섞어서 꽤 괜찮은 블렌드 와인을 만들기도 한다고 했고, 다른 곳에서는 칠레에서 흔하게 나지 않는 품종을 재배해서 와인을 만든다고 했다. '드디어, 숨어 있던 엄청난 와인을 발견하는구나' 하고 한참 들떠서 테이스팅 룸으로 들어갔는데 라벨을 보자마자 왜 이들이 이 와인들을 많이 팔지 못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흥미로운 와인들을 표현하기에는 라벨이 너무 평범하고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열심히 그들에게 질문했다. '라벨에 크게 강조된 이 알파벳은 당신들이 강조하고 있는 기후위기와 환경보호에 대한 철학을 담은 글자라고 볼 수 있을까요?' 그랬더니 와이너리 대표가 하는 말,
아뇨, 그런 심오한 뜻은 전혀 없고
그냥 우리 와이너리의 첫 이니셜을 강조한 디자인입니다.
그들 나름대로의 스토리가 있는 와인도 있긴 했다. 와인 라벨에 크게 '90 Years'라고 쓰인 것을 보고 내가 '이것은 혹시 90년이 된 포도나무로 만든 와인이나 뭐 그런 의미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그게 아니고 이 와이너리의 설립자가 90년 생일을 기념으로 해서 만든 라벨이란다. 맛도 꽤 좋은 와인들이었으나 매력포인트, 다시 말해 Selling-point가 없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와이너리를 나오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칠레 와인 중 하나인
Casillero del Diablo의 마케팅이 생각났다.
와이너리 주인이 본인이 가장 아끼는 맛있는 와인을 다른 사람들이 탐내게 하지 않기 위해 지하실에 악마가 산다는 루머를 퍼뜨렸는데 바로 그곳에 저장해두었던 와인이 바로 Casillero del Diablo라는 것이다. 거기에다 스페인어로 악마라는 뜻의 Diablo는 스페인어를 모르는 사람들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익숙한 단어다.
이 이야기의 진위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와인을 선물하는 사람에게 짧은 이야깃거리가 생기고, 의미를 찾는 소비자들은 그 와인을 선택할 것이니까.
이번에 방문했던 두 와이너리의 공통점은 그들이 이야기하는 와인에 대한 스토리가 그들의 입장에서 중요했을지언정 소비자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내가 고르는 와인이 내가 지불하는 가격에 부합하는 품질은 기본이고 그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 혹은 의미 있어 보이는 라벨 디자인 등을 기대하지 해당 와이너리를 설립한 가족의 시시콜콜한 사생활은 별로 궁금하지 않으니까.
이래서 아마존이나 애플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그렇게나 '고객 위주 경영'을 그들의 핵심 경영철학으로 삼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케팅은 '소통'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다른 사람이 듣게 하는 것. 내 물건 혹은 내가 생산하는 유형, 무형 그 어떤 것이든 잘 팔리지 않는다면 혹시 내게 중요한 가치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은지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