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멘트 Feb 18. 2019

정신줄, 잠깐 놓아도 괜찮습니다

#진정한 멘탈 갑이 되기 위한 지침서

후우욱-

이 곳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의 지하철은 내려가는 입구부터 더운 공기가 모두를 압도한다. 지하철 내부에 에어컨은커녕 환기구도 제대로 없어서 요즘 같은 더운 여름에 사람들은 지하철을 타면 열차의 창문을 활짝 열고 다닌다. 나는 알고 있다. 이때 창문으로 들어올 '미세먼지'에 대해서 걱정하는 사람은 이 지하철 전체를 통틀어서 나 혼자 뿐일 거라는 것을.


창문을 그렇게 활짝 열고 다녀도 푹푹 찌는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시내의 한 음식점. 칠레는 웨이터들이 거의 항상 음식값의 10%를 팁으로 받는 문화가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보통의 경우 웨이터들은 음식이 서빙되고 얼마 후 다시 손님들 테이블로 와서 묻는다. "¿Está todo bien?(다 괜찮나요?)" 이 곳에 온 이후로는 이미 음식에 대한 기대치가 워낙 낮아졌기에 평소 같았으면 별말 안 하고 먹었을 테지만 이번에는 도저히 그냥 먹을 수가 없어서 웨이터에게 정중하게 이야기했다.

"미안하지만 이 파스타는 너무 짜서 먹기가 힘들고, 피자는 다 식어서 나왔어요."

그랬더니 웨이터의 반응,

"아이고.. 이걸 어떡하나.." 그러더니 쌩긋 웃으며 그냥 내 테이블을 지나간다.


남미에 위치해 있지만 전형적인 한국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 내가 처음에 (사실은 아직도)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바로, 같은 일을 진행하면서 한국은 100을 기준으로 150의 속도와 집중도로 일을 진행하는데 이 곳 사람들은 70 정도의 밀도로 일을 한다는 부분이다. (물론 이 곳에 위치해 있어도 규모가 큰 글로벌 기업들은 예외) 이렇다 보니 한국에서는 이미 18년 9월부터 19년 사업에 대한 경영계획을 모두 만들어 놓았고, 이 곳 현지에서도 작년 말부터 페루에 위치한 주요 업체 한 곳과 지속적으로 이메일, 통화와 문자 메시지를 수없이 주고받으며 같이 19년 사업 계획을 만들었었다.

그리고 지난달, 우리가 '이미 만들어 놓은' 사업 진행상황을 '확인'하려는 차원에서 페루에 갔다.


@페루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 중 하나인 Callao


도착해서 담당자와 만나 같이 점심도 맛있게 먹고, 현장도 보고,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그 날의 모든 스케줄을 마무리하고 저녁에 그 업체 사무실에 함께 들어와 정리 미팅을 진행하려고 노트북을 막 여는데 갑자기 그 페루 담당자 왈,

"아 그런데 보니까 우리가 예전에 확정했던 계획대로는 진행이 어려울 것 같아. 막상 계산해보니 생산량이 그 정도까지는 안 나올 것 같아서.. 미안해."


순간 3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그 3초간 내 머릿속에서는 19년 경영계획과 내가 본사에 보냈던 모든 이메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황당하다 못해 그 얘기를 하며 태연하게 미소 짓고 있는 저 페루 담당자의 뇌 속의 구조를 알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 이럴 거면 왜 미리 내게 말해주지 않았는지? 아무리 그래도 한 기업의 대표라는 사람이 사업을 이런 마인드로 일을 하는 게 가능한가? 나는 그럼 다시 회사에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 거지? 그건 그렇다 치고 이 부족한 물량을 어떻게 채우지?... 마음이 복잡했다.


그렇게 완벽하게 짜 놓은 계획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갔던 출장길에 상상도 못 한 시점에 터져버린 문제를 수습하는데 남은 일정을 다 써버리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 속상한 마음이 이미 포화되었는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그 폭풍 같았던 지난 며칠이 한 편의 단편 드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났다. 그러면서 한 편으론 지금쯤 그 페루 사람의 머릿속에서 이 문제는 벌써 반쯤은 잊혀 있을 거란 것 또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같이 이동하던 중간중간 친구들과 축구시합을 하자는 약속을 잡았으니 아마 지금은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있을 것이고, 그리고 주말에는 가족들과 캠핑을 간다고 했었으니 그 준비로 신나는 금요일을 보내고 있을 것이 뻔했으니까. 내가 그 때문에 느낀 당혹감과 사태의 심각성은 전혀 그의 것이 아니었다.   

@Tumbes, Peru

그렇게 다시 칠레로 돌아온 후, 회사가 느낀 불만과 질책과 원망에 대해 상황을 설명하고 책임을 지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었지만, 늘 그렇듯 내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첫 번째, 한국이 원하는 150의 속도와 밀도로 현지 업체를 밀어붙이는 것.

두 번째, 한국의 150과 페루의 70 사이, 한 100 정도 되는 점을 찾아 내 pace대로 일을 진행하는 것.

내가 한국보다는 조금 느리게, 현지 업체들보다는 조금 빠르게 일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첫 번째 방법으로 밀어붙인다고 해도 여기에서는 그 속도를 맞추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고, 많은 경우 첫 번째와 두 번째 방법의 결과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미리 모든 계획을 세우고 발 빠르게 진행하며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도 결국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 되는 것이 세상일이라는 걸 속도를 조금 늦추고야 배웠다.  


그렇게 나를 당황시켰었던 이 사건도 항상 그렇듯 어느새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현지 회사들의 대책 없음과 무책임함을 미화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지만, 지금 돌아보니 실제 문제보다 문제를 더 크게 만들었던 것은 우리 회사의 조급함과 불안함이었고, 실제 문제보다 문제를 더 작아 보이게 만들었던 것은 페루 업체의 여유로움과 빈틈이었던 것 같다. 페루에서 마지막 날, 아직도 문제를 해결하느라 정신없었던 내게 그 담당자가 태연하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한국 사람들은 정말 피곤하겠다. 살짝 덜 완벽하게 살아도 괜찮을 텐데.."

우리나라보다 물질적으로는 훨씬 열악할지라도 이 곳 사람들이 가진 저 '덜 완벽함'과 그것을 괜찮다고 생각하는 이 사회의 빈틈이 괜스레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150의 밀도로 사는 대한민국의 모든 이들이 70의 밀도로 사는 남미 사람들처럼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사이 언저리에서 지치지 않는 자기만의 밀도를 찾아 살기를 바란다. 꽉 붙잡고 있는 그 정신줄, 잠깐 놓아도 괜찮다. 지구 반대편에서 볼 때 당신은 여전히 세상 그 누구보다 빠르게 달리고 있으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17살에 첫 딸을 낳았던 한 여자의 삶에 대한 믿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