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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짱구아빠 Nov 19. 2020

향수(香水), 향수(鄕愁)

함께쓰는 한 단어 『나의 특이한 취향』, Maj님의 글





향수(香水), 향수(鄕愁)      


    며칠 간 집을 비우게 되었다. 이번에도 당일 아침에 허겁지겁 짐을 싼다. 짐을 간소화 하고자 쇼퍼백 하나에 몽땅 쑤셔 넣는 와중에도 가져갈 향수를 신중히 고른다.



순간 나의 특이한 취향이라는 이번 달 글쓰기 주제에 관해 향기에 대한 취향을 풀어보기로 결정한 후 조말론 얼그레이앤큐컴버를 챙긴다.



며칠 간 집이 아닌 낯선 곳을 그나마 익숙한 내 공간으로 만드는 가장 간편한 방법은 내게 익숙한 향으로 그 곳을 채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꼭 의식처럼 늘 신중히 향수를 챙긴다.


    사실 향기에 대한 내 취향이 그리 특이할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특이하다고 할 만 한 점은 치과에서 나는 냄새를 좋아한다 정도가 있으려나. 그 외에 특이할 건 없어도 냄새, 향기에 민감한 건 확실하다.



집에서 나는 ‘개코’로 통한다. 가족들은 캐치하지 못하는 아주 살짝 나는 냄새도 바로 캐치한다. 온갖 식재료와 향신료가 마구잡이로 뒤섞여 부유하는 부엌 공기 속에서도 냄새들을 곧잘 분류해내곤 한다.



    취향이 특이하지는 않지만 향수를 몹시 좋아하는 건 맞다. 향기를 애호한다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한 것 같다. 집에 있어도 향수 뿌리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는데 커서 내가 그러고 있다. 손목에 향수 뿌리고 외출하면 나도 모르게 밖에서 자꾸 내 손목에 코 대고 킁킁거리는 날 발견한다.



    이성을 볼 때도 향기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성에게 나는 고유의 체취나 향기에 최소한 거부감이 들면 안 된다. 예전에 만났던 전 애인 중 한 명은 비흡연자에 굉장히 깔끔했는데 그 사람 옷에서 나는 섬유유연제 향이 언제부턴가 계속 거슬려서 결국 다른 섬유유연제를 선물한 적이 있다.



반면 좋아하는 향이 나는 이성에게는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경우에도 호기심이 생기기도 한다. 가령 깨끗하면서 포근한 비누향이나 베이스노트로 머스크향에 탑노트로 시트러스향과 여기에 가미된 약간의 스파이시한 향에서 매력과 호기심을 느낀다.



    좋아하는 향 얘기를 하니 갑자기 신이 나서 좀 더 얘기해보겠다. 좋아하는 향은 비누향, 머스크향, 오이향, 얼그레이향. 플로럴 계열에서는 튤립, 장미, 베르가못 등이 있다. 그 밖에 좋아하는 냄새는 비온 후 숲 냄새, 치과에서 나는 민트 냄새, 팬케익 굽는 냄새, 양파 볶는 냄새 등 셀 수 없이 많다.



    이런 식으로 나열하다 보면 끝도 없을 것 같으니 향수로 좁혀야겠다. 향수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 언제부터였는지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 화장대 앞에서 외출 준비의 마지막 단계로 향수를 뿌리는 엄마를 감탄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던 장면부터 어렴풋이 떠오른다. 섬세하게 컷팅되어 화장대 앞 조명을 반사하며 반짝이는 유리병 안에는 온갖 색깔의 영롱한 물들이 담겨져 있었다.




당시 나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현미경과 각종 플라스크를 쭉 진열한 후 스포이드로 색소들을 덜어 플레이트에 놓인 잎사귀의 엽록소를 물들이고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놀이에 푹 빠져 있었다.



엄마의 화장대 역시 내 눈에는 마치 과학 실험실 같았고 거기서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오늘의 향수를 고르는 엄마는 과학자 같았다. 훨씬 예쁘고 반짝이고 향기롭기까지 하다는 점에서 과학실보다도 더 멋진 곳이자 어른의 공간이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처음 향수를 갖게 된 계기도 과학 때문이었다. 특정 냄새는 특정 순간을 기억하게 하는 효과적인 장치다. 중학교 때 읽었던 어느 책에 나온 대목이다.



그 이후에 나는 자신 없는 과목 수업 시간과 그 과목 시험 시간에 특정 향수를 뿌리는 것을 시도했다. 중학교 3학년 과학 수업, 내가 처음 향수에 입문하게 된 계기다.



중학생이 무슨 향수냐고 씨알도 안 먹힐 엄마의 반응이 안 봐도 비디오라 사달라고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있던 찰나에 마침 당시 매달 보던 패션 잡지 ‘엘르걸’의 해당 호 사은품으로 향수 샘플이 껴 있었다. 당시 새로이 론칭된 ‘롤리타 램피카’라는 깜찍한 보랏빛 병에 담긴 보랏빛 향수, 그게 내 첫 향수다.



과학 성적 향상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아직도 길에서 우연히 누군가에게 그 향이 나면 순간 열다섯 살 때로 돌아간 것 같다. 이후 여러 향수를 썼지만 이 향수는 내게 중학교 시절의 노스텔지아 그 자체다.


    

테이의 사랑은 향기를 남기고와 같은 노래가 괜히 나온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유난히 냄새를, 그리고 냄새로 특정 대상을 잘 기억하는 것 같다. 특정 냄새는 또한 특정 인물을 떠올리게 한다.



엄마 옷가지에 은은히 벤 백화점 매장 같은 향수 냄새와 어릴 때 구워주던 팬케익 냄새, 아빠에게 나는 민트향 섞인 치약 냄새 비스무리한 향, 동생한테 나는 아기 분유 냄새와 섞인 달콤한 플로럴 계열 향, 외가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냄새와 친가에서만 나는 냄새,



며칠 집을 비우고 집에 들어가면 나는 반가운 우리 집 냄새, 전 애인한테 났던 샤넬옴므스포츠 향수와 비누 향 그리고 거기에 미처 가려지지 않던 담배 향, 또 다른 전 애인한테 났던 깨끗하게 세탁한 직후에 나는 코튼 냄새…….



어떤 냄새를 우연히 맡으면 내 마음 속 어딘가 구석에 처박혀 있던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순식간에 피워 오른다. 가끔은 그 사람이 그리운 것보다 그 냄새가 그리운 게 아닌지 헷갈릴 때도 있다.



    최근 우연한 계기로 드라마에서나 보던 전 애인과의 재회를 경험한 적이 있다. 다시 사귀거나 뭐 그런 게 아니라 그저 밥 두어 번 먹고 차 마신 게 전부다. 그런데 식당에 그 친구가 들어와서 나한테 오자마자 그 친구한테서 나는 특유의 향이 확 나면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몇 년 만에 보는 거라 무슨 말부터 할지 인사말을 고르고 있었는데 익숙한 그 냄새를 다시 맡으니 반갑기도 하고 긴장이 풀리면서 체하지 않고 무사히 밥을 먹을 수 있었다. 혹여나 상대가 오해할까봐 그 얘기는 물론 하지 않았지만.



    “기억이란 참 이상하다. 실제로 그 속에 있을 때 나는 풍경에 아무 관심도 없었다. 딱히 인상적인 풍경이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열여덟 해나 지난 뒤에 풍경의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솔직히 말해 그때 내게는 풍경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중략)……. 그렇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 우선 떠오르는 것은 그 초원의 풍경이다. 풀 냄새, 살짝 차가운 기운을 띤 바람, 산 능선, 개 짖는 소리, 그런 것들이 맨 먼저 떠오른다. 아주 또렷이. 너무도 선명해서 손을 뻗으면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더듬을 수 있을 것 같은 정도다.”


 하루키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 나오는 대목처럼 특정 냄새는 특정 공간으로 날 다시 데려가기도 한다. 나는 바다를 사실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매년 여름 바다, 겨울 바다를 보러 가거나 서핑과 태닝을 즐기는 친구들을 보면 확실히 그리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바다 특유의 비린내나 비릿한 물 냄새를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한강변에 살면서 한강 공원보다 남산이나 북악산, 서울숲 부근에 사는 산동네 사람들을 부러워할 정도인 걸 보면 바다든 강이든 물에는 확실히 큰 관심이 없는 게 분명하다.



    얼마 전 향수 매장에서 직원 분이 대서양 같은 바다를 연상케 하는 향이라며 거창하게 소개한 향을 시향했다. 예상과 달리 강하지 않고 부드럽지만 약간 이국적인 워터리향을 맡으니 그 순간 사막에 바로 접해 있는 호주 뉴사우스웨일즈 주의 포트스테판 해변과 프랑스 니스의 해변이 펼쳐졌다.



바다를 그리 좋아하지 않고 바닷물에 발을 담그는 건 더더욱 별로 좋아하지 않은 내가 넋 놓고 그 앞에 앉아서 바닷물에 발을 담그며 한참을 아무 말도 없이 바라봤다.




천국이 있다면 이렇게 생긴 곳이지 않을까 그 순간 생각했다. 신기하게도 바닷물 비린내가 거의 나지도 않고 모래 입자는 또 어찌나 곱던지. 계곡물처럼 깨끗한데 그저 푸른 물감을 잔뜩 부은 것 마냥 투명했던 바닷물.



그 이후에도 타의로 여러 바다를 가면서도 생각나지 않던 그 두 해변이 향수 매장에서 선명히 생각나다니. 조향사 분도 그 곳에 분명히 가 봤나보다 제멋대로 확신했다.



    향수(香水)와 향수(鄕愁)의 발음이 같은 게 마냥 우연 같지는 않다. 향수를 만들 땐 분명 누군가를 또는 어딘가를 떠오르고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만들 것이다. 향수를 애호하는 우리는 무언가를 떠올리며 향을 고르고 향을 맡으며 무언가를 떠올리기도 한다. 시각적인 것은 사진으로 남길 수 있고 청각적인 것도 녹음하거나 영상으로 남길 수 있다.



이와 달리 후각적인 부분은 그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해서 남길 수 없다는 점에서 아쉽고 간절하다. 그 빈 곳을 우리의 상상력으로 채우고 각색하게 된다는 점에서 더 흥미롭기도 하다. 문득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향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지면서 챙겨온 향수를 뿌린다.      



Written by. Ma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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