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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짱구아빠 Aug 07. 2019

『이방인』, 알베르 카뮈

Review by. 북다이버

함께 모여 책을 읽고 자유롭게 글을 씁니다. 모두의 독서생활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북클럽 #책갈피




인생은 실존과 본질 사이의 줄타기  


실존주의의 핵심을 나타내는 말은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이다. 처음 들으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떤 철학적, 문학적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유용한 방법 중 하나는 그 말을 뒤집어 보는 방법이다. 따라서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본질이 실존을 앞선다’라는 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철학 개념에서 본질이란 ‘목적’을 의미한다. 실존은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존재’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예를 들어 의자는 앉기 ‘위해’ 고안된다. 의자 설계자는 의자를 만들기 전에 의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생각한다. 균형을 잡기 위해 다리를 4개. 편안함을 위한 등받이. 그 밖에도 많은 요소를 구상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의자의 본질은 앉기 ‘위한’ 사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의자는 만들어지기도(실존하기도) 전에 목적(본질)이 구상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본질이 실존을 앞선다’라는 말이다. 참고로 의자를 앉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기로써 사용한다면 그것은 의자의 본질을 어긴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가? 사람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자궁에서 어떤 목적을 위해 구상되는가? 그럴 리 없다. 인간은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 실존주의에서는 이 부분에 주목한다. 후천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목적이 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판사라는 직업을 가지면 그 사람은 판결을 ‘위해’ 태어난 존재인가? 어머니의 자궁은 그런 것을 결정할 수 없다. 이런 방식으로 직업, 도덕, 관습, 종교, 법 등에도 같은 논의를 적용해보면 결국 남는 것은 ‘내가,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그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없어진다. 카뮈의 『이방인』에서는 책의 후반부에 뫼르소의 다음과 같은 포효로 실존주의를 명확히 드러낸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그의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운명,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도록 되어 있고, 나와 더불어 그처럼 나의 형제라고 자처하는 특권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도 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알아듣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다 특권을 가진 존재다.
p.134


 실존주의에 대한 설명은 여기까지 하고,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는 실존주의철학을 좋아하지만 뫼르소처럼 살 수는 없다. 실존주의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4년 전이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실존주의자들의 생각이 나의 가치관과 유사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매력을 느꼈다. 그 이유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보니 실존주의가 과학적 회의주의와 놀랍도록 많은 부분이 일치했던 것이다. 나는 과학적 회의주의자이기 때문에 이 점에 굉장한 매력을 느꼈다. 과학적 회의주의와 실존주의는 어떤 점에서 유사한가?


 천문학과 진화생물학이 기술하는 빅히스토리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준다. ‘별의 핵융합반응은 다양한 원소를 만든다. 그 원소는 지구를 만들고, 분자를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유기분자는 자연선택을 통해 생물 그리고 인간을 만든다. 물리적 법칙아래에서 움직이는 무작위적인


 에너지와 물질의 움직임, 그리고 자연선택에 의해 인간이 만들어졌다.’이 사실이 내포하는 의미는 ‘인간은 결국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류는 무언가를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인류종이 진화하고 한참 후, 지금으로부터 약 7만 년 전에 인류의 뇌에서 ‘인지혁명’이 일어나고 나서야, 인류는 실존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게 될 수 있었고 문화, 인권, 종교, 법, 관습과 같은 ‘본질’을 만들어내게 된다. 실존주의의 핵심과 놀랍도록 일치하는 부분이다. 다시.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





 과학적 회의주의는 사실에 대한 의심과 탐구를 하는 철학이고, 실존주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는 철학이기 때문에 엄연히 다르고 차이점이 분명 존재하지만, 과학과 실존주의는 모두 미신과 종교를 멀리하고, 기존의 ‘상식’또는 ‘관습’이라고 불리는 것을 회의적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점이 지향점이 일치한다.


 종교를 예를 들면, 중세의 기독교는 거의 모든 유럽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했다. 그들은 평생을 신을 ‘위한’ 삶을 살았다. 도덕관 역시 신이 내린 기준에 의해 정해졌고, 사람이 의자를 설계하고 만들 듯이, 신이 사람을 설계하고 만들었다고 믿었다. 손가락이 5개, 눈이 2개인 것은 신이 다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은 이를 정면으로 거부했고, 실존주의 역시 종교가 사람을 도구화하는 것을 거부했다. 결론은 ‘내가,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그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나는 과학을 좋아하기 때문에 실존주의에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실존주의에 동의한다고 해도, 나를 포함한 거의 모든 사람들은 마냥 실존적으로 살 수는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인공 뫼르소 처럼 관습, 도덕, 종교, 법 등을 모두 무시한 채 살아갈만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돈을 벌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않을 수는 없다. 도덕과 법이 결국 나와 같은 인간이 만든 ‘상상속의 규칙’일뿐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나는 법을 어기면서 살 수 는 없다. 사회적 시선과 요구를 무시하기에는 내 담이 그렇게 크지는 않다. 나는 나를 규정하려는 여러 가지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반항하며 살아가야 한다. 끊임없이 돈을 벌기 ‘위한’ 기계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나를 억압하려는 관습에 대해 의심해야 한다. (이 점도 과학이 진보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뫼르소가 사제의 멱살을 잡고 부조리에 대한 반항을 부르짖었던 것처럼.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뫼르소의 말대로 우리는 삶이라는 소중한 기회를 얻은 특권을 가진 존재들이다. 우리는 모두 뫼르소를 어느 정도 닮아 있다. 뫼르소처럼 살아갈 수 는 없을지언정, 뫼르소의 사상만큼은 우리의 생각 속 어딘가에 언제라도 뛰쳐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 인생이란 결국 이렇게 실존과 본질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여정이 아닐까. 사람들은 모두 실존과 본질 사이의 스펙트럼 안에서 저마다의 음색을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책의 본문 인용을 하며 글을 마친다. 뫼르소 역시 실존과 본질 사이의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 만 같다. 뫼르소는 그토록 본질을 거부하는 삶을 살아왔지만, 자신을 가두는 벽의 존재와 같이 본질이 실존에 가하는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판결문이 17 시가 아니라 20 시에 낭독되었다는 사실, 그 판결문이 전혀 다를 수도 있었으리라는 사실. 그것이 속옷을 갈아입는 인간들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사실, 그것이 프랑스 국민의 이름이라는 지극히 모호한 관념에 의거해 언도되었다는 사실, 그러한 모든 것은 그러한 결정의 진지성을 많이 깎아 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선고가 내려진 순간부터 그 결과는, 내 몸뚱이를 비벼대고 있던 그 벽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확실하고 심각한 것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p.121 



 by. 북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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