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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짱구아빠 Sep 26. 2019

『라듐 걸스』, 케이트 모어

리뷰작성자 : Operarius Student

함께 모여 책을 읽고 자유롭게 글을 씁니다. 모두의 독서생활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북클럽 #책갈피




'라듐걸스'는 1920년대 미국 여공들의 라듐 중독이 직업병으로 인정받는 과정을 담아낸 책이다, 학술적인 성격보다는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가 연상될 정도로 서사성이 두드러진다, 여공들의 임무는 시계의 숫자판에 라듐을 칠하는 일인데, 워낙 섬세한 작업이라서 붓 끝을 입에 넣어 끝을 뾰족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미량이나마 꾸준히 라듐을 섭취한 결과 이들은 뼈가 썩는 고통을 겪다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들의 질병과 죽음이 직업병으로 명명되기까지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라듐걸스'를 보고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내가 책을 딱 한권만 낼 수 있다면, 나는 '라듐걸스'같은 책을 쓰고 싶다라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한국에는 '라듐걸스'같은 책이 아직 없다, 연구 목적의 전문적인 글들이 있었지만 이렇게 이야기 형식으로 일대기를 풍부하게 복원해낸 책은 찾기가 어렵다, 특히나 (해피엔딩이라는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해피엔딩이라면 사실상 거의 없다, 삼성 반도체 백혈병 피해자 황유미씨를 다룬 영화가 있었지만, 역시나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무겁다, 고통받는 피해자들이 부각되는 지점이 절정인 이야기가 아니라 새롭게 등장한 사회문제에 수습책을 마련해나가는 과정에 초점이 맞춰진 이야기를 쓰고 싶다, 결국에는 피해자들에게 웃음을 되찾아줄 수 있는 그런 이야기,







사실 '라듐걸스'의 얼개는 상투적이다, 첫 30쪽을 읽으면 뒤 600쪽의 줄거리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라듐이라는 물질에 노출된 시계 숫자판 도장공들이 겪는 고통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원인 규명과 보상 책임을 두고 줄다리기가 이어지다가 결국에는 도장공들의 목소리가 받아들여진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과정의 각 단계에 키워드를 붙여주면서 일반화의 단초를 제공한다, 목차를 보면 이 책은 지식-권력-정의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직업병이란 특정 물질의 유해성이 늦게나마 발견되고, 이해집단의 힘겨루기 끝에 이 유해성이 실질적으로 병인으로 인정됨으로써 명명되는 '현상'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역학(疫學)관계와 역학(力學)관계의 정합성 여부로 정의를 논할 수 있다, 사회적 약자들의 호소가 결국 사회 내에서 받아들여진다는 이야기, 아무래도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식상할 수밖에 없다, 감정에 기댄다면 모름지기 당연한 이야기일테니까,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겠지만,




법적으로 한국에서 산업재해란 "근로자가 업무에 관계되는 건설물, 설비, 원재료, 가스, 증기, 분진 등에 의하거나 작업 또는 그 밖의 업무로 인하여 사망 또는 부상하거나 질병에 걸리는 것"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나는 이것으로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산업재해를 잡아내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아서, "계약에 따라 노동력과 임금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발생한 사고 및 질병으로 인해 노동자가 노동력을 일시적 또는 영구적으로 멸실한 사례 중 업무상 관련성을 인정받아 일정한 비용을 공동체가 부담하는 경우"로 다시 규정했다, 즉, 사고의 발생 및 질병의 발병 그 자체로 산업재해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회 내에서 인정받음으로써 비로소 산업재해로 이름지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상깊었던 구절이 있었다,



 "여성들에게 필요한 사람은 챔피언이었다. 그들의 병을 정확히 진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권위까지 갖춘 의학 전문가였다. … 이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건 기업의 호주머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의학박사였다."



이 책에서는 의료인과 법률가가 굉장히 멋있게 그려진다, 도장공들의 직업병 인정을 위해서 헌신했던 전문가들 중에서도 의사와 변호사의 노력이 두드러진다, 의사들은 라듐의 유해성을 입증해냈고, 변호사들은 기울어진 권력의 균형을 맞추고 나아가 역전해냈다, 이들의 헌신으로 일궈낸 해피엔딩을 보니, 한편으로는 막막한 느낌도 있다, 내가 가진 지식과 자격으로는 그들에 준하는 역할을 수행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실 산업재해의 인정에까지 이르는 기나긴 서사 안에서 역사학 전공자의 역할을 사실상 없다, 자리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어디에 만들지도 참 막연하다, 기껏해봐야 모든 일이 일어난 후에 그들의 작업을 일반화해서 이름을 붙여주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 정도이니, 실제 질환이 발생하고 법적인 공방이 벌어졌을 그 당시에는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심을 부려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직업병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들의 고통이 무시당하지 않고 사람들의 공감을 살 수 있도록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는 책을 쓰고 싶다, '라듐걸스'같은, 한국에서 처음 직업병으로 인정받은 사례로는 문송면군의 수은중독이 있었고, 이후 직업병 인정 사례가 줄지어 등장한다, 그리고 현재도 인정 여부를 둘러싼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고 있으며, 아직 수면 위로 올라오지도 않은 사안도 있을 것이다, 문송면군의 사망이 1988년 여름이니 공교롭게도 꼭 내가 태어난 시점 즈음이다, 직업병이 인정을 통해 '탄생'하는 것이라면, 한국에서의 직업병이란 나와 동갑인 셈이니 서른살 남짓 될 것이다, 그런데 1988년에 있었던 합의는 현재 한국의 눈부신 경제 성장 뒤의 그림자를 감안한다면 턱없이 늦은 출생신고이다, 또한, 해방 이전의 식민지적 모순도 제대로 된 출생신고를 막았을 것이다, 그의 실제 출생시점을 소급하기 위해 스스로의 분발을 다짐해본다,





By. Operarius Stu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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