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 친구라고 부르기엔 애매했던 순간

추신. 어쩌다 보니 너를 친구로 맞이하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by 그 소년

중간고사가 끝나고 나는 결심했다. 더 이상 애매하게 지내지 말자고. 그 애와의 관계를 정리하자고. 친구도 아니고 그냥 아는 사람도 아닌, 이 이상한 거리를 유지하는 건 나에게도 그 애에게도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날, 방송실 앞에서 기다렸다. 점심 방송이 끝날 시간이었다. 문이 열리고 그 애가 나왔다.


"어."


내가 먼저 말했다.


그 애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당연하지. 내가 먼저 기다린 건 처음이니까.'


나는 자연스럽게 물었다.


"시험 어떻게 봤어?"

"그냥... 그럭저럭... 너는?"

"나도 비슷해. 수학은 망한 것 같은데?"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 애는 문을 잠그고 어색하게 내 옆에 섰다. 우리는 복도를 걸었다. 나란히.


'이렇게 걸어본 게 처음인가?'


그동안은 항상 우연히 마주친 거였다. 계단에서, 도서관에서, 비 오는 날 현관에서.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내가 일부러 기다렸고, 우리는 함께 걷고 있었다.


"방송부는 점심시간마다 방송하지?"

"응, 거의 매일."

"노래 신청도 받아?"

"응, 쪽지함에 넣으면 돼. 방송실 앞에 있어."

"아, 그거 봤는데 한 번도 안 넣어봤어."


나는 잠깐 생각했다.


'신청하면 내 노래를 틀어주겠지?'


그 생각이 들자 갑자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신청하면 꼭 틀어줘?"


"웬만하면, 근데 너무 많으면 다음 날로 미뤄지기도 하고..."


"그럼 나도 한번 넣어볼까?"


"응, 넣어봐."


그 애의 대답은 짧았지만, 왠지 기대하는 것처럼 들렸다. 계단을 내려가며 나는 갑자기 물었다.


"근데 너 이름이 뭐야?"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방송부 명단에서 본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모르는 척했다. 이게 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나는... 민기."


"민기구나. 나는 수아야!"


"응, 알아."


그 애가 그렇게 대답했다.


'알아?'


순간 멈칫했다.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지?'


하지만 곧 깨달았다. 복도에서 친구들이 내 이름을 부르는 걸 들었을 것이다.


"맞다, 내 이름이 워낙 여기저기 불려서 알 수도 있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1층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방향이 달랐다.


"그럼 나 저쪽으로 갈게."

"응, 그래."


헤어지려는데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끝내면 안 될 것 같은데.'


나는 돌아서며 말했다.


"민기야, 내일 봐."


민기야.


반말로, 그 애 이름을 불렀다. 그 애는 멍하니 서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재빨리 친구들에게로 뛰어갔다.


'왜 저렇게 말한 거지?'


속으로 생각했다.


친구처럼 대하려던 거였는데, 그 한마디가 너무 친근하게 나온 것 같았다.


'아니야, 친구면 당연히 반말하지. 이상한 게 아니야.'


나는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서도 계속 생각했다.


"민기야."


내가 부른 그 이름이 자꾸 맴돌았다. 이상하게 입에 착 감기는 이름이었다. 다음 날 점심시간, 나는 노래를 신청했다.


"볼빨간사춘기 - 나만 안되는 연애

신청자: 김수아"


쪽지를 쓰면서도 웃음이 났다.


'이 노래를 틀어주면 뭐라고 생각할까?'


사실 이 노래는 최근에 자주 듣던 곡이었다. 가사가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그게 잘 안 풀리는 내용.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 왠지 듣다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오후에 방송을 들었다.


"다음 곡은 볼빨간사춘기의 '나만 안되는 연애'입니다."


그 노래가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내 신청곡을 틀어주네.'


교실에서 친구들과 떠들면서도, 귀는 방송에 가 있었다. 노래가 흐르는 동안 문득 궁금했다.


'저 애는 지금 뭘 생각하고 있을까?'


방송실에서 이 노래를 틀면서, 내 쪽지를 보면서. 점심시간이 끝나고 나는 다시 방송실 앞으로 갔다. 그 애가 문을 열고 나왔다. 이번에도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


"틀어줬네. 고마워."

"응. 좋아하는 노래야?"

"응, 요즘 자주 듣는 곡."


우리는 다시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이게 일상이 됐다. 일주일에 두세 번, 나는 방송실 앞에서 그 애를 기다렸다. 처음엔 그냥 시험 이야기, 학교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점점 더 많은 걸 나누게 됐다. 좋아하는 음악, 재밌게 본 영화, 별것 아닌 일상.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 애에 대해 더 알게 됐다.


조용해 보이지만 의외로 말이 많다는 것.

음악 취향이 생각보다 나와 비슷하다는 것.

웃을 때 눈이 작아진다는 것.


'친구가 된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친구들과 걸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지현이나 다른 친구들과는 편하게 떠들고, 장난치고, 팔짱도 끼고 그랬는데. 그 애와는 그럴 수가 없었다. 왜인지 모르게 조심스러웠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될 것 같았고, 너무 편하게 대하면 이상할 것 같았다.


'왜 그럴까?'


어느 날, 나는 그 애를 친구들에게 소개했다.


"얘는 민기, 방송부야."


"아, 맨날 노래 틀어주는 걔?"


"응."


친구들이 관심 있게 물어봤다.


"선곡 센스도 그렇고 방송 음량도 그렇고 너 센스 있더라. 방송 잘해."


그 애는 어색하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 친구 맞지?'


하지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친구라고 부르기엔 뭔가 애매했다. 그 애를 대할 때면 항상 신경이 쓰였고, 말 한마디 할 때도 조심스러웠다. 친구들 앞에서 "얘 민기"라고 소개는 했지만, 속으로는 계속 의문이 들었다.


'이게 정말 친구 사이인가?'


그날 밤,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왜 그 애 앞에서만 이렇게 되는 걸까. 왜 말 한마디에도 신경 쓰이고, 표정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걸까.


'그냥 친구인데.'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알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친구 관계가 아니라는 걸. 며칠 뒤, 복도를 걸으며 그 애가 물었다.


"너 요즘 학교 끝나고 뭐 해?"

"그냥 집에 가서 놀거나, 가끔 친구들이랑 놀거나."

"그렇구나."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애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친구지?"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친구냐고?'


나는 대답해야 했다. 당연히 "응, 친구지"라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도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우리가 정말 친구인지. 아니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애매한 사이인지.


"응... 친구지."


나는 겨우 그렇게 대답했다. 그 애는 안도한 듯 웃었다.


"그래, 다행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가 친구라고 부르기엔 뭔가 애매한 순간들이 있었다는 걸. 그 애가 내 이름을 부를 때의 표정. 내가 그 애를 기다릴 때의 설렘. 함께 걸을 때 느껴지는 묘한 긴장감.


'이게 친구 사이에서 느끼는 감정일까?'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민기.


그 애 이름을 속으로 불러봤다.


'우리는 친구야.'


스스로에게 말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나는 눈을 감았다.

모르겠다.

우리가 친구인지, 아니면 친구보다 조금 더 복잡한 사이인지. 하나 확실한 건, 나는 이미 그 애를 단순히 '아는 사람'으로만 대할 수 없게 됐다는 것. 그리고 그게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친구라고 부르기엔 애매했던 그 모든 순간들.

그게 나를 점점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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