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냉수 한 그릇 Jul 18. 2023

그냥 있는 거 먹었어

거짓말 아니라고!

점심 뭐 먹었냐고 아내가 물어볼 때면 하는 말이다. “그냥 있는 거 먹었어.” 입속으로 들어간 세부 메뉴를 더는 묻지 않길 바라나, 어김없이 묻는다. “뭐 먹었어?” 어쩔 수 없이 털어놓는다. “라면” 그리고 아내의 잔소리는 시작된다. 아내의 촉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 많은 날 중에 하필 라면 먹은 날 물어보냔 말이다. 사실 거짓을 말한 건 아니다. 집에 있는 라면 먹은 것이다. 먹은 대상을 말하지 않았을 뿐, 그 대상 자체나 출처까지 속인 건 아니니까. 그래, 난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몸에 좋지도 않은 라면을 왜 먹었냐며 화내는 아내 앞에 난 대역죄인이 된다. 남편 건강 생각해 주는 아내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나, 내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했기에 이렇게 혼나는가 생각하면 억울하기도 하다. 마치 애라도 되는 양, 내가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아내가 정해주는 기분이 들어 화나기도 한다. 


퇴근하는 아내와 신촌에서 만나기로 했다. 거리와 시간을 고려하니 저녁 먹을 시간이 마땅치 않다. 김밥 사 먹자는 아들 말에 좋은 생각인 듯하여 그러자고 했다. 그냥 김밥 한 줄, 참치김밥 한 줄. 두 줄론 부족한 듯하여 아내 몰래 사서 숨겨둔 컵라면 하나를 드디어 개봉했다. 역시 김밥엔 라면이지. 아들과 내 입가에 미소가 가득하다. 김으로 감싼 ‘밥’이 메인이고 컵라면은 보조일 뿐이니, 아내가 물어봐도 당당하다.


김밥으론 아쉬운 듯하나, 라면까지 먹었으니 신촌까지 지하철로 행복한 발걸음을 옮긴다. 전화가 울린다. 아내다. 어김없이 점심 뭐 먹었냐며 묻는다. 점심은 당당하지. 장인어른과 방학 맞은 아들과 식당에서 갈비를 먹었다. 라면이 아니다. 심지어 아내의 아빠와 함께 아니던가. 혼날 이유가 없다. 이내 저녁은 뭘 먹었는지 묻는다. 또 당당하지. 김밥 사 먹었다고 했다. 라면 먹었다는 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다. 먹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이나, 말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을 한 건 아닌 셈이다. 김밥 먹은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어느새 교묘하게 대답하는 요령이 생겼다. 아뿔싸! 점심에 외식했는데 왜 또 저녁까지 사서 먹었냔다. 생각지도 못한 공격이다. 유비무환의 자세로 김으로 감싼 밥을 먹었다고 말하리라 준비해 놓았건만, 두 번의 외식으로 공격할 줄이야. 참았던 화가 올라온다. 


  “적당히 좀 해라. 이을이가 먹고 싶대서 사 먹은 거야. 뭐 그렇게 잘못했다고 뭐라고 하냐?” 평소 엄마 편이었던 아들도 이번만큼은 내 편이다. 공범 아니던가.


모처럼 아내와 상봉했지만, 공기가 싸늘하다. 서로 풀어야지 어쩌겠는가. 날씨도 추운데, 우리까지 차가운 공기를 뿜어대면 안 되지 않겠는가. 아무 일 없는 듯 대화를 이어나간다. 무사히(?) 상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이제 별일 없겠지 하는 생각에 무장(武裝)을 해제하던 찰나, 예상치 못한 공격이 들어온다. 급하게 나가느라 컵라면 빈 용기를 주방에 그대로 둔 게 화근이었다. 이게 뭐냐며 따진다. 자칫 나의 패배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순간이다. “안 먹었어.” 거짓말을 했다. 그만 좀 하라며, 김밥 사 먹은 게 무슨 잘못이냐며 큰소리쳤던 내가, 거짓말을 했다.


  “내 눈 보고 똑바로 말해.”

  “그거 예전에 먹은 거야.” 차마 보지 못하고 말했다. 이번엔 무방비 상태인 아들에게 묻는다. 

  “오늘 먹었어, 안 먹었어?”


내 눈치를 살살 보며 대답 못 하는 아들을 위해 내가 희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먹었어.”


다시 승기를 잡은 아내는, 나와 아들을 만나는 동안에도 기분이 찝찝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면서 당당하게 서 있다. 나의 완전한 패배다. 무장을 해제한 뒤라 손쓸 재간이 없었다. 아, 이래서 아내 말을 들어야 하나 보다. 그리고 다짐한다. 


  ‘그래, 있는 거나 잘 먹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