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대학원에 입학하고 2학년이 되었을 때, 제법 큰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하여 청년부 사역을 시작했다. 주니어·시니어 공동체 각 4개에 신혼부부로 구성된 공동체까지 모두 9개 공동체가 있었고, 그중 주니어 공동체 하나를 담당했다. 당연하듯, 매주 공동체에 출석한 청년인원을 교회에 보고했다. 출석이란 ‘숫자’는 각 공동체의 규모나 분위기를 파악하는 객관적 데이터요 통계적 수치를 넘어 사역자의 실력과 능력을 가늠하는 보이지 않는 척도란 게 공공연하면서도 잔인한 사실이다. 어쩌겠는가. 개개인의 능력을 숫자만큼 가시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게 이것 외에 무엇이 있을까. 그래, 나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매주 평균 40명 정도 모였다. 나 몰래 마치 서로 순번을 정해서 출석할지 말지를 정하기라도 한 듯, 그동안 출석하지 못한 청년들이 우연히 나왔을 때도 40여 명이 모였고, 잘 나오던 청년들이 뜻하지 않게 출석하지 못할 때도 40여 명이 모였던 건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다. 고민 끝에 어떤 특정한 날을 정한 뒤, 그날만큼은 60명이 모여보자고 공동체 청년들에게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우연히 출석하고 결석한 숫자가 상쇄되어 기막히게 40명이 모이나, 어느 한 날에 이 법칙을 의도적으로 깰 수만 있다면 60여 명은 충분히 모일 것 같았다.
열심히 기도했다. ‘60’은 사역자로서 내 능력을 검증하고 증명하는 숫자다. “하나님! 이날에 제발 60명이 모이게 해 주세요.” 디데이 전까지 매주 청년들과 60명이 모이도록 힘껏 기도했으니, 하나님도 우리 정성에 탄복하여 이 소원을 들어주셔야 할 것만 같았다.
드디어 디데이가 찾아왔다. 공동체 실로 들어가는 문손잡이를 잡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심장은 주책맞게 뛰었다. 살짝 열어 내부 동태를 살폈다. 뭔가 이상하다. 우연히 출석한 청년들이 보이지 않는다. 뜻하지 않게 출석하지 못한 청년들도 있는 듯하다. 용기 내어 문을 활짝 열었다. 상쇄의 법칙은 그날도 깨지지 않았다.
내 기도, 아니 우리 기도를 무시한 하나님께 분노했다. 분노는 이내 서러움으로 변하여, 광나루 기숙사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사람들의 시선까지 신경 쓸 겨를이 내겐 없었다. 오직 분노와 서러움만 있었다. “하나님, 어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마음속으로 하염없이 하나님을 향해 소리 질렀다. 순간 내 마음에 선명하게 새겨진 깨달음을 잊을 수 없다. 정말 60명이 모였더라면, 난 그저 60명이란 숫자에만 만족했을 거란 걸. 오랜만에 군에서 휴가 나온 청년, 사정상 나오지 못했다가 용기 내어 나온 청년, 신앙의 바닥에서 헤매다가 다시 하나님을 찾으려고 나온 청년, 친구의 간곡한 부탁에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나온 청년조차 내겐 60명이란 목표 숫자를 이루기 위한 '1'이라는 하나의 숫자였다는 걸.
그날 하나님은, 애써 관심을 두지 않으면 그저 스쳐 지나갈 수 있는 ‘한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훈련을 내게 허락하셨다.
과장은 어느 누가 출근하는지에 대해서는 결코 묻지 않는다. “몇 사람이 나오지?”라고 물을 뿐이다. 회사에서 필요한 것은 종업원의 인원 수일 뿐 개개인은 아니다. 쓰네미를 비롯하여 식당종업원들은 특정 개인으로서 능력과 개성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인간으로도 대체 가능한 ‘노동력의 단위’로서 세어지고 있는 것이다.
-모리무라 세이이치, 「단위의 정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