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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의 정의

사전적 정의 따윈 개나 줘버려

by 냉수 한 그릇

백수의 기준이 무엇인지 난 모른다. 일하느냐 마느냐가 기준이라면, 분명 주일마다 교육목사로 사역하니 백수가 아니다. 주중엔 집에서 육아를 전담하니 이 또한 백수가 아니다. 돈을 버느냐 마느냐가 기준이라면, 일주일에 하루 사역하지만 적은 금액의 사례비라도 받으니 백수가 아니다.


혹시나 해서 네이버로 검색해 보니, 스크롤을 한참이나 내려 아홉 번째에나 볼 수 있다. 한 푼도 없는 처지에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란다. 적어도 백수가 되려면 한 푼도 없어야 하고 하는 일 없이 빈둥거려야 하는데, 난 교회 사역으로 사례를 받고 육아도 하니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백수가 아닌 게 분명하다. 근데 아내는 날 백수라고 놀린다. 이에 질세라 아들도 백수라 부른다. 아이유의 ‘라일락’ 노래를 개사하여 <오, 라일락. 아빠는 백수야~>라며 놀리기도 한다. 내 마음이 하늘만큼 넓고 바다만큼 깊어서인지 기분 나쁘거나 화나지 않는다. 오히려 ‘백수’라는 용어를 아내나 아들이 거부감없이 쓰며 온 식구가 웃을 수 있는 우리 집만의 편안한 분위기가 맘에 든다.




왜 백수라고 놀렸을까? 생각해보니 답을 알 것 같다.


먼저, 한 푼보다 많이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보다. 교육목사로 받는 월 90만 원이 채 안 되는 돈은 한 푼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둘째, 일주일에 하루보다 많이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보다. 주5일근무제이니 절반 이상인 3일은 일해야 하나 보다. 교육목사로 일주일에 하루 출근하는 것은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것이다. 소득이 발생하지 않는 육아 역시 일에 포함하지 않는 셈이다.


마지막, 남편에게만 해당한다고 생각하나 보다. 아내가 육아와 살림을 도맡아 하면 전업주부라고 하지 백수라고 하지 않는다. 이런 논리라면 나도 주중에 육아하고 살림하니 전업주부인데, 주부로 인정하지 않고 백수란다. 그래, 아내는 그렇게 생각하나 보다. 음…. 놀리는 아내를 탓할 순 없다. 아내뿐 아니라 대한민국 누구라도 날 백수로 생각할 것이다. 나조차 스스로 백수로 인정하니 말이다. 그러니 사전적 정의 따윈 개나 줘버려. 그렇다. 위 사실에 근거하여 난 여전히 백수다.


남자는 돈 많고 능력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한 건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다. 악마적 사고이고 병폐이다. 백수라도 남편과 아빠라는 존재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얼마나 소중했는가는 잃고 나서 깨닫는다. 그러니 가족을 위해서라도 이겨내야 한다. 잘 버텨야 한다. 살아야 한다.


“백수라도 너랑 잘 놀아주는 아빠가 좋아? 아니면 100만 원짜리 레고 사주는 옆집 아저씨가 좋아?”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히 아빠가 최고지!”

돈 못 버는 백수라도 아빠를 아빠로 인정해주는 아들에게 고맙다.


대한민국에 사는 남편이자, 주 3회 미만 일하고, 월 100만 원 이하를 버는 모든 백수에게 고한다.


그대들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미래요, 가정의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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