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부장 제도의 산물
한 가정을 이끌어나가는 사람, 네이버 사전에 등록된 가장의 정의다. 가정을 이끌어나간다니, 이것 참 모호한 표현이다. 가정을 경제적으로 원조하면 이끌어나가는 것인가? 최종결정권자로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하면 이끌어나가는 것인가? 뭐든 내 말대로 따르도록 강요하면 이끌어나가는 것인가?
만약 가장의 정의가 위와 같다면, 난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다. 경제적 원조는 아내가 감당하니 해당하지 않고, 중요한 문제는 가족이 함께 논의하니 또한 해당하지 않고, 내 말대로 따르도록 강요하다간 아내에게 죽으니(?) 역시 해당하지 않는다. 아내로선 첫 번째 기준을 충족하니 스스로 가장이라고 우길지도 모를 일이다. 이쯤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겠다. 네이버 사전에 나온 가장의 두 번째 정의는, 남편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결국, 나와 아내 모두 가장이 될 수 없다.
한 가정에 가장이 없다니 이 무슨 기괴한 말인가? 분명한 건, 내 집엔 가장이 없다는 것이고, 아무런 불편함도 없다는 것이며, 문제 될 만한 것 역시 없다는 사실이다. 누가 남자는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집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규정했는가? 바깥양반과 안사람이 웬 말이던가? 가장은, 가부장 제도의 산물이고 폐단이다.
부목사로 일하던 시절, 4층짜리 빌라 층마다 부목사 가정이 살았던 적이 있다. 쓰레기 버리는 날은 사택에서 나온 쓰레기뿐 아니라 주변 집에서 몰래 버린 쓰레기로 1층 대문 앞은 금세 지저분해졌다. 대문을 드나들며 눈에 띌 때마다 정리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우연히 사택 대문 앞을 지나치던 담임목사 사모님은 쓰레기봉투로 가득한 사택 대문 모습이 눈에 거슬렸나 보다. 아내에게 전화해서는 층마다 순번을 정해서라도 정리하도록 요청했고, 아내는 다른 부목사 사모님들이 임신 중이니 우리 가정이 알아서 정리하겠다고 했다. 아내의 말에 사모님은, “아니 그걸 왜 목사님이 하세요? 목사님은 말씀 준비하시고 기도하셔야 하니 사모님들이 알아서 하셔야죠.”라고 했단다.
사모님은 평생을 목회자 가정에서 자라고 목회자와 결혼하고 살면서, 집안일 포함하여 목회와 관련 없는 일은 당연히 여자가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비난하고 싶진 않다. 가부장제의 폐해인 가장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스스로 여성이 갖는 존엄성을 짓밟아버린, 그러면서도 이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모습에 연민을 느낄 뿐이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에게 정해진 고유한 역할이 있을 순 없다. 남자이기에 바깥일을 해야 하고, 여자이기에 집안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가족 구성원 모두가 행복해지는 데 걸림돌이 된다. 물론 생물학적 차이에서 오는 필수 불가결한 역할이 있을 순 있다.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힘을 써야 하는 일이라면 남편이 하는 것이 좋다. 섬세하거나 감성적인 일을 할 때는 아내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관습적으로 정해진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한다.
우리 집에선 내가 재정관리를 한다. 어떤 일이든 더 잘하는 사람이 하면 된다. 난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종이에 수입과 지출을 기록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 서울에 올라와서 자취하며 연금, 저축, 보험, 공과금납부 등 경제생활을 했다. 그 덕에 연초 작성한 가계 예산대로 매월 각 통장으로 해당 금액을 자동이체하고, 항목별 정해진 금액만큼만 지출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신용카드는 오로지 한 장으로 비상시에만 사용하고, 모든 결제는 체크카드로만 한다. 돈 관리를 정해진 관습대로 아내가 할 필요는 없다.
집안일도 같이 한다. 결혼하며 쓰레기 버리기, 빨래하기 등은 자연스레 내 담당이 되었다. 설거지도 도와준다. 집안일에 남녀역할이 정해진 것은 아니다. 상의하여 분담하면 모두가 행복하다. 때론 좀 더 체력이 남아있는 사람이 해주기도 한다. 일하고 돌아온 피곤한 아내를 위해 내가 식사를 준비하거나 설거지를 하기도 한다.
가장은 없다. 아니 있어선 안 된다. 함께 고민하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결정하면 된다. 가장이란 이유로 내 슬픔을 가족에게 숨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강한 모습만 보여야 한다는 강박감이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가장이란 부담은 또 다른 여러 악을 만들어낸다. 굳이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를 가장으로 정해야 한다면, 가족 모두가 되어야 한다.
가장은, 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