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이남의 화려한 도시로 이사하다
한강 이남으로 이사할 줄은 몰랐다. 사임 후 일상이 집을 한두 군데 보는 것으로 시작했으니, “오늘은 집 보지 않고 나랑 놀아주면 안 돼?”라는 아들의 투정도 이해가 되었다. 서울의 여러 구를 돌며 집을 보다, 어쩌다 연고 없는 이곳에 오게 됐다. 아내의 직장과 초등학교, 그리고 지하철역의 위치를 고려했지만, 속내는 얼마 되지 않은 전세자금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이 ‘어쩌다’란 말이 그냥 하는 말은 아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집을 보려고 부동산에 들렀을 때, 아들을 본 사장님의 첫마디는, “초등학교 때문에 오셨어요?”였다. 이어 자녀교육에 관한 질문이 쏟아졌다. 아들 교육은 신경 쓸 겨를도 없는 처지인데….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적이 당황했다. 정신을 차리고 질문의 의미를 되새겨보니, 이곳은 ‘오목교’였다. 오목교도 목동일 줄이야. 그렇다. 이때부터 ‘목동 라이프’가 시작된 것이다.
난 괜찮을 줄 알았다. 여태껏 문제없었다. 그러니 고층 아파트가 즐비한 이 화려한 도시에서도 난 그리스도인이니, 그리고 목사이니 초연할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아니 교만이었다. ‘사택’이란 단어는 심리적 방어선이었다. 바보같이 난 이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사택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내 돈 주고 마련한 집이 아니니 상대의 화려함에도 내게 위축 따윈 필요 없었다. <내 집 마련>이란 고귀한 사명을 겪어보지도 않은 내가, 이런 물질적인 것으로 자랑하거나 주눅 들지 말라고 설교했으니, ‘잘 알지도 못하면서 쉽게 말하지 말아요.’라며 속으로 욕할 이들에게 할 말이 없다. 그러고 보니 사택이 지금 집보다 훨씬 컸다.
잠시라도 하나님에게서 한눈팔면 그리스도인이라도, 그리고 목사일지라도, 이 자본주의 사회에선 한낱 연약한 인간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열등감과 자격지심이 스멀스멀 올라올 뿐이다.
잠자리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면, 하이페리온의 화려한 LED 옥상 조명이 눈에 들어온다. 그 옆으로 트라팰리스가 그 위용을 과시하듯 우뚝 서 있다. 키 작은 낡고 오래된 다세대 연립주택, 한눈에 집 구조가 훤히 보이는 좁은 집에서 이 거인 같은 아파트를 바라보노라면, 마치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그러했던 것 같다.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렇게 하루하루 버텼다. 아는 이라도 있었다면 좀 나았을 것이다. 익숙한 동네였다면 견딜 만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강 이남의 화려하고 낯선 이곳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내 마음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6일째 되는 날 아침, 하나님이 내게 말씀을 주셨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설교한 적 없었던 말씀이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날 울렸다. 한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했던 수많은 설교에서 인용조차 되지 않았던 구절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무너진 내 마음에 용기를 주었다. 돈이면 거짓 사랑마저 살 수 있는 이 거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세상 가치로 보잘것없는 그리스도인이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말씀’이다.
예수님이 칠십 인을 각 동네와 지역으로 파송하셨다. 돌아온 그들은,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항복했다며 기뻐한다. 충분히 기뻐할 만하다. 나였어도 그리했을 것이다. 수고했다며 위로해 줄 법도 한데, 예수님은 그들의 웃음을 무색게 하는 말씀을 툭 던지신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_눅 10:20"
눈 씻고 들여다보아도 내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이 상한 자에겐 무심코 지나쳤던 말씀에도 시선이 꽂힌다. 아, 매일의 삶 속에서 레마의 말씀을 경험했다면 좋으련만. 그동안 내 심령이 말도 못 하게 기름졌나 보다. 칠십 인의 제자들은 귀신들이 항복한 것을 기뻐했다. 신기했을 것이다.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이 벌벌 떨었으니, 스스로 뿌듯했을 법도 하다. “나 이런 사람이야!”라며 그들의 ‘능력’을 자랑하고 싶은 욕구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를 비롯한 사람들의 모습이 이러할지도 모른다.
소위 세상에서 부유하고, 지위가 높고, 잘 나가는 것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넘쳐난다. 자랑하고 기뻐하고 싶은 마음을 깎아내리고 싶진 않다. 그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 눈에 보이는 화려한 이것은 어느새 우리의 목표가 되곤 한다. 철저히 세상 논리가 기독교 가치를 흔든다.
주님은 내가 무엇을 기쁨의 원천으로 삼아야 할지 깨우쳐주셨다. 내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 즉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야말로 진정 기뻐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무엇을 기쁨의 근원으로 삼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 수준을 결정한다.
사방이 자본주의의 산물로 뒤덮여있을지라도, 내가 비록 가진 것이 없더라도, 낡고 초라한 집에 살지라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어깨를 펼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다.
책상 앞 벽에 이 말씀을 붙여놓았다. 그렇다. 여전히 진리는 나를,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요 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