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하다면 삶을 조금 바꿔보는건 어떨까요?
우리는 살면서 행복을 추구하지만, 늘 행복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날아갈 듯이 기분이 좋았다가도 자고 일어나면 하늘이 무너질듯 우울해지는게 우리의 삶인 것 같습니다. 멀리가지 않더라도 내 삶에 그럭저럭 만족해가면서 잘 살아가다가도, SNS에 친구들이 올린 멋드러진 사진을 몇장 보면 내 삶이 그렇게 초라해보일 수가 없습니다.
한때 저는 제 삶이 너무도 싫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뭐 하나 잘하는 것도 없고, 얼굴도 잘생기지도 않았고, 그러면서도 욕심은 많아 현실과 이상 속에서 늘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상은 저렇게 높은데, 현실은 지하 100층이니 얼마나 삶이 불만족스럽고 불행했겠습니까. 그 높이의 차이만큼 자괴감이 들었고, 자존감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삶이 이렇게 불행하면, 삶은 고통으로 가득차 있다는 불교의 구절이 그렇게 와닿을 수가 없습니다. '삶은 고통스러운 것인데 살아서 무엇을 하나?',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이런 생각들이 많이 듭니다. 아니, 늘 이 생각 뿐입니다. 삶을 계속 살아가야하는 이유를 찾기시작하는 것이지요. 과연 이렇게 불행한 삶을 계속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 하고 말이죠. 문제는 이러한 고민을 계속해도 답을 찾기가 어려울 뿐더러, 내 삶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고민해도 내가 가진 이상과 현실의 격차는 벌어지면 벌어졌지 절대 좁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근본적으로 불행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은 계속됩니다. 이상과 현실의 격차. 까뮈는 이걸 두고 삶의 부조리라고 했던가요?
한때는 불행이라는 것은 내 삶에 절대로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상황을 긍정적으로만 보고, 부정적인 모든 것들을 나쁘다고 생각했었지요. 왜 수많은 자기계발서에서 이야기하잖아요?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긍정적인 사람이 성공한다', '행복해서 웃는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거다' 등등. 그래서 제 삶에서 부정적인 것들을 모두 부정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와서 되돌아보면 그렇게 부정을 없애려고 집착했던 것 자체가 오히려 내 안의 부정성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 아닌가라고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불행과 불만에 대해서 조금더 성숙된 자세, 의연한 태도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생각이 바뀌었냐고요? 불행과 불만을 받아들이는 제 삶의 태도와 생각 몇가지를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첫째, 불행은 삶에서 절대 사라질 수 없다. 삶에 있어서 불행은 행복만큼이나 필연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행복과 불행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동전의 앞면, 뒷면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동전의 앞면이 있어야 뒷면이 존재할 수 있고, 뒷면이 존재해야 앞면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요. 이 얘기를 조금 뒤집으면, 앞면이 존재하지 않으면 뒷면도 존재할 수 없고, 뒷면이 없으면 앞면도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이 동전 이야기를 '불행'에 대입해보면 이렇게 됩니다.
불행이 있어야 행복이 존재할 수 있고,
불행이 존재하지 않으면 행복도 존재할 수 없다.
행복과 불행은 상대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가 불행을 느끼기에 행복을 느낄 수 있고, 행복을 느끼기에 불행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즉, 행복과 불행은 결국 하나이기에 내 삶에 행복만 존재한다거나 불행만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지요. 애초부터 내 삶에 행복만 가득했으면 이라는 생각은 불가능한 것이므로 아무리 고민해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행복과 불행의 상대성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조금 더 행복을 많이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기에 같은 것을 '행복'으로 느낄 것이냐 '불행'으로 느낄 것이냐는 우리의 노력의 의지로 어느정도 선택할 수 있게 되지요. 그래서 수많은 자기계발서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해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주어진 환경은 내가 선택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인식할 것이냐는 나에게 달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불행은 결국 내가 만들어낸 것이다. 앞에서 '행복과 불행이 사실은 같은 것이더라' 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행복과 불행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임을 알게 되면, 이제 남은 것은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 라는 의지의 문제가 남습니다. 누군가는 물이 반쯤 차있는 컵을 보고 '반이나 남았네'하면서 기뻐하는 것과 '반밖에 없잖아'하고 슬퍼하는 것. 이것은 현상을 마주한 '나'의 생각과 의지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는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불행한 감정이 들 때, 내 삶이 너무나 불만족스러울 때 우리는 이것을 불행, 불만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르게 생각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어떤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나의 생각과 의지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쉽게말해 '반밖에 없잖아'라는 꼬리표 대신에 '반이나 남았네'라는 꼬리표를 컵에 붙이자는 이야기죠.
그러면 내 삶에 불행과 불만이라는 감정이 찾아왔을 때, 이 감정에다가 어떤 꼬리표를 새로 달아주면 좋을까요? 저는 '불행'과 '불만'이라는 꼬리표를 '변화가 필요한 때'라는 새로운 꼬리표를 달아주었습니다. 내 삶이 불행하다고 느껴질때, 내 삶이 불만족스러울때마다 '내 삶에 변화가 필요한 때'라는 새로운 꼬리표를 붙여준 것이지요. 그러니 조금 삶이 우울하고 슬퍼도 그 감정에 빠져있기보다는 '아.. 내 삶에 변화가 필요한 시기네.' '계속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고 내 안의 소리가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거구나'라고 생각하게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삶이 우울하고 불행할때마다 변화를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삶의 작은 변화. 정말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변화라도 줘보는 것이지요. 그 작은 변화는 내가 뭔가를 해냈다는 작은 성취감을 가져다 주었고 그 작은 성취감은 또다시 작은 행복감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그런 작은 변화가 하루, 이틀, 1주, 한달 차곡차곡 쌓이다보니 나중에는 남들이 놀랄만한 큰 성과로 이어지기도 했지요.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도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불행때문에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늦게 일어나고 늦게자는 반복되는 하루 일과가 제게는 너무도 불행하게 느껴졌고, 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조금 일찍 일어나는 삶의 변화를 줘보기로 한 것입니다. 늦게일어나서 내 삶이 불행하니, 몸은 조금 피곤하더라도 일찍 일어나보자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은 이 변화들이 쌓이고 쌓여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침 늦게 일어나는 것에서부터 제 삶의 불행과 불만족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제 아침 일찍 일어나게 되니 그런 불행과 불만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아침일찍 일어나서 행복한 하루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글 역시도 남들이 자고 있는 새벽에 쓰고 있습니다.
물론 아침 일찍 일어나야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올빼미에게 아침일찍 일어나서 활동하라고 하면 그 올빼미는 행복할 수 있을까요?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다 자기만의 행복 라이프 스타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일찍 일어나야 행복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밤늦게 활동해야 행복할 것입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행복하신가요?'라는 질문입니다.
만약 행복하지 않다면, 삶의 변화를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지금' 불행한 것은 확실하니까 조금 변화를 줘보자는 것이지요. 밑져야 본전 아닌가요? 어차피 지금 불행하다면 잃을게 없을테니까요. 우연히 변화를 줘서 삶이 행복해진다면 대박 아닌가요?
오리들 사이에서 태어난 백조이야기. '미운 오리 새끼' 동화를 모두 아실 겁니다. '미운 오리 새끼'에 나오는 백조처럼 자기 자신을 오리로 잘못알고 있으면 그 백조는 행복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그것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 라이프사이클을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 지금의 라이프 사이클에서 불행과 불만족을 느끼신다면 당장 삶의 작은 무언가를 바꿔보세요. 불행과 불만은 삶이 힘들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에 변화를 주라는 신호니까요. 그러면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행복을 불행속에서 발견하게 되실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