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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자본가 Aug 29. 2016

#3. 우리가 가난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지배와 착취

학점과 토익공부를 제쳐두고 

책을 읽고 싶었다. 



삶의 의미와 방향성,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를 알고 싶었다. 



자기계발서부터 

에세이, 시, 정치, 

사회, 경영, 경제 서적까지 

호기심이 가는 책들은 모두 읽었다. 



아침 7시부터 학교 열람실에 앉아 

밤 11시까지 책을 읽었다. 


그렇게 읽은 많은 책들이 

내게 많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주었다. 






그 중에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여기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왜 우리는 노력을 많이해도 잘 살수 없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인류의 긴 역사상 

인류가 평등했던 적은 없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서도 

보이지는 않지만 

남과 여, 백인과 흑인, 

기성세대와 신세대, 노인과 젊은이 등으로 

불평등이 계속 되고 있다. 






마르크스는 

산업사회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나뉘어진다고 생각했다. 


부르주아는 자본가 계급이고 

프롤레타리아는 노동자 계급이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에 따라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의 자본을 투입하여 

공장과 같은 생산시설을 짓는다. 


그리고 

생산 공정을 분업화하여 

생산효율을 극대화 시킨다. 



실제로 

애덤스미스가 쓴 ‘국부론’에 따르면, 


한 사람의 노동자가 

제조 공정 전체를 맡으면 


하루에 핀 스무개 정도를 

겨우 만들 수 있지만 



10명의 노동자들이 

제조공정을 

18단계로 나누어 

작업하면 


하루에 4만 8천개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산업이 고도화되면 될수록 

제조공정이 

복잡해지고 길어지니까 


이를 쉬운 작업별로 

쪼개서 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생산성의 증대는 

인류의 풍요로 이어질테니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이러한 분업생산시스템을 토대로 

전례없는 번영을 이룩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이렇게 생산성이 급증했는데도 

부르주아 계급만 부유해지고 

프롤레탈리아의 삶은 여전히 궁핍하는가이다. 





18단계의 제조공정을 통해 

발생된 4만 8천개의 옷핀이 


왜 한쪽으로 쏠리는지에 대해 

한번쯤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이같은 문제에 대해 


마르크스는 

‘착취’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상품이라는 것은 

원료에 노동력이 투입됨으로써 만들어진다. 



따라서 상품의 가격도 

‘원료의 가격+노동력의 가격’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실제 상품의 가격은 

이보다도 비싸게 매겨진다. 



그리고 그 이윤은 

부르주아 계급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이렇게 

부르주아 계급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돈을 

마르크스는 착취라고 보았다. 




예를 들어 

300원에 팔리는 상품이 있는데 

원재료의 가격이 100원이고 

노동력의 가격 역시 100원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하나의 상품은

 200원으로 만들어지므로 


상품이 팔릴 때마다 

100원의 이윤이 남는다.


이 100원이 

프롤레탈리아계급의 몫인데

 

부르주아 계급이 이를 가로채서 

부르주아 계급은 

더욱더 부유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18세기 초반 

산업시대 초창기에는 

공장주들이 

노동자들에게 주는 임금이 

굉장히 적었다. 



거의 목숨을 거의 연명하는 수준으로

임금을 지급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그 당시에는 

최저임금을 보장하는 법도 없었으니

정말 열악한 환경과 처우 속에서 

근로자들은 일을 했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렇지 않다. 



근로복지법이라는 것이 있어 

근로환경이나 근로시간 등이 

모두 법적으로 정해져있다.

 


초과근무를 하게되면 

초과 수당도 요구할 수 있다. 


최저임금제가 있어서 

부당하게 

낮은 임금을 받는 일도 

없어졌고, 


해고도 쉽게 할 수 없다. 



그렇다.

18세기 산업시대 초기와 비교해보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하지만 이것으로 정말 아름다운 세상이 된 것일까? 


4만 8천개의 옷핀은

부르주아 계급이 독점하지 않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적절하게 분배되고 있는 것일까?



내 생각엔 

지금도 ‘착취’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다. 


좀 더 교묘하게 

눈에 띄지 않게 말이다. 


국가의 GDP는 성장하고 


대기업 재벌 총수는 

점점 더 많은 돈을 벌고 있다. 



그런데 

소득분위 하위 계층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의 착취는 


단지 법이라는 테두리와 

시장 논리라는 명분으로 


암암리에 

자행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조용한 착취가 

일어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특히 여러 원인 중에서도 

자본가와 노동자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고 있는 것이 

가장 크다고 생각된다. 



누가 자본가이고 

누가 노동자인지 


구분짓기가 

더 이상 어려워졌다는 이야기다. 



쉽게 말해, 


자본가이면서 

노동자인 

사람들이 증가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고령화 사회’이야기를 해보자.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연금문제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국가에서 

만 65세 이상자에게 돈을 주는 것인데 

그 돈이 어디서 오느냐는 문제다. 



과거에는 

노인이 적고 젊은 층이 많았다.


노인 1명의 연금을 

젊은이 10명의 세금으로 주는 셈이었다. 



노인 1명이 

연금을 10만원을 받는다고 가정하면 

젊은이들은 1만원씩만 내면 되었다. 




액수가 크지 않고, 

일하는 젊은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노인 1명을 

젊은이 3명이 

부양해야 하게 된 것이다. 



젊은이의 숫자도 줄어들었지만, 

양질의 일자리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젊은이들의 숫자는 

이보다 더 적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세대간 착취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젊은 세대의 세금을 거둬들여 

노인 세대에게 돈을 주는 착취 말이다. 



이런 착취가 과연 연금문제만 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주거문제에서도 착취를 볼 수 있다. 



대학교를 타지로 오거나 

취업에 성공한 사람들은 


학교나 직장 근처로 

거주지를 옮길 수 밖에 없다. 



가족들의 생활 터전이 있으므로 

가족들이 전부 이사를 올 수는 없는 상황이고 


조그마한 원룸을 

하나 구해서 생활하게 된다. 


원룸의 가격은 

지역마다 다르지만 

매달 30~70만원정도 된다. 



시장 원리에 따라 

형성된 가격이고 


타지에 집이 없으니 

방을 구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이런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에도 

사실 착취구조가 숨겨져 있다. 



원룸의 주인은 

이제 막 기업에서 은퇴한 부부이다. 



기업에서 은퇴하고 

마땅히 하는 일 없이 

방을 놓아 임대료로 생활하고 있다. 




18세기 부르주아 계급이 

공장을 소유하여


돈을 벌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집을 가지고 돈을 버는 것이다. 



연금을 받는 노인이나 

원룸을 소유한 은퇴부부나 

부르주아 계급이라고 딱히 구분짓긴 어렵다. 



이들은 프로레탈리아면서 

동시에 부르주아이고, 


부르주아면서 

동시에 프롤레타리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르주아와 프롤레탈리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중첩되면서 

이 시대의 ‘착취’가 교묘히 가려지게 된 것이다. 




대학생들이 

그토록 선망하는 

대기업 취업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것은 18세기 초반 공장에 취업하려는 

노동자의 모습과 차이가 없다. 




물론 

지금은 

커리어니 경력관리니 

승진체계를 갖추어 

개인의 성장과 발전을 장려하고 

근로 환경이나 복지제도도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 끝은 결국 다르지 않다. 



0.86%의 사람들만 

임원이라는 것이 될 수 있을 뿐이고 

그마저도 몇 년하지 못한다. 



오죽하면 


임원이

 ‘임시직원’의 약자라고도 하겠는가. 



나머지 99.14%의 사람들은 

명예퇴직, 구조조정 등의 명분으로 

결국 더 이상 일하지 못하게 된다. 



대기업의 월급이 

중소기업에 비해서 많다고는 하지만 


입사하면서 

자동차 할부 갚아나가고, 


자동차 할부 다 갚을 때쯤이면


결혼해서 

아파트 융자 갚아야 한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50대가 되어버린다. 



빚져서 빚 갚다가 

인생의 좋은 날을 

다 보내게 되는 것이다. 



결국 

대기업의 취업인생도 

얼마간의 돈을 받으면서 


일을 하긴하지만 

결국 막대한 부는 오너가 다 가져가는 것으로 끝이난다. 




노동자에게 남는 건 

빚과 늙음 뿐이다. 

그나마 빚이 없으면 다행이다.



도대체 누가 빚만 갚다가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마는 인생을 원할까?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원치 않는다. 

단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사회의 구조가 

그렇게 가게끔 되어있을 뿐이다. 



그래서 주어진 길을 가다보면 

나도 모르게 

저런 삶을 살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살고 있으니 

사는게 다 그런거지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오늘날 착취는 

이렇게 교묘하게 이뤄지고 있다. 


시장논리와 법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합법적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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