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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자본가 Nov 12. 2017

혐오의 시대

분노를 넘어서 혐오로

혐오의 시대




  김치녀(여성을 비하하는 말), 한남충(한국남자를 비하하는 말), 설명충(설명을 자세히 해주는 사람을 비하하는 말), 맘충(엄마들을 비하하는 말), 숨쉴한(한국남자는 쉼실 때마다 한번씩 패야한다) 등.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혐오가 넘쳐난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은 사라지고, 욕설과 비하, 비방만이 난무한다. 뭐 하나 조금이라도 튀는 순간 그 사람은 벌레가 되고만다. 벌레는 대부분이 혐오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이 원래부터 혐오가 가득찼던 것은 아니었다. 혐오 이전에 분노가 있었다. 분노는 혐오와는 성격이 다른 감정이다. 혐오가 상대방에 대한 좋고 싫음의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분노는 정당성과 합리성을 수반한다. 그래서 분노는 공감과 연대로 확장되지만, 혐오는 냉소와 차단을 불러온다.




  2008년 광화문 일대가 수십만개의 촛불로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진 적이 있었다. 바로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시위때문이었다. 당시 광우병 괴담이 돌면서 미국산 소고기에 대한 공포가 국민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이러한 소고기를 수입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에 온 국민이 ‘분노’한 것이다. 이러한 온 국민의 분노는 30개월 미만의 미국산 소고기만 한국에 선적하기로 하는 등 미국과의 협상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실제로 우리나라 협상단은 광우병 촛불시위를 하고 있는 사진을 미국 협상단에게 보여주며 재협상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기도 했다고 한다. 광우병 우려가 있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공감과 연대로 나아가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게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은 이전보다 조금 더 나아졌다.






   2016년 강남역 10번출구 일대에 수 만장의 포스트잇이 붙었다. 강남역에서 살해당한 여성을 추모하는 메시지를 붙이고자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살인을 저지른 가해자는 “여성들에게 무시를 당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고 이러한 진술은 여성들로 하여금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을 ‘여성혐오’로 일어난 범죄라고 낙인 찍게 하였다. 여성혐오로 인해 일어난 범죄라는 사실은 그동안 여성으로서 사회적으로 받아왔던 억압과 피해가 한데모여 폭발하는 기폭제로 작용하였고 여성 단체들은 이번 사건에 분노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여성들의 분노를 보는 일부 남성단체들은 모든 남성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바라보는 여성의 시선에 대해 분노하기 시작했다. 여성단체들이 “여혐으로 인한 범죄다”고 주장하면 남성단체에서는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일 뿐 여혐은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여성혐오로 일어난 범죄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애초에 여성을 대상으로 하였고 가해자의 진술을 보았을 때 여성혐오로 인한 범죄라고 이야기한다. 반면에 여성혐오로 인한 범죄가 아니라는 쪽에서는 살인 사건의 피해자는 절대다수가 약자이며 정신병자가 약자를 살해한 사건을 여혐이라는 프레임으로 단정지어 볼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찌되었든 서로에 대한 서로의 분노는 그동안 받았던 차별과 억압이 만나 폭발하기 시작했다.








  남성과 여성이 가지는 서로에 대한 혐오는 지금으로부터 1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제적 능력이 없으면서도 한끼 밥값과 맞먹는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고 명품백을 들고 다니는 여자 뜻했던 된장녀라는 단어가 2006년 야후에서 선정한 인터넷 신조어와 유행어에서 1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여성을 비하하는 단어로 만연하게 쓰이고 있었다. 이후 ‘김치녀’, ‘맘충’, ‘김여사’ 등 ‘여성은 곧 무개념’이라는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남성혐오가 분출되기 시작한 것은 2015년 메르스 사태 때이다. 홍콩정부가 메르스 증상을 보인 한국 여성 2명을 격리조치하려고 하자, 여성들이 조치를 거부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 뉴스를 접한 누리꾼들은 ‘김치녀 그럴 줄 알았다’라는 식의 여성혐오 글들을 쓰기 시작했고 이러한 혐오글에 반발한 여성들이 ‘메갈리아(메르스 + 이갈리아 딸들)’를 만들었다. 메갈리아들은 ‘김치녀’라는 여성혐오에 ‘한남충’이라는 남성혐오로 받아치기 시작했다.





  분노는 공감과 연대로 확장되지만 혐오는 냉소와 차단만 남는다고 했다.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 역시 강남역 10번출구에 수만장의 포스트잇만 남았을 뿐 우리사회가 나아진 것이 없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하던 골의 깊이만 서로 확인하고 감정만 상했을 뿐이다. 그래서 이번 강남역 살인 사건에 대해서도 혐오문화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살인 사건 자체를 여성혐오로 조장하는 분위기 자체를 경계해야한다는 것이다. 결국 혐오는 또다른 혐오를 낳고 더 큰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혐오 말고도 우리나라의 ‘충(蟲)’문화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남충, 맘충, 설명충 등 단어 끝에 ‘-충’을 붙여서 모든 것을 벌레로 만들고 있다. 충문화는 상대방을 굉장히 쉽게 비하할 수 있는데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드는 구석이 있으면 뒤에다가 충을 붙이면 된다. 공부충, 연애충, 아이돌충, 급식충, 맘충, 한남충, 트로트충, 흡연충, 기독충, 메갈충, 일베충, 틀니충, 노인충, 다문화충 등 이렇게 말이다. 그러면 상대방은 일순간에 벌레가 되고 만다. 마치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소설처럼 말이다. 




  문제는 상대를 벌레로 만들어도 아무것도 나아지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토록 서로를 혐오하는 남성과 여성을 보더라도 내가 취업이 잘된다든지, 내 삶이 더 나아지든지 하면 이런 혐오문화는 긍정적으로 평가를 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혐오문화는 결코 그렇게 될 수가 없다. 내 삶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을, 타인을 혐오함으로써 극복하려는 시도는 잠시동안의 안도감만을 가져올뿐 혐오를 하는 사람이나 혐오를 당하는 사람을 승자로 만들 힘은 없기 때문이다. 




  사실 혐오라는 것은 그렇게 나쁘기만한 감정은 아니다. 모든 생물은 기본적으로 좋음과 싫음이라는 감정으로 자신의 종을 보전해왔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독버섯을 좋아했던 종은 지금은 모두 사라졌고 독버섯을 싫어했던 종만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존재하고 있다. 독버섯을 좋아하던 종은 독버섯을 먹고 죽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이처럼 좋음과 싫음이라는 감정은 생물에게 반드시 꼭 필요한 능력 중 하나이면서 본능이기도 하다. 혐오라는 감정 역시 싫음이라는 감정과 유사하다. 낯선 것, 위험해보이는 것, 이상해보이는 것, 나와 다른 것 등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인간은 싫음과 같은 부정적인 가정을 느끼게 되고 당연히 본능에따라 그것들을 멀리하게된다, 어떻게 보면 혐오라는 감정은 지극히 본능적인 반응인 셈이다. 




  하지만 본능적인 감정이라는 이유로 지금의 혐오문화를 합리화시키겠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감정이나 본능에 지배당하는 생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과 동시에 이성적 능력을 꾸준히 발전시켜왔고 그 결과 다른 빠르고 강한 동물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낯설고, 위험해보이고, 이상해보이고 나와 다른 것을 본능적으로 처음 느낀다면 이성을 통해 그것에 대해 인식하고 위험한 것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면 그것에 대한 혐오를 줄여나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처음 보는 음식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경우가 있다. 홍어 같은 경우가 좋은 예가 되겠다. 뭔가 쾌쾌한 냄새는 역겨움을 가져오고 상한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홍어를 처음 마주한 사람은 손 조차도 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런 홍어를 다른 사람들은 맛있다고 하면서 집어먹는다. 집에서 인터넷으로 홍어에 대해 알아보니 홍어는 원래 삭혀서 먹는 음식으로 상한게 아닌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냄새가 결코 상해서 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어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홍어에 대한 혐오는 조금씩 사라진다. 그렇게 한점, 두점 입을 대다보면 어느새 홍어 매니아가 되어있기도 하다.










  이처럼 혐오라는 감정은 외부적인 영향으로 발생하기도 하지만, 내부적인 영향으로도 발생한다. 바로 자기혐오라는 감정인데 자기혐오가 내적으로 치유되지 않으면 타인혐오로 표출되기도 한다. 인간은 앞서 살펴본대로 자기를 보호하고자하는 자기를 위한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지는 못한다. 누구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자기자신에 대한 불만족감을 지니고 있다. 이런 불만족감은 끊임없이 자기계발로 이어져 삶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너무 심할 경우 문제가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족감이 너무 높아지면,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 즉 자기를 혐오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혐오에 빠지게 되면, 본인의 실제 상태나 개선하려는 노력과는 상관없이 심리적으로 자기자신의 부정적 측면만을 바라보고 확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능력이나 처지, 상황 등에 대해 비관하고 부정적 감정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본인이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내가 이렇게 사는건 나라가 개판이라서 그래’ ‘내가 이렇게 돈이 없는건 저 나쁜 놈들이 내 돈을 모두 빼앗아 가서 그래’ ‘내가 일자리가 없는 건 저 여자들이 사회에 나와 일을 시작해서 그래’와 같이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비관적인 처지나 상황을 타인의 책임으로 전가하기 시작한다. 자기혐오가 타인혐오로 변모하는 것이다. 





  결국 혐오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는 감정이다. 이상하고 낯선 것은 본인의 무지로 인한 것일 수 있고 타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비방이나 근거없는 모욕 등은 자기 자신의 혐오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같은 집단 내에 있더라도 모두가 어떤 대상에 대해서 똑같이 혐오감을 갖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기자신의 심리적 상태에 따라, 자기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는 내부기제에 따라 혐오감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혐오에 대한 모든 책임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겠다는 것은 아니다. 분명 사회구조적인 문제, 문화적인 문제, 관습적인 문제로부터 발생하는 혐오들도 많다. 최근들어 혐오문화가 급증하는 요인도 경제적 요인이 크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회가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자 많은 기회들이 사라지고 경쟁은 점점 치열해진다. 점점 사라져가는 기회를 잡고자하는 개인들의 강압감과 스트레스는 이전보다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남들과의 경쟁에서 낙오되었다는 사실은 본인의 자기혐오로 이어지고 결국 타인혐오로 변모하게 된다. 이러한 혐오를 온전히 개인의 탓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영국의 브렉시트 문제나 EU에서 이민자들을 받는 문제, IS테러까지 모든 인류의 크고작은 문제들은 혐오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혐오라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감정문제나 사회적 수준의 문제에서 벗어나 글로벌한 인류의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인류사회의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더 빠르게 변화할 것이다. 빠르게 변화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없었던 것들이 새롭게 생겨난다는 의미이다. 인류 역사에 존재 하지 않았던 이상한 것, 잘 알지 못하는 것, 무서운 것,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새로운 변화에 대한 스트레스의 출현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트레스가 크면 클수록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감정과 움직임 역시 커질 것이다. 즉 혐오가 커질 것이라는 이야기다. 당장 우리사회에서도 지난 5천년간 존재하지 않았던 외국인 근로자들이 유입되기시작하면서 인종에 대한 혐오가 발생하고 있다. 이런 일들이 앞으로도 점점 일상화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혐오의 감정을 느낄 때마다 대상을 비하하고 증오의 감정을 내세우면 되는 것일까? 어차피 맞아드려야 한다면 혐오의 감정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 혐오를 마주하고 이것이 정말 혐오해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살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유없이 맹목적인 혐오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맹목적인 혐오는 개인과 사회 둘 다에게 모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변화하는 환경에 빠르게 적응한 종만이 살아남았다는 것이 다윈의 결론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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