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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Jul 19. 2020

서평. 7년의 밤, 정유정

에포케(epoché)란 그리스어로 ‘판단 유보'란 뜻이다. 살인사건에 대해서도 적용가능할까?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최씨는 오씨의 딸을 살해했다. 음주운전을 하다가 오씨 딸을 치었다. 본인도 놀라서 사망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차에서 내렸다. 살아있었다. “아빠" 라고 했다. 최씨는 더 놀라서 그 우람한 왼손으로 목을 졸랐다. 죽었다. 그리고 시체를 다리 위에서 댐 아래로 내던졌다. 여기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명확하다. 가해자는 최씨고 피해자 혹은 피해자의 아버지는 오씨다. 


이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게 진실일까?


오씨는 그 날 밤도 딸아이를 “교정"했다. 아내에게도 마찬가지다. 가장 즐기던 “교정"은 강간이고, 그 다음으로는 좋아한 것은 폰도 돈도 없이 길가에 내다버리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오면 폭행이 이어졌고, 아내는 유산을 했다. 그 여성은 오씨의 아내가 아니라 문하영이다. 결국 문하영은 집에서 도망쳐나갔다. 오씨의 딸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에는 벨트로, 젖은 수건으로, 나뭇가지로, 그 날은 아버지라는 사람의 주먹으로 쳐맞다가 집에서 도망쳐나가는 길이었다. 이미 피투성이었고, 앞니가 부러진 상태였다. 그 아이는 오씨의 딸이 아니라 오세령이다. 오씨가 생각하는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이다. 이 인격체를 죽인 사람은 진실로 누구일까? 오씨는 자신의 소유물을 빼앗은 최씨에게 복수를 계획한다. 최씨 본인은 물론 최씨 아내, 아들, 친구 모두 살인 대상이다. 사실로 보면 오씨와 최씨 중 누가 더 나쁜가? 진실로 보면?


책에는 물이 자주 등장한다. 우물, 호수, 바다가 배경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분위기가 축축하다. 왜 이렇게 물을 많이 등장시킬까. 바다를 깊이 들어가면 신세계인 것처럼 사람의 내면도 깊이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아닐까. 겉으로 보면 평화로운데 내면에서는 소용돌이치는 사람들이 있다. 물의 표면은 잔잔하지만 깊이 들어가면 처음 보는 것들이 자꾸 나온다. 사람은 점점 알게될수록, 특히 극단적인 상황에서 본성을 보인다. 나는 내 가족, 친구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몇 번의 즐거움, 몇 번의 섭섭함으로 상대방을 섣불리 판단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싸이코패스는 타인의 감정을 모른다고 한다던데, 나는 오히려 감정을 더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이 어디를 누르면 아픈지, 약점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 아픔을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잘 알아서 상처를 준다. 오씨는 최씨 아들 최서원이 스스로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만들기 위해 그 굴레를 지속적으로 상기시켜줬다. 최씨와 오씨의 차이점이 있다면, 최씨는 친구이자 소설가 안씨를 통해 아들이 자신을 마지막으로 복수의 고리를 끊게 도와주었다. 아들은 자신처럼 살지 않길 바라면서.


내가 아는 사람 맞아? 하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지 않도록 타인에 대한 판단을 유보해보자. 에포케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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