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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Jul 10. 2020

서평.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왜 사람을 죽이는 죄를 저지르는가? 대상이 자신이든 타인이든 세상의 중심이 나라서 내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자살은 분노의 대상이 자신이고 살인은 타인을 향한 것인데 어쨌든 나는 그 오만함을 지금도 공감할 수 없다. 미안한데, 너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전당포 주인 알료나와 그 여동생 리자베타를 살해한다. 살해한 이후에도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커녕 잘못된 일이라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나폴레옹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우월하고 비범하다고 생각하는 주인공은 본인보다 열등하고 평범한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잘못한 것이 아니며, 그 벌레같은 존재가 사라짐으로써 오히려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된다고 생각한다. 가진 것도 이룬 것도 없는 가난한 휴학생이 어디서 이런 자만심이 나오는걸까.


공교롭게도 소설을 거의 다 읽어갈 때 즈음 박원순 서울 시장이 범죄 혐의를 받은 이후 자살을 했다. 범죄 혐의가 사실이고 자살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추정한다면, 범죄를 인정하는 것이 죽는 것보다 싫었나보다. 시장으로서의 역할과 권력을 가진 상사로서의 역할을 구분하자면, 전자로서는 훌륭하지만 후자로서는 범죄를 저지른 것도, 자살을 한 것도 비겁하다. 


구원은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 어떤 벌을 받는 것이 정의로운 것인가? 라스콜니코프처럼 소냐라는 구원자가 있어야할까? 소냐가 아니었으면 자백을 과연 했을까? 나를 구원해줄 신이 있다고 믿어야 할까? 속죄는 가해자가 피해자와 그와 유사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도움으로써 받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


천 페이지에 걸친 라스콜니코프의 독백도 지루했지만 - 게다가 범죄에 대한 죄책감이 아니라 범죄가 발각될 두려움이 대부분이다 -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됐다. 그럴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래야 하는 게 옳으니까 행동했으면 좋겠다. 더 똑똑해서, 더 권력이 있어서, 폭행과 살해를 할 수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이니까 폭행과 살해를 하는 것이 옳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으면 좋겠다.


오늘부터 가해자가 죄책감을 느끼고, 죄를 인정하고, 속죄하는 날이 시작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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