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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Oct 21. 2020

서평. 두 도시 이야기, 찰스 디킨스

“최고의 시간이었고, 최악의 시간이었다.” 책 ‘두 도시 이야기'의 첫 문장은 책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만큼 유명하다. 그러나 어느 도시에서건, 어느 시대이건 누구에게는 최고이고 누구의 최악의 시기다. 프랑스 파리 18세기 말은 프랑스 혁명 전까지 왕족과 귀족에게는 최고의 시간이었다. 다 구경하기가 지루했을 정도로 넓었던 베르사유 궁전이 이를 보여준다. 그러나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시작으로 파리는 왕족과 귀족에게 피바다가 되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면서 프랑스 절대 왕정 시대는 막을 내렸고 이후 단지 왕족과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 또한 단두대에 올랐다. 단두대는 오히려 감사한 벌이었다. 사지를 찢고, 살과 뼈를 발라내고, 목이 거리에 내걸리는 파리는 혁명대가 외친 자유, 평등, 박애의 도시가 아니라 혼란의 도시였다.


피 한방울 없이 명예혁명에 성공한 영국의 작가답게, 디킨스는 두 도시, 즉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를 오가는 주인공들을 통해 프랑스 혁명을 관조했다. 책 곳곳에서 영국인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다네이는 귀족(후작) 삼촌이 시민을 대하는 태도에 혐오감을 느껴 (어린아이가 마차에 치여 죽으면 마차 밖으로 금전 한 잎을 던지면 끝이었다) 귀족 신분을 버리고 시민으로 살기 위해 런던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책 전반에 걸쳐 오해 때문에 세 번의 기소를 당한다. 충분한 증거 없이 기소당하고, 감정적인 배심원의 평결에 따라 두 번은 무죄를, 마지막에는 결국 사형을 선고받는다. 다네이는 첫 번째 사건에서 증인으로 나와준 마네트 박사와 그의 딸 루시와 인연을 맺는다. 이 때 변호인 스트라이버와 칼튼과도 친해진다. 루시는 세 명의 남자 - 다네이, 스트라이버, 칼튼 - 모두에게 사랑 고백을 받는데 결국 다네이와 결혼한다. 


사랑 얘기는 이 책에서 따분한 편이었고, 더 중요한 건 로리와 마네트 박사, 드파르주 부부 관계다. 프랑스인 마네트 박사는 프랑스 혁명 때 한 귀족에 의해 재판 없이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된다. 이유도 모른채 18년을 있어야 했기에 결국 정신이 나가고 온종일 구두 만들기에만 열중한다. 다행히 아내가 딸 루시를 갓난아기 때 영국 은행인 로리의 도움으로 런던으로 피신시키고 (아내는 이후 곧 사망), 루시는 아버지 존재를 모르고 고아로 성장한다. 마네트 박사는 감옥에서 나와 전 피고용인 드파르주의 잠긴 방에서 구두를 만들고 있었는데 영국인 로리는 마네트 박사를 파리에서 런던으로 데려와 딸 루시와 재회하는데 돕는다. 딸과 함께 살면서 마네트 박사는 정신을 차리고 곧 사위 다네이와 손주를 얻는데, 이들을 지켜보는 자, 드파르주 부부가 있다. 이들은 프랑스 혁명단으로 모든 프랑스 왕족과 귀족을 없애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결국 옛정을 무시하고 드파르주 부부는 마네트 박사의 뜻을 거슬러, 아니 오히려 박사를 이용해서, 박사의 사위인 다네이를, 귀족 신분을 포기하고 영국으로 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소해 사형 판결을 받아낸다. 혁명단 만세! 


… 라고 할 수 있을까. 알코홀릭 칼튼은 루시를 사랑하지만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인생이 쓸모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과 똑같이 생긴 다네이를 살려줌으로써 스스로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선택을 한다. 칼튼은 감옥을 방문해 자신의 옷과 다네이의 옷을 바꿔입고 자신이 다네이 대신 사형당한 것이다. 다네이를 살리므로써 다네이는 물론, 루시, 둘의 자식들까지 대대손손 자신의 숭고한 죽음을 기억할 것이라고 믿었다. 칼튼은 스스로를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고귀하거나 숭고하기는 커녕 뭐라도 남기고 죽고 싶은 자기 만족을 위해 못난 선택을 한 것같아 공감하지 않았다.


피를 외친 드파르주 부인은 결국 루시를 지키려고 했던 루시의 유모 프로스와 몸싸움을 하다가 결국 총에 사망한다. 왕족과 귀족이 시민의 탄압자였는데, 프랑스 혁명이 성공한 이후 이제 시민이 왕족과 귀족의 탄압자가 되었다. 드파르주 부인은 (프랑스 귀족하기 싫다고 영국으로 망명한) 귀족의 사촌인 다네이를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이고 싶어했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피는 피를 부른다. 사람을 집단으로 보지 않고 개인으로 봐야할 필요가 절절히 보인다. 하지만 어디까지일까? 혁명이든 전쟁이든 구조적으로 일어난 일이라면, 그리고 당 세대가 해결하지 못하면 분명히 후 세대가 갚아야 하지 않을까? 옆에서 남편 드파르주가 아내 드파르주 부인에게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말렸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드파르주도 마네트 박사와의 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혁명 동지들과 함께 역사를 새로 쓰는 일을 배신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집단은 흥분하면 광기를 일으킨다. 이 때 냉정한 소수 의견이 중요하다. 드파르주가 조금만 소수의 소신을 지켰다면 어땠을까. 


자신이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억압받는 시민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다면 혁명이 과연 일어났을까? 자신이 혁명단원임에도 불구하고 도를 넘어 보복당하는 귀족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귀족만이라는 이유로 단두대로 사람을 몰았을까? 내가 속한 세상을 넘어 보는 눈을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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