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에 앉아있으니 이상하게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공항 검색대에서 치약을 뺏겼다. 치약 용기에는 110g 이라고 써져 있었다. 액체 및 반액체 기내 반입 기준은 100g 이었다. 이미 몇 번 쓰던 치약이라 통과될 줄 알았는데 공항 직원은 안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안좋은 일이 일어날꺼란 전조인걸까 좋은 일이 일어날꺼라 액땜한걸까. 배낭 총 무게는 7.2kg였다. 썬크림, 토너, 로션, 비누를 쓰면 7kg 미만이 될 것이다. 배낭을 캐리어처럼 끌고다닐 수도 없고, 숙소(알베르게)로 보내고 싶지도 않아서 최대한 가볍게 준비했다.
곧 여름이 다가오니 30도를 예상하고 얇은 방풍자켓 하나만 챙겼다. 가볍고 세탁 시 빨리 마르는 기능성 긴팔 티셔츠는 3개 챙겼다. 하나는 수면용이다. 피부가 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반팔은 챙기지 않았다. 나는 등산을 거의 하지 않아 등산 의류가 없어 어머니의 등산 셔츠를 빌렸다. 바지도 3개 챙겼다. 하나는 등산용으로 역시 어머니 것이었다. 하나는 수면용, 나머지 하나는 바닷가에 발을 담글 수도 있어 반바지로 했다. 원피스와 수영복은 입을 일이 없어서 포함하지 않았다. 속옷 역시 상의 하의 3개씩 챙겼다. 속옷 상의는 브래지어와 나시를 따로 가져가지 않고 붙어있는 속옷을 가져갔다. 브래지어와 나시를 따로 빨래하는 것보다 편하기 때문이다. 하의 속옷 경우 보통 여행을 가면 빨래가 번거로워 일회용 여성용품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 장기여행은 그것조차 짐이라 넣지 않았다. 하의도 빨리 말려야 해서 레이스로 만든 것만 챙겼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흐린 날씨이더라도 자고 일어나면 바로 말라 있었다.
우비는 선택이 아닌 필수품이다. 방수 배낭 커버가 없어서 배낭까지 덮히는 큰 우비를 준비했다. 내 우비는 8부 소매였는데 비가 많이 오는 경우를 대비하고 싶으면 긴 소매가 유용할 것이다. 양말은 4켤레 넣었다. 의류 중 가장 두꺼워 밤 사이 마른 경우는 한 번도 없었기에 다음 날 걸어다니며 말리기 위해 배낭 고리에 걸고 다녔다.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다. 많은 순례자들이 배낭에 등산양말을 걸고 다녔다. 방수 슬리퍼는 바닷가를 가기 위해 하나 챙겼다. 알베르게에서 돌아다닐 때도 슬리퍼보다 더 튼튼하고 발 보호도 되어 유용했다. 등산화는 좋은 것, 예전에 신었던 것으로 챙겨야 한다. 좋지 않은 등산화를 구매해서 발이 만신창이가 된 경우를 봤다. 한 달 동안 약 1,000km를 걷고 등산화가 심하게 더러워지거나 망가져서 최종 목적지에서 버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버려도 괜찮은 정도의 가격이 적당하다. 또 좋은 등산화이지만 길들여지지 않은 새 것이라 역시 발이 아픈 경우도 봤다. 물론 등산에 익숙하거나 발이 튼튼한 사람이면 등산화가 아닌 운동화를 신어도 된다. 실제 운동화만 신고 하루 30-40 km를 빨리 걷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내 발을 기준으로 보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작열하는 스페인 태양을 예상했다. 그래서 4중 차단을 위해 등산모자, 썬글라스, 얼굴 아랫 부분을 가리기 위해 귀에 거는 셔츠, 썬크림을 준비했다. 다행히 예상보다 서늘한 날씨였지만 그래도 모자는 유용했다. 자외선과 바람을 어느 정도 차단할 수 있었다. 가져간 등산 모자도 어머니 것이었다. 핫핑크색이였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내 모자만 보고 나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밝은 색상이라 사진에도 잘 나왔다. 썬글라스는 너무 비싸지 않은 것이 좋다. 하루종일 걸어다니면서, 사진 찍으면서 또 다른 사람들도 찍어주면서 뺐다 벗었다 반복하는 과정에서 참 많이 떨어트렸다. 내 썬글라스 다리에는 큐빅이 많았는데 여행이 끝나고 보니 거의 다 떨어졌다. 귀에 걸고 얼굴 반을 가려주는 셔츠는 한국에만 있는 것인가보다. 이 셔츠를 외국인이 볼 때마다 신기해했다. 왜 얼굴을 가려? 태양이 그렇게 싫어? 질문했다. 실제 귀국하고 생각보다 얼굴이 거의 타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썬크림은 아무리 듬뿍 발라도 아깝지 않다. 바람이 많아 불어 건조할 때도 바르면 피부 보호가 됐다.
가져가지 않아 가장 아쉬웠던 물건은 근육통 파스나 크림이었다. 얼굴 피부를 위해 시트팩을 가져갔지만 붙일 시간의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얼굴보다 발이 더 소중하다고 느꼈다. 출퇴근하기 위해 지하철 역까지만 걷고 다니다가 하루 평균 약 30km를 걸으니 발이 아팠다. 파스와 크림을 가져왔더라면 더 빨리 전체적으로 근육 피로를 풀 수 있었을 것이다. 난 파스와 크림이 없어서 근육통 완화를 위해 저녁 동안 셀프 마사지를 했다. 저녁이면 온 발고 다리가 퉁퉁 부어있다. 그렇게라도 근육울 풀어주면 통증이 완화됐다.
가장 잘 가져갔던 용품은 등산스틱과 무릎보호대였다. 며 칠 동안 폭우가 쏟아진 적이 있었다. 뜨거운 태양이 있었다면 천국이었을 숲이 우거진 산길이 폭우 때문에 진흙길이 되어버렸다. 진흙 웅덩이 때문에 길 중앙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었다. 길 가장자리를 코끼리가 발레하듯이 등산화를 신고 발 끝으로 디뎌야 했다. 발디딜 틈이 부족했기 때문에 등산 스틱에 온 몸을 의지했다. 스틱을 한 곳에 찍고, 몸을 지탱해 점프하고, 또 스틱으로 진흙이 덜한 저 쪽을 찍고, 다리를 쭉 벌려 점프했다. 스틱 없이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걷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 길을 건넜는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한 명은 등산화를 아예 포기하고 길 중앙으로 진흙탕을 첨벙거리며 갔다고 한다. 다른 한 명은 등산화를 아예 벗어버리고 맨발로 건넜다고 한다. 진흙팩으로 발 피부가 좋아졌는지, 진흙 아래 돌 때문에 발이 만신창이가 됐는지는 궁금해졌다. 북쪽길이 산길이다보니 오를 때나 내릴 때나 무릎에 무리가 갔다. 특히 내려갈 때가 더 심했다. 무릎보호대는 압박붕대처럼 무릎 관절을 보호해줬다. 이번 여행 때 가장 우려했던 게 무릎이었다. 평소에도 무릎이 좋지 않았다. 예전에 한 친구와 차를 타고 이동할 때였다. 날씨가 흐렸다.
- 아 무릎 아파. 비가 오려나...
- 기상청에 따르면 비 온다는 얘기 없었는데.
(후두두두)
- 푸하하하. 뭐야. 진짜 비가 오네. 기상청보다 네 무릎이 더 정확해. 하하하.
친구와 나는 예전에 이런 대화를 하며 폭소한 적이 있다. 당시 예보에도 없는 소나기가 갑자기 내렸다. 이런 무릎으로 1,000km 걷는 게 걱정되어 등산스틱과 무릎보호대를 잘 활용한 덕인지 까미노 도중에도 이후에도 무릎이 괜찮았다. 무릎은 괜찮았다.
조금 더 투자했어야 하는 물건이 있다면 등산배낭이다. 집 구석 어딘가에 있는 큰 등산배낭을 챙겼다. 짐의 무게만 신경 썼을 뿐, 좋은 등산배낭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 알고보니 좋은 등산배낭은 가슴, 허리 부분에 벨트와 끈이 있고 어깨 패딩이 두둑하다. 좋은 배낭은 어깨에 가중되는 부담을 허리로 분산시킨다. 여행 막바지 무렵 좋지 않은 배낭을 사용한 나는 쇄골과 어깨가 무척 아팠다. 게다가 방수 커버조차 없었던 배낭이라 우비로 가린 배낭에서 뭘 꺼낼 때마다 우비까지 함께 벗어야 해서 불편했다.
가져간 것을 후회한 물건이 있다면 책이다. 여유롭게 걷는다면 걷기 일정은 오전 일찍 시작해 점심 때면 끝난다. 부지런한 사람은 새벽 6시에 일어나 간단한 준비를 마친 후 바로 까미노를 시작한다. 그리고 오후 1시쯤 알베르게에 도착한다. 출발하기 전에 한국에서는 약 6시간을 걷고 나머지 오후, 저녁 시간에 뭘 하나 이 일정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렵고 두꺼운 책 한 권을 가져갔다. 많이 후회했다. 두꺼우니까 펴보기가 싫었다. 몸이 매일 피곤하니 어려운 책을 읽기는 더욱 어려웠다. 출발할 때는 가볍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들고 걸으니 무거웠다. 힘들게 걷는 일정을 마치고 오후에 알베르게에 도착해도 시간이 부족하긴 마찬가지였다. 일단 도착하면 씻어야 한다. 계속 걷느라 땀이 났을 뿐더러 뜨거운 샤워를 할 때는 그 샤워 부스가 낙원이었다. 걸을 때 희열을 느껴야 하는데 씻을 때 행복해서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뜨거운 욕조물에 몸을 푹 담그고 싶었지만 샤워 줄기나마 맞을 때는 오늘 하루도 무사히 마쳤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 기도가 절로 나왔다. 샤워실이 기도실이었다. 샤워를 하고 곧이어 빨래를 한다. 빨리 널어야 빨리 마르기 때문이다. 그 후 까미노의 또 다른 즐거움이 시작된다. 알베르게에 도착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까미노의 절반은 자신과 보내는 시간이다. 산, 바다, 도로를 걸으면서 나와 마주하는 시간이 있다. 걸으면서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시간도 물론 있다. 그런데 걸을 때보다 더 본격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바로 걷기가 끝난 이후 시간이다. 다시 말해 책 읽는 것보다 더 귀한 경험을 하기 때문에 책을 펼치지 않게 된다.
챙긴 물건은 간단했지만 마음은 복잡했다. 여행객을 보면 여행을 앞두고 대부분 들떠있다. 내가 탄 비행기 자리 주변에 있는 승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코노미석임에도 불구하고 운이 좋게 다리를 펴고 발을 비행기에 올릴 수 있는 자리를 받았다. 다리를 쭉 뻗고 사진을 찍었다. 별 준비 없이 떠나는 딸을 보며 걱정하시는 부모님께 그 사진을 보냈다. 발을 내리고 자리에 앉아있는데 여러 걱정이 함께 내려앉았다. 산티아고까지 과연 도착할 수 있을까? 묵시아, 피스테라까지 갈 수 있을까? 포르투까지 잘 넘어갈 수 있을까? 마드리드에서 기차는 놓치지 않고 잘 탈 수 있을까? 길은 잃어버리지 않고 잘 찾아갈 수 있을까? 물건은 잃어버리지 않고 잘 챙길까? 공항 버스 안에서만해도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공항에서 치약을 뺏기고 마음이 무거워지더니 비행기 안에서 급기야 눈물이 흘렀다. 부모님께 씩씩한 척은 했지만 이렇게 착잡한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니 혼자 감당이 되지 않았다.
내가 변할 수 있을까? 그게 가장 두려웠다. 순례길이라고 평소에 하지도 않는 단주를 하고 왔다. 그만큼 간절했다. 목적지까지 잘 가게 해주세요. 한국까지 잘 오게 해주세요. 포기하지 않게 해주세요. 그 여정에서 깨닫고 변화하게 해주세요. 의미없는 무모한 도전이 아니게 해주세요.
착잡한 마음을 전했던 한 친구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무엇을 찾으려 하기보다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드는 의미 있고 즐거운 여행으로 생각해. 아무 것도 변하지 않고 아무 것도 찾지 않아도 돼. 너 그대로 충만해” 라고 했다. 또 다른 친구 역시 “많은 걸 기대하지 않고 그냥 즐겁게 지내다 와” 라고 했다. 세 번째 친구도 “깨닫고 싶다는 집착은 괴로움을 낳으니까 안바뀌면 말고, 그렇게 생각해” 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친구는 “너가 간절한 만큼 이번 여행은 너한테 큰 의미가 있을꺼야. 숨을 한 번 쉴 때마다, 발을 한 번 딛을 때마다 즐겁게 보내” 라고 했다. 아버지는 “의미 있고 멋진 추억 만들어 오길” 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건강하고, 착하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길” 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나한테 참 기대하는 게 많다.
10시간 넘게 비행해야 하는데 좌석 화면이 전혀 켜지지 않았다. 영화를 5편쯤 보려고 했는데 한 편도 보지 못하게 됐다. 이 자리는 승무원 도움이 있어야 뒤로 젖혀지고, 불을 켤 수 있다.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이 항공사는 약속한 편의를 제공하지 못했다며 50유로 바우처와 함께 비즈니스 퍼스트 클래스에 제공되는 화장품 키트를 제공했다.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마드리드 공항에 자정쯤 도착했다. 첫 지하철을 타고 오전 기차를 타기 위해 공항에서 밤을 새야 했다.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공항 시설은 비교적 깨끗하고 안전해보였다. 콘센트가 있는 자리를 찾았다. 읽고 싶었던 책의 오디오북을 들었다. 이 책의 결론은 “과거에 대한 후회든 미래에 대한 걱정이든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내가 원하는 것에 집중”하라고 했다.
35일 동안 무슨 경험을 하게 될까? 무슨 일이 생길까? 누구를 만날까? 무지는 두려움을 자아낸다. 동시에 설레임도 있다. 나 없는 동안 친구들이 함께 한강으로 소풍을 간다고 한다. 나도 함께하고 싶은데. 아니지 나도 곧 새로 만날 친구들과 함께 멋진 곳을 걸을거잖아. 지금 있는 곳에 집중하자. 많은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투자하는건데 스페인까지 가서 한국 생각하지 말자. 한강이 가고 싶다기보다 친구들과 함께 하고 싶은거잖아. 나도 좋은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좋은 경험을 하고 좋은 추억을 만들 것이다. 좋은 여행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