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첫날부터 조각 같은 이탈리아 청년과 작품 같은 바다를 보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혼자 고난의 행군을 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영화배우를 해도 될만한 남자와 절경을 보며 데이트를 하고 있어서 이거 순례길에게 실례를 하는 게 아닌가 걱정된다.
오전 6시부터 사람들이 바스락거린다. 대낮에 태양이 내리쬐기 전에 부지런히 걸어두려는 순례자들이 일어나는 소리다. 나 또한 부스럭거리며 침대를 싼 식탁보를 정리했다. 간단히 씻고 배낭을 챙겨 1층 식당으로 내려왔다. 에너지를 위해 어제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둔 샌드위치를 꺼냈다. 근데 역시나 프랑스 여자를 따라 만든 음식양은 내 배에 차지 않았다. 이 만큼 먹어서는 얼마 못가 두 번째 아침을 먹어야 한다. 다행히 알베르게에서 또 과일과 빵을 제공했다. 스페인이라고 해서, 순례길이라고 해서 별다른 식사는 아니었다. 한국에서와 비슷하게 바나나, 사과가 있었고, 빵에 딸기잼과 누뗄라를 발라 먹었다. 다른 알베르게와 비슷하게 여기도 아프지 않은 한 오전 9시 전에 모든 순례자가 출발해야 한다. 북쪽길을 시작하는 출발지여서 그런지 오전 7시쯤 되니 순례자가 하나둘씩 등산화를 단단히 묶고 문을 나섰다.
많이 먹어둔 덕인지 실비아보다 내 걸음이 더 빨랐다. 실비아는 좀 쉬어 가겠다고 했다. 옷을 여러 개 챙겨 오르막길을 빨리 가기에 배낭이 너무 무겁다고 했다. 옷을 적게 챙기길 잘했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노란색 화살표를 나 혼자 따라가기 시작했다. 까미노를 시작하며 처음 함께 걸은 까미노 아미고(친구) 인데 너무 일찍 헤어지는 듯했지만 각자 속도를 존중해야 한다. 큰 그림에서 이룬에서 산티아고로 가는 북쪽길은 하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은 모두 다르다. 까미노를 걷는 이유, 걷는 속도, 걸으면서 하는 생각 모두 다르다. 실비아의 북쪽길과 내 북쪽길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주된 이유는 만나는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다.
- 안녕. 너는 어디에서 왔니?
- 난 한국에서 왔어
- 나는 피에르야. 밀라노에서 왔어.
산티아고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어디에서 왔니? 이다. 이름을 묻기 전에 출신지를 묻는데 흥미로운 점은 유럽인은 답할 때 국가명을 말하지 않고 도시명을 말한다. 처음엔 도시에 대한 자부심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부심과는 별개로 유럽 사람들은 국가보다 도시에 대한 정체성이 강하다는 걸 알게 됐다. 유럽이라는 하나의 공동체가 있고 자신의 특성은 국가나 민족이 아닌 도시에서 오는 듯했다. 몇 번 이렇게 출신지를 도시로 답하는 것을 듣고 나서 나도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 한국 아닌 서울이라고 답하기 시작했다. 서울이라고 말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이라고 답하면 북쪽이니 남쪽이니? 라는 지겨운 질문을 이제 듣지 않아도 됐다. 대신 가끔 서울이 어딘지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 한국이나 서울은 몰라도 유명한 아이돌 그룹 이름이나 대기업 이름은 다 알았다.
피에르와 대화를 하며 환상적인 바다 풍경을 보았다. 산을 올라 코스를 따라 방향을 틀고 또 틀 때마다 다른 각도에서 바다를 볼 수 있는 위치에 서는데 탄성이 절로 나왔다. 조금 걸으면 바다가 나오고 산 속에 걸어갔다가 더 걸으면 또 다른 각도에서 바다가 나온다. 하늘도 파랗고 바다도 파랗고 피에르의 눈도 파랗다. 난 사방의 푸르름을 만끽했다. 코너를 돌 때마다 가슴이 탁 트였다. 산을 오르는데 힘든 것도 모르겠다. 피에르는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를 할 줄 안다. 만나는 까미노 아미고마다 3개 언어가 기본 같았다
피에르는 다음 직업을 결정하기 위해 까미노를 시작했다. 실비아도 피에르도 나도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까미노를 선택한 게 우연은 아닌 듯했다. 피에르는 한 이탈리아 NGO 소속으로 거의 2년씩 오스트리아 비엔나, 스위스 제네바, 모로코 라바트에서 미션을 위해 파견됐었다. 인권학 석사를 받았는데 양성평등, 극단주의, 이슬람 등 세부 분야가 너무 다양해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이라 이룬행 편도 비행기표를 구했다고 했다. 출신은 밀라노이지만 해외에서 근무하고 일 년에 두 번 집으로 여행하는 삶이다. 일반인 기준에서 여행이 일상이고 일상이 여행인 삶이다. 밀라노 사람은 모두 패션에 관심 있을 줄 알았는데 피에르는 패션에 전혀 관심이 없고 이슬람 세계와 인권 증진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데이트를 한 건지 순례를 한 건지 처음에는 높은 절벽이 있는 산 속을 걸으며 바다를 보다가 모래알이 있는 해안가를 코 앞에 둔 알베르게까지 도착했다. 혼자 걸을 때는 한 시간에 한 번씩 쉬었는데 둘이 같이 걸은 시간을 계산해보니 다섯 시간 연속이었다.
오늘 머물 알베르게 문을 열었다. 여성 전용 12인실이다. 한 명이 있었다.
- 안녕. 나는 미국에서 온 소피야.
- 안녕. 나는 한국에서 온 니키야.
- 한국에서 왔구나. 우리 할머니도 한국에서 왔는데.
소피의 할머니는 한국 전쟁 당시 미국인 남편과 함께 미국 인디애나로 왔다고 한다.
- 소피, 혹시 너도 북쪽길 순례자니?
- 아니 나는 방학 동안 스페인어 공부하려고 스페인 여행 왔어. 나 해변에 나가려 했는데 같이 나갈래?
- 그래!
알베르게 앞에 해변이 있었고 사람들은 썬탠을 하며 휴식하고 있었다. 모래 해변 한쪽에 BTS라고 써져 있었다. BTS가 스페인에서도 유명할 줄이야. 소피도 BTS를 안다고 했다. 방학 3개월 동안 스페인에서 스페인어 공부를 하고 틈틈이 여행도 한다고 했다.
- 멋지다! 미국에서도 스페인어 쉽게 배울 수 있을 텐데.
- 방학 때 놀 수도 있고 공부할 수도 있고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아서. 정해진 목적지는 없고 주요 도시는 방문해보려고. 모르는 스페인 사람한테 길 가다가 말 걸고, 광장에서 말 걸고, 그렇게 스페인어 공부해. 하하.
- 용감하다!
나도 스페인어를 잠시 배웠다. 학원을 다녔는데 스페인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아예 들지도 않았다. 스페인에 왔더라도 학교나 학원을 찾았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한테 말을 걸면서 스페인어를 배우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다. 소피의 나이는 20살. 자기 사업도 있다. 머핀 만드는 것을 좋아해 주문 제작하고 있다. 지금은 파티나 선물용으로 주문받아 팔지만 언젠가는 자기 머핀 가게를 내고 싶다고 했다.
- 미국에서는 20살인데 자기 사업하는 게 흔하니?
- 미국에서는 대학생도 재미 삼아 뭘 만들어 팔기 시작해. 그러다가 수입이 생기면서 더 크게 벌이는 거지. 대학생 정도면 자립하는 편이야.
집안이 진보적이거나 진취적이라서 딸이 사업하려는 것을 허락하는 게 아니다. 사실 허락이라는 단어도 어울리지 않는다. 소피의 부모님은 공화당이고, 기독교고, 매우 보수적인 편에 속한다. 학교가 집에서 가까워 부모님과 함께 살긴 하지만 소피가 머핀을 만들어 파는 걸 부모가 내버려 둔다. 페이스북을 통해서 머핀 광고를 하는데 소피는 머핀 사업을 하면서 경영학 전공에 더 재미를 붙였다고 했다. 이론을 실전에 바로 적용하고, 실전을 이론에 바로 적용할 수 있으니까. 가족, 친구, 음악, 영화, 책, 별별 얘기를 소피랑 해변에서 석양을 볼 때까지 대화했다. 소피는 스페인에 3개월 있으면서 스페인 남자와 연애해보고 싶다고 한다. 아마 할 것 같다.
알베르게 공용 주방에 왔다. 이미 몇 명이 있었다. 미국 남자, 캐나다 남자, 이탈리아 여자가 있었다. 미국 남자와 캐나다 남자는 영어를 가르치는 비자를 받아가며 세계 여행을 하고 있었다. 예전엔 한국, 지금은 스페인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이들도 여행이 일상인 삶을 살고 있다. 미국 남자 타일러는 한국 구석구석을 보고 싶어 서울에 살지 않고 대구에서 영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국 구석구석을 여행했는데 내가 모르는 도시 이름도 있었다.
- 한국이랑 스페인에서 영어 가르쳐보니까 어때요?
- 한국 애들은 진짜 영어 공부 열심히 해요. 말도 잘 들으니 가르치는 보람도 있어요. 외국인이 흔치 않아서 그런지 너무 잘해주셔서 마치 제가 연예인이 된 느낌이었어요. 스페인에서 하는 영어 수업은 난장판이에요. 자기들끼리 떠드느라 제가 교실에 들어온 줄도 몰라요. 스페인 애들은 말은 듣지 않는데 인생은 즐겁게 살아요. 한국 학생들은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았어요. 뭐가 좋고 나쁜 건 없는 것 같고 한국 애들이랑 스페인 애들이랑 인생 사는 방식이 다른 것 같아요.
여행 첫날이라 만난 사람은 많지는 않지만 삶의 방식이 정말 다양했다.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더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북쪽길은 프랑스길보다 사람이 없다고 들어서 혼자 외롭게 걷는 여행이 될 줄 알았는데 하루 종일 혼자였던 시간은 거의 없었다. 실비아, 피에르, 소피, 타일러 모두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나보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생각의 폭이 넓다.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확신이 있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