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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Jun 15. 2022

[산티아고 순례길] 무니티바르 3


다음 날 아침, 다행히 깨어났다. 고갈된 체력을 수면으로 채웠나보다. 각자 일어나는 시간이 달라 따로 약속하지 않는 이상 출발하는 시간도 다르다. 나는 우연히 피에르와 출발했다.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어느 순간에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당시에는 즐거웠다. 

어디에서 왔냐는 출신지에 대한 질문 다음으로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은 까미노를 하게 된 계기다. 이 두 질문은 하루에도 몇 번씩 듣기 때문에 나중에는 녹음기로 틀어주고 싶은 심정이 든다.

- 너는 왜 까미노를 선택했니?

- 인생을 바꾸고 싶어서.

- 네 지금 인생이 마음에 들지 않아?

- 음… 인생 전반적으로 지금보다 나야져야 하니까. 너는 왜 왔어?

- 나는 인권을 공부했어. 파견 근무하면서 몇 군데 나가 일해보니 인권도 세부 분야가 정말 다양하더라고. 파견 근무도 마쳤고, 구체적으로 어느 분야를 선택할지 생각해보려고 지난 주에 편도행 티켓을 샀어. 

- 파견 근무 어디?

- 오스트리아 비엔나, 스위스 제네바, 모로코 라바트에 2년씩 정도.

- 멋지다. 나는 해외에서 일한다는 건 상상도 못해봤어.

- 해봐. 많이 배워.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 해외 취업이 두렵지는 않아? 집이 그립지는 않아?

- 유럽에 살면 몇 km 떨어져 있구나, 비행기나 기차타고 몇 시간 걸리는구나, 하고 거리의 개념이 있긴 하지만 국가의 개념이 별로 들지 않아.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가서 일을 한다는 다른 국가에서 일한다기보다 다른 도시에서 일한다는 생각이 들어. 유럽은 EU가 있고, 이동의 자유가 있어서 그런 것같아. 그러고보니 일하면서 동양인은 유럽인 비해 많이 보지 못한 것같네.

- 내가 만난 유럽인들도 정말 쉽게 출신지와 다른 국가에 있는 도시에서 일하는 것같애. 여행도 정말 많이 하고.

- 특히 독일인이 여행을 정말 많이 해. 까미노 안내 책자 보면 독일인이 작가인 경우가 정말 많아.

- 왜 그럴까?

- 글쎄. 독일인이 다른 민족에 비해 개척정신이 강한가. 하하하.

왜 해외 취업을 생각한 적이 없을까. 서울에서 일을 구할 수 있고 내 가족과 친구들이 다 서울에 있으니까. 해외는 커녕 한국에 있는 다른 도시에서 일하는 것조차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 가족이나 친구는 밀라노에 있을텐데 보고싶지는 않아?

- 친구들도 대학교부터는 밀라노 밖으로 가. 학교든 일이든 유럽 구석구석에 퍼져 있어서 오히려 밀라노에 남아 있는 친구들이 거의 없어. 친구들 만나려면 다른 도시를 가야 해. 부모님은 밀라노에 계시지. 파스타 레스토랑을 운영하셔. 언제 밀라노에 오면 놀러와!

이탈리아 몇 도시를 여행다니면서 피자, 파스타는 어느 집을 가도 맛있다는 것을 알았다. 초대는 고마웠지만 과연 내가 밀라노를 갈까? 그 레스토랑을 갈까? 까미노에서 만난 사람과 여행이 끝난 후에도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 초대 고마워. 그렇게 파견 근무 나가면서 친구들을 만나고 헤어지는 게 불편하지 않아?

- 글쎄. 너무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져봐서 이제 별로 신경쓰이지 않아.

- 나는 여기 오면서 그게 두렵던데. 한 달 내가 없는 동안 내가 잊혀지면 어쩌나. 다른 친구로 대체되면 어쩌나.

- 고작 한 달인데? 그럼 여기 있는 동안 연락하고 있어?

- 연락을 하고 싶긴 한데 그래도 여기에 온전히 충실하고 싶어서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해.

- 나도 그렇긴 해. 그래서 몇 일에 한 번만 가족에게 안부 전하는 정도야. 근데 한 달 없다고 잊혀지거나 대체되면 언젠가는 멀어질 사람이고 친구는 아닌 것같아.

- 그게 속상하지 않아?

- 나도 친구들 좋아해.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친구가 있어. 내가 변하든 걔가 변하든 둘 다 변하든 어쨌든 관계는 변하더라. 근데 한 친구와 멀어지면 새 친구를 사귀더라. 그래서 친구랑 멀어지는 건 속상할 일이 아니라 신날 일이야. 하하하.

- 와! 앞으로 친구랑 멀어지면 신나해야겠다!

- 그렇지! 만난다는 건 그 때 그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인 것같아. 헤어진다는 건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인 것같아. 

나보다 한참 어린 친구가 불교의 인연에 대해, 시절인연에 대해 이미 깨닫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비록 같은 종교가 아니고 같은 언어를 쓰지 않더라도 그런 비슷한 생각을 한다는 건 더 놀라웠다. 생각은 하지만 실천하는 건 더 어려운데 그걸 실천하고 있다는 게 제일 놀라웠다. 정해진 관계도, 영원한 관계도 없다. 인연이 닿아 만나고 그 인연이 다해 헤어진다. 그런 우연 또는 필연이 서로 교차하고 멀어짐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싶지만 나는 지나치게 설레고, 지나치게 슬퍼한다. 그러고 싶지 않지만 집착하게 된다. 

“어딘가에 나에게 정해진 섭리나 계획이 있고, 그것을 일깨우기 위해 적절한 시기에 사람들이 내 앞에 나타난다고 나는 믿는다. 지금의 내 삶에 그 관계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들은 온다. 사람들은 이유가 있어서 우리 삶에 나타나고, 때가 되면 우리는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이것이 진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나는 내게 길을 가르쳐 준 모든 만남과 부딪힘의 결과물이다. 누구도 내가 걷는 길을 무작위로 교차하지 않는다.”

사람과의 만남은 필연이 아닌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류시화님 외 많은 사람이 인연은 필연이라고 본다. 

“어떤 이유로 누가 당신의 삶에 온 경우, 그들은 대게 당신이 드러내 보인 필요를 충족해 주기 위해 온다. 당신이 고난을 통과하도록 돕고, 길을 안내하고, 지지해 주려고 온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당신을 도우려고 온다. 그들은 신이 보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며, 실제로도 그렇다. 그들은 당신이 그들을 필요로 하는 그 이유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내가 필요해서 사람을 만나다니 참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왜 사람들은 떠날까. 헤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계절 동안만 당신 삶에 들어오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당신이 나누고, 성장하고, 배우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신에게 평화로운 시간을 가져다주고 당신을 웃게 할 것이다. 당신이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일을 가르쳐 줄지도 모른다. 그들은 대개 믿을 수 없을 만큼의 기쁨을 당신에게 준다. 이것을 믿으라. 이것은 사실이다. 다만 한 계절 동안만.”

내가 그 만큼 성장했기 때문이구나. 하지만 너무 짧다. 평화와 기쁨을 주고 하루, 한 주, 한 계절만에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당신 잘못이 전혀 없는데도, 혹은 좋지 않은 시기에, 관계를 끝낼 것같은 말이나 행동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죽거나 어디론가 떠나 버리기도 한다. 때로는 과격한 행동을 해서 당신이 분명한 결단을 내리게 만든다. 이 때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의 필요가 충족되었다는 것. 우리가 바라던 것이 채워졌다는 것. 그래서 그들의 역할이 끝났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올려 보낸 기도는 응답받았으며 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때가 온 것이다.”

서로 필요해서 만나고 서로 필요가 충족돼서 떠난다. 내가 마음이 멀어지더라도 내 필요가 충족됐으니 나는 다음 사람을 만나 다음 필요를 충족하면 된다. 상대가 마음이 멀어지더라도 나와의 관계에서 상대의 필요가 충족됐으니, 이제 다음 사람을 만나 다음 필요를 충족할 수 있게 되었으니, 기쁜 마음으로 보내주자.

늦은 점심을 먹었다. 채식주의자인 피에르는 에스프레소와 샐러드만 먹었다. 나도 한 때 채식주의자였기에 피에르를 따라 에스프레소와 샐러드만 먹었다. 어제 40km를 걸은게 자신에게도 무리였다고 피에르가 말했다. 가까운 알베르게를 찾아 오늘 일정은 빨리 마치자고 했다. 나는 대환영이다. 그 때 루이라는 중국계 스페인 사람을 다시 만났다. 루이는 피에르보다 키는 작고 덩치는 크다.

- 루이, 우리 둘은 여기서 쉴거야.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 글쎄…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남녀 혼용 8인실이었고 아무도 없었다. 어제 무리하게 걸어 순례자들이 흔히 쉬지 않는 무니티바르라는 곳에 왔고 더 이상 아무도 올 것같지 않았다. 루이가 여기서 묵지 않으면 피에르와 나만 남게 된다. 아 이거 좋아할 일인가 긴장해야 할 일인가. 순간 긴장해서 나도 모르게 루이에게 제안했다.

- 루이, 너도 여기서 묵자. 어제 많이 걸었잖아.

- 그래!

순간 실망했다. 야. 너는 눈치도 없이. 너가 갔으면 피에르와 나랑 둘만 있게 되는거고. 그러면…

어제 피에르와 40km를 함께 걸은 루이도 몸이 피곤했나보다. 알베르게는 작았지만 옆에 식당도 있고 마트도 있었다. 셋이 감자와 계란으로 만든 스페인 요리 또띠야를 먹고 마트에서 간식거리를 샀다. 비슷한 또래 셋이 다니니까 마치 삼총사같았다. 마트 옆에 작은 놀이터가 있었다. 피에르는 피로를 푸는 요가 동작을 안다며 루이에게 알려줬다. 나는 남자 둘이 요가 동작하는 게 웃겨서 옆에서 구경했다. 이탈리아 사람이 동양 철학을 알고 채식을 하고 동양 사람에게 요가를 알려준다. 나는 얼마나 서양 철학을 알고 음식과 여가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졌었던가. 피에르와는 영어로 대화를 했지만 루이는 영어를 못하고, 나는 중국어도 스페인어도 못하기 때문에 루이와는 거의 대화하지 못했다. 그러다 잠들었다. 너무 아무 일도 없이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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