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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Jun 29. 2022

[산티아고 순례길] 게메스8

어제 저녁에 이어 오늘 아침도 공동 식사다. 함께 식사하면 에너지를 받는 느낌이다. 치즈와 샐러드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출발했다. 대화하며 식사하느라 따스한 햇빛을 받으며 약간 늦게 출발했다. 

마크 아저씨 옆에 가서 말을 걸었다.

- 안녕하세요. 어제 자기 소개 인상적이었어요.

- 하하하. 그랬니? 

- 어제 말씀대로 정말 지금 그대로 만족하세요?

- 나처럼 극적인 경험을 하면 정말 그저 살아있음에 감사할 뿐이야. 나도 그 전에는 그렇지 않았어. 하하하.

- 진짜 더 이상 하고 싶거나 갖고 싶은 게 없으세요?

- 이번 까미노가 두 번째야. 첫 번째는 일부 구간만 걸었고 이번에는 이어서 또 일부 구간만 걸어. 짧은 시간이지만 사람들과 이렇게 걷고 얘기하는 게 즐거워. 까미노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고 나는 그냥 즐기면서 살아.

- 저도 즐기면서 살고 싶은데 너무 늦어서 즐길 여유가 없어요.

- 뭐가 늦었는데?

- 친구들에 비해 다 늦었어요. 친구들은 이 것도 했고, 저 것도 했고. 저는 어쩌다보니 많이 늦었어요.

- 까미노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고 각자의 길이 있어. 그걸 비교할 수 있을까? 너만의 길을  너만의 속도로 가는데 늦는다는 게 있을까?

좋은 말씀인데 와닿지가 않았다. 친구들이 하는 것을 보나 내가 원하는 것을 보나 나는 늦었다. 입학도 늦고, 졸업도 늦고, 취직도 늦었다. 독립도 늦고, 결혼도 늦고, 출산도 늦었다. 항상 조바심이 든다.

- 너는 무엇을 하고 싶니?

- 저는 하고 싶은 거 정말 많아요. 

-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원해서 너도 따라하고 싶은 거 말고, 너가 진짜 원하는게 뭐야?

- 음… 

- 남한테 인정 받고 칭찬 받고 싶어서 하고 싶은 거 말고, 너가 진짜 원하는 게 뭐야? 

- 음…

- 무엇이 널 웃게 만드니?

- 성공이요. 전 뭔가 성취하면 기뻐요.

- 성공도 좋지. 그런데 남의 시선에 상관 없이 너가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게 있을거야. 네 버킷리스트에 뭐가 있니?

- 아나운서 되기, 기자 되기, MC 되기, 모델 되기, 요가 강사 되기, 스페인어하기, 발레하기, 라틴 댄스하기, 피아노 치기, 플룻 불기, 바이올린 켜기, 노래 잘하기, 마약도 하고 싶어요, 합법적으로. 세계 여행도 많이 하고 싶어요. 이제 아저씨가 사는 몰타도 가보고 싶고, 아저씨가 여행한 요르단, 케냐도 추가됐어요. 하하하.

- 하하하. 그래 몰타 올 때 연락 주렴. 어쨌든 너는 남의 방향이나 속도는 신경쓰지 말고, 네 버킷리스트에 있는 그 것에만 집중하면 돼.  

- 네!

- 이번 까미노도 너만의 방향으로 너만의 속도로 가는거야, 알았지!

- 네!

삶의 길에 대해 마크 아저씨와 대화를 하는 동안 걷는 길을 잃은 것같다. 뒤따라오던 폴란드인 마르타도 함께 길을 잃었다. 

- 여기는 얕은 바다로 막혔네요. 다시 빙 둘러 가야겠는데요?

- 그러지말고 얕은 바다를 건너자!

- 어떻게 건너요?

- 맨발로 건너야지! 

- 그러면 등산화와 양말을 벗어야 하잖아요.

- 벗으면 되지!

- 그러면 다시 신을 때 말려야 하잖아요.

- 말리면 되지! 재밌을꺼다!

마크 아저씨, 마르타, 그리고 나는 등산화와 양말을 벗어 등산스틱과 함께 양 손에 쥐고 얕은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다. 얕은 바다는 종아리 정도 높이였는데 시원했다. 보드라운 모래를 걸으니 폭신하고 지압도 되었다.

바다를 다 건너고 발을 잘 말리고 바에 들어가 맥주와 와인을 마셨다. 사소한 일이었는데 재밌었다.

마크 아저씨의 걸음은 빨랐다. 나보다 더 건강하신 것같다. 나는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 발바닥에 물집이 9개나 생겨 천천히 걸어야 했다.

- 거기 아니에요!

노란색 화살표를 찾을 때 바네사 아주머니에게 받은 은혜를 세르지오 아저씨를 다시 만나 갚았다. 세르지오 아저씨는 브라질에서 왔고 4개 언어를 할 줄 아신다. 독일 집시 아저씨를 만난 후 처음으로 만찬을 함께 한 분이다. 마크 아저씨를 보내고 혼자 걸으면서 내가 순수하게 하고 싶은 일,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생각했다.

- 세르지오 아저씨는 가장 후회되는 게 있나요?

- 음… 나는 여행도 많이 해봤고, 언어도 몇 개 배웠고, 하고 싶은 거 거의 해본 듯한데… 음… 사랑에 빠지지 않은 것. 사랑은 못해본 것같네.

예상치 못한 답이다. 

- 아저씨는 사랑이 뭐인 것같아요?

- 하하하. 넌 왜 이렇게 어려운 질문만 하니. 사랑은 계속 생각나는 것, 계속 함께 있고 싶은 것인 것같다.

스페인에 있는 내내 네 명 친구 모임이 생각났지만 남자친구는 거의 생각나지 않았고 메세지도 한 번도 보내지 않았다. 여기 온다고 말했을 때도 남자친구는 “너무 기간이 긴 거 아니야?“ 했는데 나는 “긴 건가?” 했다. 계속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나보다.

- 생각도 나지 않고 만나고 싶지도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거지. 사랑하면 이유 없이 생각나고 함께 하고 싶어. 예컨데 까미노에서 누구를 만났다고 하자. 그런데 그 사람에게 빠지면 애초에 세웠던 계획과 달리 그 사람을 따라 함께 가는거야.

- 하하하. 저는 상상이 안되네요!

- 실제 일어나는 일이야. 까미노에서 우연히 만났다가 사랑에 빠져서 결혼한 사람도 있다고 하더라.

- 하하하. 저도 여행지에서 로맨스를 꿈꾸긴 하는 데 한 번도 일어나지 않더라구요.

- 까미노가 아직 3주 이상 남았으니 지켜보자. 어쨌든 네 남자친구가 결혼하자고 해도 너가 사랑하지 않으면 지금 당장은 결혼하지 않는 게 좋은 것같다.

까미노를 하면서 생각하는 여러 주제 중 하나는 남자친구가 제안한 결혼이었다.

게메스에서 로맨스는 없었지만 에로스 비슷한 것은 있었다. 세르지오 아저씨와 알베르게에 도착하자 한 방 문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문 앞을 지나가는데 여자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 이거 무슨 소리예요?

- 여기 마사지실이예요.

줄 서 있는 순례자가 말했다. 마사지? 나도! 빨리 샤워를 마치고 마사지실 앞에 줄을 섰다. 마감이 저녁 식사 전까지인데 나까지 받을 수 있을지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시간 상 마지막 손님으로 들어갔다.

- 안녕하세요.

- 안녕. 넌 어디가 아프니?

- 발바닥이요.

- 어디 보자. 아니 이렇게 물집이 많이 났는데 어떻게 걸어다니니?

미겔은 알베르게에서 일하는 마사지사 및 치료사다. 발과 다리 마사지가 시작됐다.

- 네 인생이 바뀌고 있구나.

- 하하하. 바꾸고 싶죠.

- 아니, 이미 바뀌는 중이라고.

- 그걸 어떻게 알아요?

- 마사지를 하면 사람 기운이 느껴져. 발과 다리에 에너지가 바뀌고 있는 게 느껴진다니까. 너는 지금 인생이 바뀌는 중이야. 그리고 지금 부어서 그렇지 좋은 발과 다리다.

마크 아저씨 말을 듣고 칭찬에 마음이 흔들리지 말아야겠다 생각했지만 이 정도는 괜찮을 듯했다. 이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내 삶이 바뀌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돼서 눈물이 났는데 이번에는 이미 바뀌는 중이라는 말에 감동해서 눈물이 났다. 몸은 아프지만 세르지오 아저씨와 대화하는 재미로 겨우 알베르게에 도착했기 때문에 치료와 마사지가 절실했다.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았는지 미겔은 전신 마사지를 해줬다. 뒤돌아 엎드렸다. 라벤더 오일이 묻은 미겔의 손이 견갑골을 눌러 지나갈 때 나는 녹아내리는 줄 알았다. 동남아 마사지보다는 시원하지는 않았지만 따뜻한 사람 손길이 그리웠나보다. 손이 다른 곳으로까지 가길 바랄 정도였다. 미겔은 엎드린 내 머리 앞에 서서 손을 내 척추를 따라 골반까지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척추 마디마디가 짜릿했다. 더 세게 해주길 바랬다. 아프지 않냐고 내 귀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으며 속삭이는데 그제서야 풀린 긴장을 다시 잡았다.

- 어머 벌써 저녁 식사 시간이네요! 이제 가야 해요!

- 산티아고는 도착지일 뿐이야. 중요한 건 지금 걷는 이 길, 변화하는 이 과정이야. 물집 또 생기지 않게 몸 잘 챙겨야 해, 알았지?

미겔은 물집난 발에 치료제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줬다. 근육질 몸매인데 천사같았다.

이 알베르게의 특징은 주인의 자긍심이 굉장하다는 것이다. 저녁 식사 전에 이 알베르게 역사를 50여명의 순례자들 앞에서 설명해줬다. 그 후에서야 식사가 제공됐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니 축제같았다. 따뜻한 수프가 나오고, 푸짐한 메인 요리가 나오고, 달콤쌉쌀한 와인이 계속 나왔다. 와인 덕분인지 웃음소리로 분위기가 시끌벅적했다. 내 앞에는 이탈리아 사람 두 명, 스페인 사람 두 명이 있었다. 

- 네 분은 일행이세요?

- 까미노 하다가 만났어요. 웃긴 건 저는 스페인 사람이라 이탈리어를 못하고 이 분은 이탈리아 사람이라 스페인어를 못하는데 서로 말이 통한다는 거예요. 하하하.

알베르게 직원 설명을 들어보니 50여명의 사람들이 20개의 국가에서 왔다고 한다. 독일 사람이 제일 많고,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사람이 다음으로 많았다. 아시아 사람은 나 외에 1명밖에 없었다. 한국 사람을 포함해 최대한 사람이 적은 길을 가고 싶었기 때문에 북쪽길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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