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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Jul 07. 2022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나 델 마르 10

오후 1시.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매일 저녁이 되서야 도착하다가 기록적으로 일찍 도착했다. 산타크루즈 베자나 알베르게 주인 아주머니가 지름길을 알려주신 덕분이다. 지도와 그림까지 미리 준비해서 20명에게 설명해주셨다. 기차길 옆을 걷다가, 한 정거장 기차를 탔다가, 계속 마을 아스팔트길을 걷는 여정이었다. 전체 걷는 거리는 다른 날들보다 짧았지만 아스팔트길이라 발바닥이 더 얼얼했다. 하지만 이 얼얼함을 잊게 해준 모이짜 아주머니가 옆에 있었다. 

- 무슨 생각 하니?

- 제가 아직도 생각나는 상처가 있어요. 대학교 신입생 때 친한 여자인 친구랑 호텔에서 논 적이 있어요. 철이 없을 때라 아마 제가 먼저 누구 부를까 친구에게 제안했던 것같아요. 친구도 좋다고 해서 제가 관심 있는 남자 애를 불렀어요. 남자 애가 친구 한 명을 더 데려왔어요. 둘보다는 넷이 대화하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았는데 그 후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생각하지 못했어요. 객실에 침대가 두 개 있었는데 남자 애가 데려온 다른 남자 애가 술이 약했는지 먼저 한 침대에 골아떨어졌어요. 저도 졸리다고 하니까 남자 애가 친절하게 자기 친구가 누운 침대로 안내해줘요. 저는 그대로 기절해 잤어요. 아침에 무슨 소리에 깼어요. 뭐지 하고 정신을 차리니까 그 소리가 교성이었어요. 제 친구랑 제가 관심 있어하는 남자 애가 바로 옆 침대에서 한창 섹스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벌떡 일어나서 소리를 질러야 하나 아니면 끝날 때까지 기다려줘야 하나 갈등했어요. 너무 놀라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승용차 헤드라이트를 본 사슴처럼 얼어 있었어요. 둘은 일을 끝내고 화장실로 가서 목욕을 하기 시작했어요. 대화를 들어보니 여자 애도 남자 애도 첫 경험이 아니었어요. 저는 당시 경험이 없던 때라 그런 사실이 충격적이였어요. 내가 여자 애를 정말 몰랐구나. 남자 애는 더욱 몰랐구나. 내가 남자 애한테 관심 있는 티를 냈던 것같은데 그걸 알면서도 어떻게 내 친구와 만난지 몇 시간만에 잘 수 있지 화가 났어요. 근데 더 오래 알았던 여자 애한테 더 화가 났어요. 내가 남자 얘한테 관심있다고 걔한테 말했던 것같은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나 배신감이 들었어요. 온 몸이 마비가 되서 그냥 호텔 객실에 서있었는데 남자 애가 화장실에서 나왔어요. 걔가 저한테, 일어났어? 화장실이 급해서 잠깐 쓰고 나왔어, 하고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어이가 없어서 확 나갈까 하다가 너무 답답해서 말했어요. 내가 너네 섹스 소리에 깼어. 내가 너한테 관심 있는 거 몰랐니? 왜 내 친구랑 잤어? 물었어요. 미안해. 우리 아빠가 바람펴서 나도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도 똑같은 사람이 됐네. 나도 너한테 관심 있었어. 그런데 내가 그런 신호를 보낼 때마다 네가 반응이 없길래 나한테 관심 없는 줄 알았어. 근데 너 친구는 반응이 있더라고, 이러는 거예요.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 오히려 다행 아니니? 그런 남자 애랑 엮이지 않아서. 

- 근데 가장 화가 난 대상은 남자 애도 아니고, 여자 애도 아니고 제 자신이었어요. 남자 애가 나 대신 내 친구를 선택했다는 게 너무 화가 났어요. 걔가 나보다 예쁜가? 나는 안예쁜가? 이런 자괴감이 들었어요. 남자 애가 신호를 보냈다고 했는데 저는 일단 모든 여자애들한테 그러는 친절함이라 생각했고, 그걸 신호로 알았다고 했더라도 쉬운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생각은 해도 티내지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저한테 정말 관심이 있다면 여자 애가 반응이 있다고 하더라도 걔랑 잤을까요? 둘은 원나잇 스탠드만 하고 다시 본 적이 없다고 나중에 저한테 말하던데 그 후로 계속 만났을지는 그 둘만 알겠죠.

-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건 인연 따라 가는거지 예쁜 거랑은 별로 관계가 없어. 그 둘은 애초부터 서로 만날 인연이었던 거야. 너도 봐봐. 너가 만났던 남자 애들이 다 잘생겼었어? 그 시간과 장소에서 인연이 닿으면 만나는 거지. 여길 봐봐. 지금 같이 걷고 있는 이 까미노 아미고는 20명이 있는데 각자 친한 사람이 달라. 나는 까미노 시작하고 계속 혼자 걸었어. 그러다가 오늘 처음으로 다른 사람이랑 대화하면서 걷고 있는데 그게 너야.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혼자 생각하고 글 쓰다가 자. 그러다가 어제 처음으로 다른 사람이랑 대화하면서 저녁을 보냈는데 그게 너야. 왜 그랬던 것같니? 너를 본 건 어제 처음이 아니야. 바다를 낀 절벽에서 난 너가 명상하고 있는 모습을 봤어. 그리고 그 전에 배 탔을 때도 너가 지나가는 모습을 봤어. 그런데 그 때 아닌 지금 이렇게 우리 둘이 만난 건 지금 여기서 만날 인연이기 때문이지. 사람은 서로 필요해서 만나. 그 남자 애랑 여자 애는 그 시간과 장소에서 서로를 필요로 했어. 그래서 잤을거야. 원나잇 스탠드로 끝났을지 계속 연애했을지는 모르지만 그건 걔네 인연이니까 너가 신경쓸 필요가 없어. 서로 필요하지 않을 때 헤어졌겠지. 너는 너만의 여자 친구 인연, 남자 친구 인연이 있어. 그 것만 신경 쓰면 돼. 걔네들을 오히려 축하해줘야지.

- 뭐라구요?!

- 사람들은 과거에 안 좋은 경험이 있다고 말을 해. 근데 좋은 경험, 나쁜 경험은 없어. 그냥 경험일 뿐이야. 좋고 나쁜 건 너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른거지. 너의 친구, 아니 친구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 두 명이 같이 잔 게 너에게 나쁜 경험일까? 그건 그냥 하나의 경험이야. 물론 네 입장에서는 예상치 못한 경험이고 어렸으니까 많이 놀랐겠지. 근데 걔네들 입장에서는 서로 인연이니까 만난거잖아. 내가 너네 둘이 인연인지 모르고 배신이나 상처라고 착각하고 오랫동안 화가 났었다, 근데 내가 까미노에서 한 슬로베니아 아주머니를 만나서 얘기를 했는데 너네가 인연이었데, 그러니까 축하한다, 이렇게 편지를 써봐. 나도 까미노 하면서 사람들을 용서하고, 감사하고, 축복하는 편지를 쓰고 있어. 내가 편지랑 편지봉투 줄게.

- 뭐라구요?! 아니예요. 괜찮아요. 축복 편지를 주고 싶지 않아요.

- 너가 원하면 걔네들이랑 친구가 계속 될 수 있어. 너도 네 인연을 만나겠지. 그러면 걔네들도 너의 인연을 축복해줄거야. 

용서도, 축복도 와닿지 않았지만 인연은 이해가 됐다. 실제 네이썬이란 나와 나이가 비슷한 사람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것에 대해 여여했다. 네이썬은 무국적자같은 미국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세계 여러 국가를 돌아다니며 살았다. 돌아갈 집이 없고, 돌아갈 국가가 없고, 배낭 하나가 전 재산이라고 했다. 

- 그렇게 여러 국가를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떠날 때마다 아쉽지 않아?

-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면 되지. 오래된 친구를 떠나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그게 인생이지. 

- 아…

모이짜 아주머니는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 내가 여기 온 이유는 자살한 남편 때문이야. 난 애가 셋이 있어. 그런데 몇 년 전 남편이 자살을 했어. 항상 재밌는 사람이고 항상 유쾌한 사람이라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어. 남편은 항상 밝은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려고 하니까 오히려 속으로는 더 어두워진 것같아. 아직도 왜 그랬는지 잘 이해되지 않아. 그런데 그와 나의 인연은 거기까지인거지. 가끔은 내가 왜 남편이랑 결혼했을까 후회하기도 해. 대학교 때 만났었는데 오래 만나다보니 또 결혼할 나이가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결혼을 했어. 근데 그 과거에 대해 생각하거나 후회하는 시간은 짧아. 대신 보물 같은 세 아이가 생겼잖아. 이 아이들을 어떻게 잘 키울 수 있을까 생각하는 데 오래 보내. 사별하고 한 남자인 친구가 접근을 하더라. 근데 나는 새로운 부부 인연을 만들고 싶지 않아. 지금 유치원을 운영하는 데 어떻게 하면 더 잘 운영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바빠. 남편 없이 애 셋을 키워야 했기 때문에 그 때 수입으로는 어렵겠다 생각하고 유치원 사업을 시작했어. 모든 것을 내가 다 해야 했어. 땅부터 알아보고, 건물도 알아보고, 그 안에 인테리어도, 교사 구하는 것도, 가르치는 것도 다 내가 해야 했어. 그 일을 하기 전에는 사람들이 모두 반대하더라. 어떻게 혼자 그걸 다 하냐고. 그 때 기도를 하기 시작했어. 자기 확신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성공한다, 나는 행복하다, 이렇게 자꾸 스스로에게 말하는거야. 이 말을 현재형으로 해야 해. 하고 싶다고 소원을 말하거나 할 것이다라고 미래형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지금 현재진행형으로 말하는거지. 그러면 우주 기운이 바뀐다니까! 진짜야. 이 자기 확신을 하면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신기하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나타나. 마치 우주가 내 말에 응답하는 것같다니까. 너도 해봐.

몇 년 전 자기 확언이 처음 소개됐을 때 지나가는 유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모이짜 아주머니는 이걸 오랫동안 믿고 실천하고 계셨다.

- 지금 너가 만나는 사람들이 너에게 필요한 사람들이야. 과거 사람들한테 대해 왜 연연해하니. 필요 없어서 끝난 인연인데. 지금이 너에게 필요한 일이 일어나는 시간이고, 지금 여기가 너에게 필요한 일이 일어나는 장소고, 지금 만나는 사람들이 너에게 필요한 사람들이야. 지금, 여기, 이 사람들에게 감사해야지.

감사 기도는 특별한 순간에 행운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만 했었는데 모이짜 아주머니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순간에 감사 기도를 하고 계셨다.

목적지가 평소보다 짧아 일찍 도착하는 날이라 알베르게에서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테라스와 라운지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렇게 대낮에 걷지 않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사소함에 감사했다. 산타크루즈 베자나에서 만난 20명 중 8명이 친해졌다. 그 8명과 8인실 알베르게를 쓰기로 했다. 모이짜 아주머니는 좀 쉬겠다고 했고, 시간으로나 마음으로나 여유가 생긴 나는 나머지 아저씨들과 동네 구경을 가기로 했다. 아저씨들을 기다리면서 로비에서 땅콩을 먹고 있었는데 한 손님이 있어 말을 걸었다.

-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온 니키입니다. 어디서 오셨나요?

- 나는 빌바오에서 온 마르코야. 

- 혹시 순례자세요?

- 나는 일주일 정도만 걷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해.

- 어떤 일 하세요?

- 나는 사장(jefe)일이야.

- 요리사(chef)라구요?

- 아니 저런 유리 창문 만드는 회사 사장(jefe)이야.

여기 유명한 동굴이 있다. 알타미라 동굴이 있는데 그 곳은 보존 구역이라 매주 금요일 추첨을 통해 10명 정도만 출입이 가능하다. 옆에 세운 박물관은 알타미라 동굴을 재현했고 가이드 설명도 제공한다. 까미노 아미고인 이탈리아, 스페인 아저씨 넷과 로비에서 만난 마르코 아저씨도 동행하기로 해서 택시를 타고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걷지 않는 사소함에 감사했다. 박물관에 출입하자 원시 시대에 대한 설명문과 당시 사용했던 도구를 모아 둔 전시실이 있었다. 마네킹과 스크린을 통해 동물의 뼈와 가죽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보여준다. 좀 더 이동하자 가이드가 약 10명의 그룹을 지어 알타미라 동굴 벽화에 대해 설명해줬다. 아쉽게도 스페인어로만 제공됐기 때문에 나는 모든 관람이 끝나고 영어를 말할 수 있는 분의 간략한 설명을 들었다. 원시인은 주변 재료를 활용해서 동굴 천장과 벽에 그림을 그렸다. 소, 말 그림이었다.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서 보던 그림이 내 앞에 있었다.

박물관 관람이 끝나고 동네 구경을 더 했다. 귀족들이 모여 살던 동네라고 했다. 집집마다 가문의 문장이 벽에 걸려 있었다. 스페인에는 아직도 왕족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름 뿐이고 귀족들의 집은 관광객을 위한 레스토랑과 기념품 가게가 되었다. 

저녁은 햄버거와 맥주였다. 좋아하는 메뉴는 아니지만 모이짜 아주머니 없이 아저씨들 틈에서 비슷한 메뉴를 시켰다.

동굴도 박물관도 새롭긴 했지만 모이짜 아주머니와 대화하는 게 더 즐거웠다. 여행은 어디로 가는가보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더 중요한 것같다. 아, 그리고 맛있는 음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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