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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Jul 11. 2022

[산티아고 순례길] 세인트 빈센트 데 라 바케라 11

- 오늘은 일요일이라 수퍼마켓이 문을 다 닫겠죠? 음식을 미리 준비해둔 게 없는데 아쉽네요.

- 자기 확신을 하라고 했잖아. 분명히 문 여는 곳이 있을거야!

모이짜 아주머니는 어디서 이런 확신을 얻는걸까. 아침을 간단히 먹고 출발했다. 문을 연 수퍼마켓이 없으면 바에 가서 먹어야지.

- 아주머니는 자기 확신이 이루어지지 않은 적은 없어요? 이루어지지 않아서 실망한 적은 없어요?

- 없어. 자기 확신하면서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하니까. 저기 수퍼마켓이다!

정말 수퍼마켓이 열려 있었다. 진짜 신기하네. 근데 빵은 없었다.

- 아 빵 먹고 싶었는데..

- 손님, 빵 트럭이 방금 도착했습니다!

- 하하하. 니키야. 봤지? 자기 확신하니까 빵도 딱 오잖니!

수퍼마켓 주인 아저씨 말에 밖을 내다보니 정말 빵 배달 트럭이 도착했다. 그렇게 우리는 갓 구워 배달 온 빵과 다른 과일 등을 사서 계속 걸었다.

- 어제 아주머니 덕분에 그 호텔 사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됐어요. 모든 경험은 좋고 나쁨이 없고 그냥 경험일 뿐이라는 말, 도움이 됐어요. 그 두 명은 인연이었을 뿐이고, 저는 그 옆에서 목격했을 뿐이더라구요. 그 둘은 제 인연이 아니었을 뿐이고, 저도 제 인연을 만나게 되겠죠. 지금은 아주머니랑 인연인가봐요. 하하하.

- 하하하. 그렇지. 어쨌든 다행이다.

- 걔네 둘 인연은 제가 개입할 수 없지만, 제 인연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남자친구가 있어요. 몇 년 만났는데 한 번도 부모님에게 소개시켜준 적이 없어요. 아니, 존재 자체를 몰라요.

- 뭐라고?!

- 부모님 스타일이 아니에요. 아무래도 예전 세대다 보니 조건을 중요하게 생각하시거든요. 조건으로 보면 제가 만났던 사람들 중에 가장 거리가 멀어요. 그런데 배려는 정말 최고라고 말할 수 있어요.

- 친구들도 동의하니?

- 친구들한테도 소개시켜준 적이 없어요. 역시 존재 자체를 몰라요.

- 뭐라고?! 왜 친구들한테도 소개시켜주지 않아?

- 친구들 스타일도 아니에요. 이상하게 친구들은 조건 좋은 남자들이랑 많이 결혼했어요. 만약에 커플끼리 만났는데 친구 남편은 의사, 변호사 이러면 어울리지 못할 것같아요. 남자친구랑 저를 무시할 것같아요.

- 남자친구가 네 부모님이나 친구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돼?

- 제 자신이 초라해질 것같아요. 친구는 조건 좋은 사람을 만날 만큼 매력이 있는데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날 만큼 매력이 없나, 생각될 것같아요. 친구들이 저를 보고 얘는 이 정도 밖에 만날 수준이 안되는구나 하고 판단할 것같아요.

-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남자친구를 보는 게 중요하니? 인정받고 싶어?

- 말하다보니 생각이 정리되네요. 사실 부모님이나 친구들은 핑계인 것같아요. 그냥 제가 남자친구 조건이 만족스럽지 못해요. 그래서 제가 소개시키기 부끄러워요. 남자친구가 오래 전부터 결혼 얘기를 꺼냈는데 저는 불안한 거예요. 정말 가난하게 살텐데 저는 가난하게 살지 못할 것같아요. 또 친구들이랑 만나면 비교당할텐데 내가 그런 열등감으로 살지 못할 것같아요.

- 남자친구를 사랑하긴 하니?

- 사랑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얼마 전에 브라질에서 온 세르지오 아저씨랑 얘기를 하는데 제가 남자친구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어요. 사랑하는게 자꾸 생각나고 자꾸 만나고 싶은 거라고 하셨거든요. 남자친구는 생각도 나지 않아요. 그게 사랑이라면 사랑하지 않는 건가봐요.

- 생각이 안난다고?! 스페인 와서 연락 해봤니?

- 진짜 생각이 안나요. 친구들은 생각도 나고 만나고 싶어요. 그래서 스페인 와서 연락도 했어요. 근데 남자친구는 생각도 나지 않아요. 연락한 적도 없구요.

-  왜 친구들은 생각이 나고 남자친구는 생각이 나지 않아? 벨기에에서 온 바네사 알지? 어제 테라스에서 썬탠하면서 남편이랑 통화하더라. 그러다 잠깐 얘기를 했는데 남편이 너무 보고싶어서 산티아고까지 가지 않고 그냥 집으로 가서 남편이랑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하더라. 그게 사랑하는거야.

- 친구들 중에 새로 알게 된 남자가 있어요. 따로 만난 적도 없고 그냥 여럿이서 몇 번 밖에 만난 적이 없는데 굉장히 이지적이예요. 아는 것도 많고 생각도 깊어요. 남자친구는 속은 깊은데 그 새 친구만큼 지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준은 아니예요. 저는 지적 자극이 필요한 사람이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금방 질려요. 근데 이 새 친구는 저한테 관심이 없는 것같아요. 따로 만나자고 한 적도 없고 따로 연락하는 것도 아니예요.

- 네 마음이 누구에게 기울고 있는지 너무 보이는데. 너 자기 확신 해봤니?

- 여기서 자기 확신이 어떻게 적용되나요? 저 혼자 노력한다고 될 일도 아니잖아요.

- 인간관계도 자기 확신으로 할 수 있지. 그 친구 이름이 뭐니?

- 음.. G요. 

- 그래. 그러면 자기 확신을 ‘G는 나를 좋아한다. 나에게 연락한다. 나에게 만나자고 한다.’ 그렇게 하는거야.

- 하하하. 뭐라구요?!

- 어머 얘가 안 믿네. 진짜 된다니까!

너무 웃겼지만 속는 셈치고 마음 속으로 해봤다. ‘G는 나를 좋아한다. 나에게 연락한다. 나에게 만나자고 한다.’  

- 속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니고 큰 소리로 하는거야. 외쳐봐!

- 하하하. 아 정말 웃겨요. G는 나를 좋아한다! 나에게 연락한다! 나에게 만나자고 한다! 하하하!

한국에 돌아가기 전까지 3주 정도 남았고 나는 오랜 시간 걷고 불편하게 자서 몸을 편하게 쉴 수 있는 게 더욱 간절했다. 모이짜 아주머니가 스페인, 이탈리아 아저씨들과 연락이 닿았다며 오늘은 스튜디오 팬션 같은 곳에 가자고 한다. 

- 팬션 같은 곳인데 멀리 바다가 보인데. 그리고 이탈리아 남자들이 스파게티를 직접 만들어준데!

- 우와! 바다가 보이는 팬션에서 이탈리아 남자들이 이탈리아 스파게티를 해준다구요?!

어제 짧게 걸은 탓에 오늘은 오후 6시까지 걸었다. 마을 입구에서 팬션 주인이 차로 마중을 나왔다. 걷느라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예전에 택시 탔을 때와는 달리 죄책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차를 타고 팬션에 도착했다. 팬션 입구 문을 열고 2층으로 올라가니 현관문이 보였다. 왼쪽에는 화장실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부엌이 있었다. 부엌에는 간단한 조리도구와 접시가 있었다. 부엌과 거실은 큰 창문틀로 연결되어 있었고 창문틀 바로 아래 큰 식탁이 놓여 있었다. 식탁 옆에는 기역 자로 긴 소파 두 개가 있었다. 작은 탁자가 있었고 텔레비젼이 있었다. 소파 너머 큰 창문이 있는데 밖이 바다였다. 집 안에서 바다가 보인다! 거실 옆에는 침대 2개가 있는 작은 방이 있었다. 방 옆으로 작은 계단이 있었는데 한 바퀴 돌아 올라가니 화장실에 욕조가 있었다. 까미노 이후 처음 보는 욕조다! 침대 1개가 있는 큰 방과 그 옆에 침대 2개가 있는 작은 방이 있었다. 남자 넷이 작은 방 2개에 자고 여자 둘이 큰 침대 하나를 나눠쓰기로 했다.

일단 욕조로 뛰어들어갔다. 고무마개를 막고 뜨거운 물을 받아 지친 몸을 뉘였다. 천국이었다. 뜨거운 물이 구석구석 몸의 피로를 침잠시키는 듯했다. 뜨거운 샤워를 할 때도 기쁨이었는데 뜨거운 목욕은 한 차원 더 높은 낙원이었다. 오랜만에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니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사소한 목욕으로도 감격할만큼 몸이 지쳐있었구나.

똑똑똑. 니키. 똑똑똑. 니키. 똑똑똑 니키.

못들은 척 하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도 씻어야 했기 때문에 서둘러 목욕을 끝내고 나왔다. 1층으로 내려와 보니 이탈리아 아저씨들은 부엌에서 한창 스파게티를 만들고 있었다. 6명이지만 아마도 다들 많이 먹을 것같아 10인분은 준비하는 듯했고 냄비가 작아 두 개로 나눠 면을 익히고 있었다. 

- 어떤 스파게티인가요?

- 카르보나라!

- 와 여기가 천국이네요!

- 왜?

- 좋은 사람과 좋은 음식이 있으면 거기가 천국이죠!

- 하하하. 스파게티가 맛이 좋을지 어떻게 아니? 

- 그냥 느낌이 와요!

- 하하하.

평소에는 요리에 전혀 관심이 없고 어쩔 수 없이 만들어 먹어야 하면 샌드위치나 샐러드 정도만 만들었다. 요리 준비와 정리는 시간과 노동이 많이 들어가는 반면 먹는 건 순식간이라 부엌 일은 즐겁지 않다. 그래서 차라리 나가서 먹는 경우가 많았다. 근데 이탈리아 사람이 만든 홈메이드 스파게티라니! 기대가 컸다. 이탈리아 아저씨 두 명이 요리를 주도하고 나와 다른 사람들이 옆에서 거들었다. 이탈리아 아저씨들은 어떤 재료를 먼저 넣어야 한다느니, 얼만큼 넣어야 한다느니, 열정을 다해 만들고 있었다. 카르보나라라고 해서 크림소스일줄 알았는데 계란을 이용한 소스였다. 무슨 맛일까?

- 께 아프로베체(Que aproveche, 맛있게 드세요)!

느낌이 틀렸다. 맛이 없었다. 소스가 면의 양에 비해 너무 적었다. 그리고 면이 약간 퍼진 것같았다. 그렇게 많이 걷고 많이 배가 고팠기 때문에 웬만한 음식이 다 맛있었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이 없없다니 정말 맛이 없었나보다. 하지만 음식을 함께 만들었다는 것, 함께 나눠먹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었다. 

여섯 명은 스파게티를 먹은 후 마실을 나가기로 했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다 같이 커피숍을 가서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스튜디오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바다 썰물로 배들이 부두에 잘 묶여 진흙 사이에서 잘 버티고 서있었다. 

- 잘 걷고 있어요?

스튜디오에 돌아오니 카톡이 하나가 와있었다. G였다. 헉. 게다가 단톡도 아니고 개인톡이다. 모이짜 아주머니가 알려준 자기 확신이 진짜 통한걸까? 내 마음은 너무 자주 흔들려 누가 단단하게 묶어주었으면 좋겠다. 넘어지지 않게 누가 꽉 붙잡아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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