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멜레온 Jul 13. 2022

[산티아고 순례길] 펜두엘레스 12

모이짜 아주머니와 대화를 늦은 시간까지 하느라 늦게 일어났다. 일어나보니 스페인, 이탈리아 아저씨들은 이미 출발하고 없다. 오늘 도착할 알베르게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 니키야! 아침 준비 됐다!

샌드위치, 요거트, 과일이 준비돼 있었다. 모이짜 아주머니는 마치 어머니 같았다. 이미 늦잠을 잤기 때문에 금방 먹고 걷기 시작했다.

- 와 아침 상을 차려주셨네요. 모이짜 아주머니 마치 제 어머니 같아요.

- 그러게 나도 집에 있는 딸 생각이 나더라고. 하하하.

- 그런데 저랑 엄마랑은 애증관계인 것같아요.

- 왜?

- 어머니는 간섭이 지나치세요. 걱정도 많으시구요.

- 같이 사니?

- 네.

- 네 나이가 몇인데?

- 제 나이는... 

- 그 나이에 독립해 나와서 살아야 하지 않니?

- 서울 집 값이 얼마나 비싼데요! 사지도 못하고 월세도 비싸요!

- 내가 며칠 동안 널 지켜봤는데. 너 너무 공주같애.

- 뭐라구요?

- 너 요리 전혀 하지 않는다고 했지. 누구는 하고 싶어서 하니, 해야 하니까 하는거지. 그런데 너는 집에 어머니가 계시니까 요리할 생각도 하지 않잖아. 빨래도 옷을 내놓기만 한다고 했지. 빨래도 어머니한테 맡기고. 청소도 안하지. 어머니 다 시키고. 너무 편하게 산다. 너무 게을러!

- 저는 공주가 아니라 하녀예요. 집에서 얼마나 구박을 받는데요.

- 성인 나이가 되면 딱 독립해야 해. 몸만 컸지 생활이나 마음은 너무 애기 같아. 

- 저도 인정해요. 

- 지금부터 하면 돼. 까미노 끝나고 한국 가면 독립할꺼지?

- 퇴사하고 여기 온거라 일단 직장을 찾아야 해요. 그리고 직장 근처에 있는 집을 찾아봐야겠네요.

- 그래. 성인이 되면 자립해야해.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런데 너는 부모님이랑 같이 살아서 그런지 아직 자립심이 없는 것같아.

- 알아요. 그래서 스페인 까미노 온거예요. 자립심 키우려고.

- 그래. 잘 왔네. 너한테 필요한 여행이었네. 하하하.

- 부모님은 굉장히 엄격하세요. 하고 싶은 것도 못하게 하시고.

- 뭘 하고 싶었는데?

- 하고 싶었던 거 많죠. 일단 대학교 때 치어리더 동아리를 하고 싶었어요. 근데 여자 애가 남들 앞에서 짧은 치마 입고 춤추는 게 뭐냐고 반대했어요.

- 부모님이 반대해도 그냥 가입하면 되잖아.

- 가입하려면 시험을 봐야 해요. 춤 실력같은 걸 보겠죠. 아마 외모도 볼거예요.

- 시험은 봤니?

- 아뇨.

- 왜? 

- 떨어질 것 같았어요.

- 그럼 부모님 반대랑 상관 없는거네? 너가 떨어지는 게 두려워서 그냥 시도를 하지 않은 거네.

- 아... 그러네요…

- 떨어지는 게 자존심 상해서 시험조차 보지 않았던건데 부모 핑계를 댔어. 부모가 반대해서 치어리더가 되지 못했다는 건 마치 시험 봤으면 가능했을 거라는 여지를 남기는 거야. 너가 진짜 원했으면 시험을 봤을거야.

- 그러게요…

- 근데 왜 부모가 원하는대로 살려고 그래?

- 이제 부모가 원하는 거랑 제가 원하는 거랑 구분이 힘들어졌어요.

- 빨리 독립해야겠다. 부모랑 너무 오래 살았어. 하하하.

- 독립해야죠. 그러려면 먼저 돈을 모아야 해요. 그러려면 돈을 벌어야 하는데 그럼 취직을 해야돼요.

- 무슨 일 하는데?

- 통역하고 번역해요.

- 어떤 분야?

- 아직 잘 모르겠어요. 전문 분야가 있으면 좋긴 한데 없다보니 일반 분야예요. 예전에는 회사 소속이라 회사 관련 자료를 번역하고 회의 통역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제가 진짜 하고 싶은 건 프리랜서예요. 그러려면 고객을 제가 찾아다녀야 하고 또 관리를 해야 하는데 제가 인간 관계에 서툴러요. 그래서 아마 다시 인하우스 통번역사가 될 것 같아요.

- 너 네 꿈에 대해 자기 확신해봤니?

- 하하하. 또 자기 확신 얘기네요. 이건 문 연 수퍼마켓을 찾는 것도 아니고, 친구 만드는 것도 아니고 제 커리어에 대한 건데요.

- 그러니까 더 절박하게 우주에게 도움을 요청해야지! 네 주변에 프리랜서 통역사 없니?

- 있긴 해요.

- 그런 일 달라고 연락해봤니?

- 아뇨.

- 왜?

- 별로 친하지 않아요. 그리고 저보다 훨씬 더 통역을 잘 해요.

- 그래도 연락해 봐. 그래서 기회가 생기면 달라고 해.

- 그러다가 연락이 오지 않으면 자존심 상해서 어떡해요?

- 너는 G한테도 자존심 상해서 적극적으로 연락 못한다고 하더니 무슨 자존심을 그렇게 따지니!

- 근데 저는 그렇게 예쁜 편이 아니라서 G가 저를 좋아할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저한테 관심이 있으면 G가 먼저 연락을 했겠죠. 여자가 아무리 차갑고 튕겨도 좋아하면 G가 적극적으로 나오겠죠.

- G 나이가 너보다 많아?

- 네.

- 차갑고 도도한 건 어릴 때나 잠깐 호기심 생기는 거지 나이 들면 호감조차 들지 않아. 아니 입장 바꿔 생각해 봐. 너 같으면 친절하게 잘 웃는 사람이랑 무표정으로 쌩 하는 사람이랑 누가 더 매력적이니?

- 예쁘면 뭘 해도 이쁘데요. 제 친구 중에 모델 하고, MC하고, 연기하는 애가 있거든요. 걔가 아무리 공주라도 아무리 차도녀라도 남자들이 좋아해요. 저도 그 친구 덕분에 그 쪽에 잠깐 관심이 있었는데…

- 모델 하고 MC하고 연기하고 싶었어? 그런 일 달라고 연락해봤니?

- 아뇨.

- 왜?

- 걔는 저보다 훨씬 예뻐요. 저는 연락도 오지 않을걸요? 부탁하는 거 자체가 비굴해요.

- 얘는 또 자존심 세우고 포기하네.

- 아주머니가 너무 이상적이예요!

- 너 너가 예쁘다고 생각하니?

- 아뇨…

- 너 너가 통역 잘한다고 생각하니?

- 아뇨…

- 너 너가 사랑받을 자격 있다고 생각하니?

- 아뇨…

- 얘 총체적 난국이네…

숲 속에 들어서자 모이짜 아주머니는 초록색 매트를 꺼내 펼쳤다. 과자와 과일을 꺼내 먹으면서 아주머니는 자기 확신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 목표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포스트잇 등에 목표를 써서 사방에 항상 보이게 하라고 했다. 아침마다 거울을 보며 목표에 대한 자기 확신을 입 밖으로 크게 소리내어 낭독하라고 했다. 스스로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구부정하게 움츠려 다니는 그런 모습이 예뻐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스스로 커리어에 대해 확신을 하지 않고 걱정을 하니까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했다. 스스로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지금 남자친구랑 헤어져도 나를 사랑해줄 수 있는 다른 남자를 만나지 못할꺼라 생각한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자기 확신을 나에게 전수해주고 부정적인 영혼 하나를 구제해주기 위해 내가 너를 만날 필요가 있었나보다, 라고 하시며 생각이 현실이 되므로 모든 것에 항상 긍정적인 생각만 하라고 했다. 내가 생각이 부정적이어서 좋지 않은 친구들이나 사귀고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모이짜 아주머니는 슬로베니아에서 베자라는 꽃으로 차를 만든다며 길거리에 있는 베자를 채취하기 시작했다. 작은 하얀 꽃이 묶음으로 피어있었다. 달콤한 향기가 나는 꽃을 따며 자기 확신에 대해 하루 종일 대화하다보니 시간이 늦었다. 알베르게에 침대가 있게 해주세요! 아니, 침대가 있을거야! 자기확신하자고 했다.

- 와. 오늘의 마지막 침대 2개입니다. 두 분 운이 좋으시네요.


설마 했는데 알베르게 주인은 우리를 바로 뒤따라 들어온 두 명에게 방금 침대 2개가 나갔다고 설명하며 다른 곳으로 보냈다. 작은 알베르게였고 저녁 8시에 공동 식사시간이 있었다. 지난 몇 일 동안 본 순례자도 있었고 처음 만난 순례자도 있었다. 애피타이저로 콩 수프가 나왔다. 메인으로 올리브유 샐러드 파스타가 나왔다. 차가운 파스타였는데 따뜻한 토마토나 크림 파스타보다 맛있었다. 단순하고 담백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와인을 마셨다. 스페인 와인 가격은 한국보다 훨씬 저렴하다. 몸에 피가 아닌 와인이 흐르는 것같았다. 체력은 힘들지만 와인 기운으로 더 걸은 적도 있다. 와인이 들어가자 순례자들 사이에서 더 깊은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 제가 딸이 있었는데 사망했어요. 딸이 사망하고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작년에 프랑스 길을 걸었는데 아직 집착을 버리지 못했나봐요. 그래서 다시 걷고 있어요. 

마음은 무국적자 미국인 네이썬이 말했다. 언제부터인가 인디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12살 어린 영국인 여자랑 항상 붙어 다녔다. 항상 즐거워하는 영혼이라서 좋겠다, 나는 여행지 로맨스 없는데,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네이썬 마음에 구멍이 있었다.  

남편이 사망한 아내, 딸이 사망한 아버지가 오는 순례자들 사이에서 혼자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것처럼 사는 내 모습이 우스워보였다.

작가의 이전글 [산티아고 순례길] 세인트 빈센트 데 라 바케라 1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