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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Jul 19. 2022

[산티아고 순례길] 꾸에레스 13

작은 산장같은 알베르게 2층에 큰 소리의 노래가 울려펴졌다. 여기 저기서 휴대폰 알람도 울렸다. 다들 분주히 짐을 챙기기 시작한다. 1층에 내려가보니 세탁기로 돌린 옷이 뽀송뽀송하게 말라 있었고 커피 향이 퍼지고 있었다. 알베르게 주인이 아침을 준비해주셨다. 그라놀라, 우유, 빵, 커피. 한국에서는 혼자 간단히 먹는데 여기서는 거의 20명이 긴 테이블에 앉아 함께 식사했다. 그라놀라는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지 정말 맛있었다. 차가운 우유가 아닌 따뜻한 우유와 그라놀라를 먹었다. 속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뜨끈한 국물이 왜 생각나나 했더니 어제 와인을 마신 탓이었다. 해장을 하고 출발했다.

일출을 보며 오늘 여행을 시작한다. 아니, 일상을 시작한다. 단기간으로 여행을 가면 일상을 탈출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이렇게 장기간으로 여행을 오니 여행이 일상이고, 일상이 여행이다. 일상에서는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서 어제 먹었던 아침 메뉴를 먹고 어쩌면 다행인 같은 직장에 출근해서 내일도 만날 사람들과 일한다. 처음부터 설명할 필요 없이 나를 아는 친구를 만나고 인연이 닿으면 애인이 생겨 익숙한 장소에 간다. 이런 일상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가보지 않았던 새로운 곳으로 가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어진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통해 나와 다른 생각이 듣고 싶다. 한 달 간의 나의 일상은 하루종일 그냥 걷는 것이다. 갈라지는 길도 없이 내가 선택할 길도 없이 정해진 길을 걷는다. 새로 개척할 길도 없고 수 천년 동안 사람들이 걸어왔고 앞으로도 수 천만 사람들이 같은 길을 걸을 것이다. 하지만 순례자 각각의 인생은 다르다.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음식을 먹지만 서로 다른 추억을 갖고 갈 것이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누구를 만나느냐인 것같았다. 

- 니키!

- 잇츠 니키!

- 오 니키!

- 해피 니키!

50명의 사람들과 공동 저녁 식사가 있었던 게메스에서 처음 만났던 이탈리아 아저씨 둘, 스페인 아저씨 둘이다. 8인실 알베르게를 나눠 썼던 산티아나 델 마르에서 알타미라 동굴을 함께 놀러갔던 분들이다. 세인트 빈센트 데 라 바케라에서 스튜디오를 빌려 뜨거운 목욕을 하고 이탈리아 아저씨들이 만든 카르보나라를 6명 함께 나눠 먹은 친구들이다. 모이짜 아주머니가 없어서 아쉬웠지만 다시 만나 반가웠다. 아저씨들은 아침 식사를 하지 못했다며 바에 들어가기로 했다. 나는 그라놀라와 따뜻한 우유로 배가 든든해서 계속 걷기로 했다. 아저씨들과 인사를 나누고 혼자 출발했다.

파랗다라는 단어는 이런 하늘을 보고 만든 단어라고 생각할 정도로 하늘이 파-아-래-앴다. 진한 파랑색 아래 중간 파랑색 아래 연한 파랑색이 그라데이션을 이뤘다. 

파란 머리띠를 한 아주머니와 아저씨를 만났다. 

- 안녕하세요. 일행이신가요 여기서 만나신 건가요?

- 나는 이혼했고 이 사람은 새 파트너야.

스웨덴에서 온 아주머니가 웃으며 경쾌한 목소리로 답했다. 약 20년 동안 결혼생활을 하다가 이혼하고 새 파트너를 만나 함께 까미노를 걷는다고 했다. 어제는 레드 와인을 마셨고 오늘은 화이트 와인을 마신다고 말하는 것같은 어투였다. 만난지 몇 분 되지 않은 사람에게 이혼은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모습에 내 마음까지 가벼워지는 것같았다. 나도 언제쯤 모든 것을 다 털어내고 깃털처럼 가볍게 살 수 있을까.

- 아주머니는 30대로 돌아가면 무엇을 바꾸고 싶으세요?

- 내 자신을 더 믿었을 것같아. 다른 사람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고 나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기준을 정립하고 그에 따른 선택을 믿었을 것같아. 그 때는 왜 그렇게 모든 게 불안하고 자신감이 없었는지 모르겠어. 

- 지금의 자신감은 어디서 생겼어요?

- 사는 경험에서 나오는 거지. 경험이 적었던 과거에는 모든 일이 굉장히 심각하고 무겁게 느껴졌어. 그런데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다 사소한 일이고 결국 다 괜찮더라고. 하하하. 그렇다고 그걸 실수나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더 나은 선택을 하는 지혜를 얻었으니까. 모두와 친해지려고 하지 말고 중요한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도 있네. 나는 거절을 잘 못해서 웬만한 부탁은 들어주느라 힘들었어. 그런데 상대방의 부탁이나 제안을 다 들어줄 필요는 없더라고. 중요한 사람, 중요한 일에 더 신경썼으면 좋았을 것같아. 반대로 사소해 보이는 것에 감사할 줄 알기. 까미노를 하다보면 쉴 집이 있고, 마실 물이 있고, 먹을 음식이 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너도 아마 느꼈을거야. 여기서는 매일 알베르게를 찾아야 하고, 물과 음식을 구해야 하잖아. 사소해 보이는 게 사실 정말 중요한 건데 일상에서는 자주 잊어버리는 것같아. 중요하지 않은 일을 중요하다고 착각하고, 중요하지 않는 사람 마음에 들려고 하는 불필요한 노력을 줄여나가기. 무엇이 나에게 중요한지 알고 그에 따른 내 선택을 믿는거지.

잠깐 만나 대화한건데 하루 종일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 이 여행을 시작하면서 버리고 싶은 3가지 - 후회, 두려움, 자기비하 - 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후회는 허상이다. 과거에 다른 선택을 했더라도 더 나은 결과가 있었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고, 그 선택으로 인해 현재의 내가 있는 것이고, 그 선택은 당시 상황에서는 최선이었으니 그 경험으로부터 배우고 성장하면 된다. 

두려움도 허상이다. 두려움은 행동하지 않을 때 상상 속에서 느끼는 것이고, 걱정 대신 자기 확신을 하면서 행동하면 달성할 확률이 높아지고,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별 일 아니다. 

자기비하는 내가 누구인지,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해서 생긴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게 좋은 것인줄 알았다. 남들에게 항상 질문하고 조언을 구하며 기분이 좋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마음이 열려 있어서가 아니라 내 기준이 없어서 이 사람의 기준, 저 사람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정신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을 가본 친구들이 부러웠었다. 이 까미노를 하기 전에 까미노를 한 친구가 두 명 있었다. 발바닥에 피가 날만큼 걸어보니 이제 여행하는 친구들이 더 이상 부럽지 않다. 그들에게 필요한 여행이 나에게 더 이상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까미노를 했기 때문에 하지 않은 친구들보다 나을 것도 없었다. 

나보다 마른 친구들이 부러웠었다. 체중을 재보지 않아도 느낌으로 한국에 있을 때보다 체중이 확실이 줄었다는 걸 알았지만 체중이 줄었기 때문에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다. 되돌아보면 나는 행복하지 않을 때 많이 먹었고 그 결과 체중이 늘었다. 날씬해서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했을 때 덜 먹어서 날씬해진 것이었다. 불안하고 공허한 마음을 먹는 것으로 채우려고 했었다. 폭식의 원인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체중을 줄이려고 하기보다 마음을 행복하게 하는 게 해결책이었다.

체중 감량보다 더 신경이 쓰였던 것이 발의 물집이다. 나 혼자 걸으면서 내 속도를 찾아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이탈리아인 피에르와 너무 빨리 걸었다. 그 후 모이짜 아주머니와는 너무 천천히 걸었다. 이제는 그 사이 어디, 내 속도를 찾기 시작했다. 남의 기준에 따라 사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인줄 몰랐다. 흰 테이프로 열 발가락 하나하나를 다 감아야 했다. 그리고 엄지 발가락 안쪽, 발가락 사이, 새끼 발가락 바깥쪽까지 감았다. 이제는 초반에 걸었던 몇 시간 연속은 커녕 몇 분조차 걷는 게 힘들었다.

“길은 산티아고가 아니라 길에 있다(Camino is the way, not Santiago)” 

누군가 바닥에 쓴 글자를 보았다. 참 한가한 소리하네. 산티아고가 목적이고 목적이 산티아고지! 분명히 산티아고 가본 사람들이 여유부리는 거다. 발 물집 때문에 여기서 중도 포기한다면 이 까미노는 실패하게 되고, 나는 실패자가 된다. 

혼자 걷는데 너무 짜증이 났다. 들판을 걷는데 몇 미터 안되는 터널이 있었다.

- 으아아아아아아악!!!

살인사건 난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어디 퍼지지 않고 터널 속에서만 울렸지만 후련했다. 더 큰 도시에 머물고 싶었지만 질질 끌려가지 않는 한 이제 도저히 걷지 못할 듯했다. 작은 산 마을 꾸에레스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3-4층 처럼 보이는 알베르게 주변에는 돌, 꽃, 나무가 잘 정돈되어 있었다.

- 똑똑똑. 계세요?

현관문을 두드리니 아무 답이 없었다. 넓은 현관 마루에는 의자, 장식품, 자전거가 있었다.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 노노노! 나가세요! 나가!

희끗희끗한 머리를 질끈 묶은 60대 처럼 보이는 남성분이 맨발로 뛰쳐나와 손사래를 치며 나를 벌레 쫓듯 쫓아냈다. 

- 이 알베르게는 이미 다 찼어요!

- 아니 이렇게 큰 알베르게인데요? 제가 부엌 식탁 옆에서 잔 적도 있어요. 정말 자리가 없으면 통로에서라도 잘게요. 제가 발이 다쳐서 정말 더 이상 걷지 못하겠어요.

- 아까도 누가 사정을 해서 겨우 한 명 더 받아서 어려울 것같은데. 일단 주인한테 물어볼게요.

나는 현관 의자에 주저앉았고 신발을 벗어 발을 말렸다. 실내가 안되면 실외 현관에서라도 눕고 싶었다.

- 다행히 주인이 허락해줬어요. 여기 묵어도 돼요. 이 알베르게는 다른 곳과 달라요. 설명해줄테니 잘 들어요. 이 알베르게에서는 지금 입은 옷, 신발은 물론, 본인 짐도 갖고 들어갈 수 없어요. 일단 샤워를 하세요. 여기서 상의와 하의를 줄거예요. 그 옷을 입고 여권, 지갑 등 실내에서 꼭 필요한 물건만 이 작은 가방에 넣어 그 것만 안으로 들고올 수 있어요. 그 외 모든 짐은 이 실외 현관에 둡니다. 다음 수칙은 씻고 들어와서 이어 설명해줄게요.

우연히 찾았는데 씻어야 출입할 수 있는 깔끔하게 관리하는 알베르게였다. 빈대가 있는 알베르게가 있다고 들었고, 어떤 순례자는 빈대에 물려 얼굴, 목, 팔 여기 저기 울긋불긋한 자국을 본 적이 있는데 예방 조치를 취한 이 곳이 마음에 들었다. 

- 샤워장이 어디예요?

- 저기 앞이요.

- 네? 야외에 있어요?

- 날씨가 따뜻해서 괜찮아요. 

달팽이처럼 동그랗게 말리는 모양인 야외 샤워실로 들어가니 샤워 헤드가 2개 있었다. 샤워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먼저 온 까미노 아미고들이 동그랗게 모여 수다떠는 소리가 들렸다. 샤워하는 물소리가 다 들릴텐데. 뜨거운 물줄기를 느끼는 신음소리도 참아야 한다.

- 히익!!!

샤워장 위로 하늘이 보였다. 코발트 블루의 하늘에 새하얀 구름이 떠다녔다.

- 히야!!

그리고 넓게 펼친 산맥이 보였다. 이런 광경은 처음 본다. 은색 샤워 꼭지, 코발트색 하늘, 그리고 초록색 산맥. 샤워실이지만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해변도 아닌데, 하늘과 산을 보며 야외 샤워를 하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알베르게에서 주는 상의와 하의를 입고 물건을 챙겨 맨발로 들어섰다.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별장같았다. 예상보다 실내가 훌륭했다. 인테리어도 고급스럽게 모두 원목으로 했고, 면적도 꽤 넓어서 11명이 아니라 110명도 들어갈 것같았다. 1층에는 소파와 탁자, 식탁이 있는 거실, 큰 아일랜드가 있는 부엌, 화장실, 세탁실이 있다. 천장은 2층까지 틔여 있어 더 크고 높게 느껴졌다. 나무 계단을 조심스럽게 밟고 1층 면적 절만 정도만 차지하는2층을 올라갔다. 2층에는 벙커가 아닌 침대가  10개 있었고 화장실 2개가 있었다. 1층 현관 마루보다는 좁은 베란다가 2층에 있었고 창틀에는 불상 등 장식품이 깔끔하게 놓여져 있었다. 원목을 살리는 은은한 조명빛이 알베르게를 따뜻하게 감쌌다. 이렇게 사진을 많이 찍은 알베르게는 처음이다.

- 안녕하세요. 알베르게 주인 캐서린입니다. 태어난 곳은 프랑스며, 스페인에서 20년 넘게 살았습니다. 까미노를 하다가 정말 좋아 다른 알베르게에서 일을 하면서 나만의 알베르게를 구상했습니다. 보셨듯이 앞에 산이 보이는 이 장소가 좋아 여기에 알베르게를 지었습니다. 모두 원목을 사용했고 에코 패시브 (eco passive) 하우스로 최대한 에너지 손실을 차단해 화석 연료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실내 온도를 따뜻하게 유지합니다. 요가를 할 수 있는 천막이 밖에 있고, 작은 텃밭에서 작물을 재배하는 등 순례자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와이파이는 오후 6시부터 8시까지만 사용 가능합니다. 저녁 식사는 8시에 제공합니다. 기상은 오전 7시이며 서로의 숙면을 위해 그 전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침 식사는 7시 30분에 제공합니다.

60대 주인 캐서린 아주머니는 친절하면서 철저해 보였다. 

다른 순례자들 중 친구 셋이 온 팀이 있었다. 제일 친한 친구 4명이 있는데 한 명이 빠져 이번에 셋이 북쪽길을 가고, 다음에 넷이 프랑스길을 갈 것이라고 했다. 영원한 우정이 있다고 믿는지 같은 문신을 넷이 발목에 했다. 제일 신나는 주제인 여행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한 친구는 약 30개 국가를 여행했는데 내가 가보지 못한 나라 중 스리랑카와 모로코가 흥미롭게 들렸다.

드디어 8시 저녁 식사가 시작됐다. 애피타이저는 야채 수프였다. 메인은 야채 볶음밥이었다. 지금까지 크로와상, 스파게티 등 밀가루만 먹다가 쌀을 먹으니까 맛있었다. 디저트는 사과찜이였다. 이렇게 깔끔한 산장은 까미노가 아닌 휴가로 올만한 곳이었다. 알고보니 산장의 나머지 절반은 순례자가 아닌 일반 여행객을 대상으로 한 시설이었다. 고가일 듯했다.

식사가 끝나자 캐서린 아주머니는 종이와 연필을 나눠주었다.

- 건강한 식사로 몸도 건강해졌으니 이제 마음도 건강해질 차례죠? 종이에 오늘 감사한 점을 써볼 거예요. 적으면 적은대로, 많으면 많은대로 써보세요. 감사 쪽지는 병에 모았다가 연말에 다른 순례자의 쪽지와 함께 태웁니다.

말로만 듣던 감사 일기가 이런걸까. 산장에서 촛불을 켜고 다른 사람들 옆에서 함께 쓰니 캠핑을 온 것같았다. 오늘 있었던 소소한 일, 특별한 일들이 스쳐지나갔다.

- 아침 식사로 그라놀라와 따뜻한 우유로 해장해서 감사합니다

- 진물과 피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데려다준 두 발에 감사합니다.

- 만실이었는데 운이 좋게 이렇게 고급스러운 산장에서 숙박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 하늘과 산을 보며 야외 샤워를 해서 감사합니다.

- 마음이 편안해서 감사합니다.

해가 지기 전에 알베르게를 구해야 한다는 긴장감, 따뜻한 대화와 식사로 인한 평안함이 익숙해지자 발의 고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혹시 약을 바를 수 있을지 관리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 너 이 발로 어떻게 걸었니?

- 초반에 조금 빨리 걸었어요. 남들보다 뒤처지기 싫었거든요.

- 너 이 발로 계속 걸으면 더 심각해져. 내일은 걷지 말고 쉬는 게 좋겠다.

- 뭐라고요? 지금도 늦게 걸어서 처음 같이 시작한 사람들은 한참 앞에 가고 있을텐데요? 내일도 쉬면 30km 더 뒤쳐져요!

- 너 이 시커먼 발톱 보이지? 이 발톱 빠질거야. 여기 울긋불긋한 거 보이지? 여기 물집 생길거야. 이 물집 보이지? 이거 터뜨려야 하고, 계속 걸으면 터뜨린 곳에 또 물집이 생겨. 발가락 사이 찢어진 거 보이지? 여기서 상처가 더 깊어지면 진짜 병원 가고 항생제 먹고 치료 받아야 해. 이 정도면 어제 도착하자마자 씻고 바로 치료했어야 했는데 이 때까지 어떻게 참았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내 속도를 모르고 발을 혹사시켜서 내가 바보같기도 하고, 하루 머무는 것도 원래 안됐었는데 이렇게 호텔같은 럭셔리한 곳에서 이틀이나 머물게 허락해준 게 감사하기도 하고, 남들보다 하루 더 뒤떨어지는게 속상하기도 했다.

이제는 발에 감각을 잃었다. 실을 타고 진물이 나올 수 있도록 물집에 실을 꿰었고, 치료제를 발랐는데 온 발바닥이 얼얼했다. 발톱이 빠지는 건 고통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 순례자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실수를 했구나.

- (훌쩍)

- 나 자신을 모르고 남을 따라가는 것은 가장 좋지 않은 선택이야. 까미노 하면서 만나는 사람이 몇 명일까? 몇 백명 되지 않을까? 사람은 오고 가는거야. 내일 푹 쉬고 네 몸과 마음에 더 귀를 기울여봐. 다른 사람들보다 너 자신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지.

다른 아미고들은 모두 2층으로 올라가 취침하기 시작했다. 나는 1층 거실에서 에어매트리스 위에 누웠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렀다. 서글프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한 마음으로 훌쩍거리다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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