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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Sep 25. 2022

[산티아고 순례길] 산타마리나 27

바로 포르투갈로 갈 것인가? 아니면 스페인에 더 남아 피스테라나 묵시아를 갈 것인가? 두 곳 다 간다면 어디를 먼저 갈 것인가? 산티아고만으로는 부족했다. 산티아고를 26일 째에 끝냈다는 것은 북쪽길에서 프리모티보길을 16일 째에 시작한 것만큼의 의미만 있다. 그렇다고 이렇게 스페인 여행을 끝낼 수는 없다. 누구는 두 곳 다 가보라고 했다. 누구는 한 곳은 별로라며 한 곳만 가보라고 했다. 누구는 두 곳 다 별로라며 바로 포르투갈을 가보라고 했다. 어디로 갈 지는 결국 내 맘대로 하면 된다.

남들은 쉽게 선택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까미노 내내 다른 순례자마다 알베르게 주인마다 피스테라와 묵시아에 대해 물어봤다. 어제 알베르게에서 만난 한 순례자는 까미노의 다른 루트인 포르투갈길로 산티아고에 왔는데 포르투갈길을 역행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신선했지만 결국 피스테라와 묵시아까지 가는 데 마음이 끌렸다. 한 때 지구의 끝이라고 간주됐던 피스테라를 가야 의미 있는 마무리가 될 것 같았다. 먼저 지구 끝에서 이전까지의 나를 버리고 싶었다. 끝내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아침 식사로 어제 남은 리가토니 파스타를 올리브와 올리브유와 함께 먹었다. 올리브는 중독적이다. 산티아고를 벗어났다. 숙제를 마치고 놀러나가는 기분이다. 누군가 옆을 맴돌다가 말을 걸어왔다.

- 안녕. 어디로 가는 길이니?

- 나는 피스테라로 가.

- 같은 방향이다. 같이 걸을래?

- 그래.

- 너는 어느 길로 왔니?

- 나는 북쪽길 걷다가 프리모티보길을 걸었어. 너는?

- 나는 은의 길.

- 아 순례길 중 가장 길다는 길!

- 은의 길은 스페인 남서쪽 세비야에서 산티아고까지 올라가는건데 약 1,000km를 걸어야 해.

- 엄청나다! 

찾아보니 가장 많이 가는 북쪽길, 프랑스길, 포르투갈길 거리는 각각 830km, 780km, 630km 였다.

- 너는 몇 km 걸었니?

- 나는 북쪽길 걷다가 프리모티보길을 걸었는데 증명서에 802km라고 써주더라.

- 은의 길은 거리 자체보다 그늘이 없어서 힘들었어. 땡볕에서 걷는 게 쉽지 않아

- 식수대는 자주 있어?

- 구간마다 다른데 어느 구간은 식수대가 없어. 그게 어디가 될지 모르니 2L 물이 항상 있어야 해.

- 짐도 많을텐데 무거웠겠다.

- 너무 무거워서 갖고 온 침낭을 한 알베르게에 두고 왔어. 날씨가 그렇게 춥지는 않더라고.

- 나도 무거울까봐 침낭 대신 식탁보를 들고왔어.

- 식탁보는 왜?

- 침대 시트 같은거지. 비닐이다보니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빼고는 유용했어.

- 자려고 하는 데 옆에서 부시럭거리면 웃기겠다. 하하하. 

알베르게가 일단 깨끗해야겠지만 혹시 침대에 빈대가 있었다면 비닐 식탁보가 나를 보호해준 일등 공신이다.

- 너가 침낭 버린 것처럼 어느 알베르게든 순례자들이 두고 간 물건이 있더라. 책 같은거.

- 너는 버린 거 없니?

- 책 한 권이 있는데 여기 온다고 친구가 선물해준거라 무거워도 버릴 수 없었어. 화장품도 많이 남긴 했는데 그것도 버리지 못했어. 하하하.

- 짐을 잘 챙겼나보네. 산티아고 도착하니까 기분이 어때?

- 음… 생각보다 덤덤했어. 너는?

- 나도 그냥 그래. 피스테라, 묵시아까지 가봐야 마음이 정리될 것같아. 점심 같이 먹을래?

- 좋아!

바에서 로렌스에게 물었다.

- 너는 후회같은거 하니?

- 아니.

- 왜?

- 과거는 과거니까.

- 고치고 싶은 게 없어?

- 고칠 수 없는 거니까 아예 생각을 안해. 미래 계획하기에도 바쁜데 뭐.

그렇다. 미래만 계획하기에도 짧은 인생이다. 과거는 생각하지 말자. 로렌스는 일찍 일정을 마치겠다고하고 알베르게에 갔다. 나는 무슨 힘이 생겼는지 약 40km를 걷고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 안녕하세요. 침대 있나요?

- 네 있어요. 어디서 오는 길이에요?

- 산티아고에서요.

- 산티아고 데 콤파스텔라요? 마드레 미아(Madre mia)!

도착한 알베르게에는 약 40인실 2층 벙커가 있었는데 침대 사이가 널찍해서 난민 수용시설같지는 않고 병원같았다. 다른 순례자는 거의 없었다. 마음의 여유가 생겨 얼굴에 시트팩을 하나 붙였다.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니 그 동안 내 몸을 많이 구박했다. 하이힐을 신고 걷기도 모자라 뛰어다닌 결과 이제 힐을 신고 서있기만해도 발이 금방 아프고, 무릎은 관절염 위험 판정을 받았고, 허벅지는 더 얇았으면 좋겠다고 왜 이렇게 두껍냐고 저주했다. 배는 왜 포만감을 느끼지 못하는지 1인분 기준이 무색하게 끊임없이 먹어댔고, 코가 민감해 거울을 자주 확인해야만 하고, 스트레스가 심할 때는 심장이 아파 심장마비로 사망할 수 있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고,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할 때 내 머리를 의심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평생 가장 극한으로 몰아붙였던 이번 여행에서 살아남은 몸에게 정말 감사했다.

- 산티아고까지 802km, 오늘은 40km쯤 걸어준 두 발에 특별히 감사합니다.

- 등산 스틱 공이 크지만 그 거리를 걸어준 좋지 않은 무릎에 특별히 감사합니다.

- 그 동안 구박했던 튼튼한 꿀벅지에 특별히  감사합니다.

- 배탈 한 번 없이 모든 음식을 소화해준 소화기관에 감사합니다.

- 바다, 산, 숲을 다니며 맑은 공기 덕을 많이 봤지만 숨을 잘 쉬어준 폐에 감사합니다.

- 한 알베르게에서 누가 자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하던데 잘 뛰어준 심장에 감사합니다.

- 뇌, 너는 더 분발하자. 여러 모로 경험하고 깨달았으니 앞으로 현명하게 반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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