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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Sep 27. 2022

[산티아고 순례길] 피스테레 28

라면을 먹고 싶어서 공용 주방에 가서 가스렌지를 켰다. 성냥으로 불을 붙여야 했는데  불의 세기가 약해 커피 한 잔을 마시려 해도 30분이 걸릴 판이었다. 가는 길에 마트나 바에 들리기로 하고 그냥 출발했다. 구름 낀 날이다. 얼굴 타는 것을 싫어하고 하루 종일 걷는 게 목적이라면 이런 날씨가 최고다. 그 때 자신의 키보다 큰 지팡이를 짚으며 오는 한 순례자가 있었다. 내가 가는 방향과 반대로 산티아고까지 걸어가는 분 같았다.

- 안녕하세요. 혹시 오시는 길에 마트나 바가 있었나요?

- 몇 시간 동안 못봤어요.  

비보를 접하고 가까운 벤치에 앉았다. 라면은 비상식량으로 가져온건데 진짜 비상식량이 됐다. 어쩔 수 없이 라면을 부셔 먹었다. 벤치에는 자신이 왔다갔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ever tried

ever failed

no matter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시도했다

실패했다

그래도

또 하자

또 실패하자

더 나은 실패를 하자

비상식량을 충분히 챙기지 못한 것은 실패다. 그럼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가 말한 더 나은 실패를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허허벌판에서 굶주리고 있었다. 그래도 계속 걸었다. 몇 시간을 걸었을까. 몇 시간을 더 걸어야 할까. 이제 물도 바닥나고 있었다. 더 오랜 시간 동안 먹지 않은 적도 있는 것같은데 앞으로 몇 시간 동안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더욱 더 배고파졌다. 이럴줄 알았으면 버스를 타는 거였다. 내가 무슨 객기를 부리며 걷는다고 했을까. 히치하이킹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도 차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더 걷다가 작은 알베르게가 보였다. 문을 두드리자 알베르게 주인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나왔다.

- 안녕하세요. 여기 근처에 혹시 마트나 바가 있나요?

- 여기는 아무 것도 없어. 한참 더 가야 나와.

- 아… 그럼 제가 물통이 비었는데 혹시 물을 채울 수 있을까요?

- 그럼. 이쪽으로 들어오렴.

문 입구 옆 작은 부엌 안 식탁에는 식빵 양쪽 끝 조각이 놓여져 있었다. 더 나은 실패는 내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 이거 드시지 않는거면 제가 먹어도 돼요?

- 하하하. 이거 빵 끝 조각인데. 토스트 만들어줄까?

- 진짜요? 네! 진짜 감사해요!

할머니는 식빵 한 줄을 가져오셨다. 바베큐를 굽는 불판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열기가 올라오길 기다렸다. 나는 그것조차 참지 못하고 식빵 두 조각을 게걸스럽게 먹었다. 할머니께서 냉장고에서 버터와 딸기잼도 내어주셨다.

- 커피 먹을래?

- 진짜요? 네! 진짜 감사해요!

동물처럼 허기를 채운 나는 조금 더 기다려 불판에 구운 식빵에 버터와 잼을 발라 사람답게 먹기 시작했다. 커피 포트가 커피를 내리면서 작은 부엌을 커피향으로 가득 채웠다.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 가장 바삭한 토스트와 가장 풍부한 맛의 커피다. 할머니께서는 우유 갖다주셨다. 이렇게 좁은 알베르게에 이렇게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게 정말 감사했다. 나는 감사의 표시를 하고 길을 떠났다.

구름이 걷히고 밝은 빛줄기가 내리쬐기 시작했다. 올베이로아라는 지역이 나왔다. 여기에 알베르게와 바가 모여있었다. 어떤 음식도 아까 토스트와 커피보다 맛있지 않을 것이다. 아까 알베르게 할머니와 토스트와 커피로 받은 감동을 안고 계속 걸었다. 낮은 산 중턱을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멀리 어떤 아저씨와 어린 아들인 듯한 사람 둘이 걷고 있었다. 둘은 어떤 얘기를 하면서 가고 있을까? 리투아니아 아주머니와 두 아이들이 생각나면서 이 아이들은 강하게 크겠다 생각했다.

피스테라 - 묵시아 분기점을 알리는 돌기둥이 나란히 서있었다. 여기부터 약 30km 왼쪽으로 가면 피스테레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가면 묵시아가 나온다. 나는 왼쪽으로 갔다.

걷다보니 쎄라는 마을이 나온다. 누가 이 해변 마을이 좋아서 하루 숙박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배들이 정박한 작은 항구마을이라 이뻐보이지 않았다. 나쁜 곳은 아닌데 북쪽길을 걸으면서 아름다운 해안을 많이 봐서 눈이 높아졌나보다. 마트에 들려 비상식량을 샀다.

바다 마을을 지나 다시 숲 길이다. 다음 보이는 바다가 아마 피스테레일 것이다. 언제쯤 나올까. U자로 파인 숲 길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U자 언덕 양쪽 위에 나열된 진초록 색의 나무들이 흐드러진 가지가 하늘을 막고 있었다. 계속 걷자 나무 가지 사이로 중간에 하늘색 열쇠 모양이 생겼다. 설마. 조금 더 다가갔다. 설마. 피스테레다. 갈매기가 날아다니고 파도 소리가 들렸다. 울컥했다. 피스테레에 도착한 것이다.

피스테레 입구에 있는 해변에서 사람들은 썬탠을 하고 수영을 하고 즐기고 있었다. 입구 해변에서 시내까지 들어가는 것도 한참이었다. 시끌벅적한 시내에 도착했다.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 안녕하세요. 운이 좋으시네요. 마지막으로 침대 하나가 남았어요. 저녁에 피스테레 절벽에 일몰 보러 가실거죠? 낮에 날씨가 맑아서 일몰이 정말 예쁠거예요!

일몰은 저녁 10시 15분이라고 했다. 샤워와 빨래를 하며 느긋하게 있었는데 벌써 해가 질 시간이다. 등산화가 지겨워 슬리퍼를 신고 절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멀었다. 차도로 걸어서 슬리퍼에 흙이 들어갈 일은 없었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속도를 냈다. 내가 걷는 쪽은 짙은 안개가 껴서 수묵화같았다. 

절벽에 도착하니 때마침 태양이 하늘을 완전연소하고 있다. 그 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흔히 보는 로맨틱하게 퍼지는 빛이 아니라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이다. 시뻘건 용암이 구름과 하늘을 완전연소했다. 내 지난 과거도 그 용암에  불태워 보냈다. 활활 타올라라! 다 태워 없어져라! 사람이 죽기 직전에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슬라이드쇼처럼 보인다고 한다. 내 지난 사건들이 눈 앞에 지나갔다. 산티아고에 도착할 때보다 비교가 되지 않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렀다. 다 태워버렸으니 다시 0부터 시작하면 된다. 무겁게 들고다녔던 마음의 짐을 여기서 완전연소했다. 온 몸이 불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같았다.

절벽 맞은 편 등대 앞으로 걸어갔다. 표지판 역할을 하는 돌기둥이 여기가 0,000km이라고 알렸다. 0이란 숫자는 신비하다. 모든 것이 끝나는 점이자 모든 것이 시작되는 점이다. 돌기둥 위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인생의 초기화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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