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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Oct 01. 2022

[산티아고 순례길] 묵시아 29


나 많이 컸다. 이제 어두운 길도, 길 잃는 것도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다. 해가 지는 것을 피스테레 절벽에서 보고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가려고 하니 사방이 숯처럼 깜깜했다. 예전같으면 또 허공에 대고 욕을 했겠지만 이제는 그냥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올라왔던 차도를 따라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내려갔다. 차도까지는 길이 하나라 수월했는데 마을을 들어서자 골목이 많아 헷갈렸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어 결국 알베르게에 찾아들어갔다.


순례자 사무실에서 피스테레 도장과 증명서를 받아야했기 때문에 여유로운 아침을 보냈다. 사무실이 여는 시간이 오전 10시 30분이라 공용 주방에서 아침을 먹으며 다른 순례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순례자 사무실에서 피스테레 증명서와 도장을 받았다. 이제 도장이 한 칸 남았다. 묵시아 도장을 받을 칸이다.

스페인 여행 마지막 날이다. 피스테레 해변을 뒤로 하고 뒷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참 걷는데 뒤에서 키 큰 그림자가 지나가며 말을 걸어왔다.

- 안녕. 혹시 묵시아로 가니?

- 응. 너도 묵시아로 가니?

- 응. 내가 듣기론 묵시아 - 피스테레 가는 길보다 피스테레 - 묵시아 가는 길이 더 어렵데. 준비됐니? 하하하.

- 어쩔 수 없지 뭐. 그냥 걸어야지 뭐.

내가 한 시크한 대답에 내가 놀랐다. 예전같으면 내가 바보다, 더 알아봤어야 했다, 괜히 피스테레부터 왔다. 묵시아까지 어떻게 가냐, 히스테리를 부렸을 것이다. 그런데 힘든 프리모티보길을 이미 걸었으니 피니스테레길 쯤이야 걸을 수 있을 것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 너는 어디서 왔니?

- 나는 네덜란드에서 왔어.

- 까미노는 왜 하는거니?

- 여자친구가 몇 년 전에 까미노를 하고 추천을 했어. 몇 년이 지났는데 이제야 걷네. 지금은 헤어졌어.

- 까미노 하고 나서 뭔가 깨닫고 헤어진 것 아니니? 하하하.

- 그건 아니고, 여자친구랑 딸이 있는데 내가 변하지 않는다고 그럴 바에 자기가 혼자 키우겠데.

- 혼자 아이를 키우겠다니 엄청난 결심이다.

- 나는 딸 옆에서 아빠 역할을 하고 싶은데 전 여자친구가 싫다고 하니 답답해.

노아는 딸에 대한 미안함과 전 여자친구에 대한 화가 있는 것같았다. 까미노를 하면서 바뀐 게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봤다.

- 노아야, 까미노 해보니까 어때?

- 조금 실망스러웠어. 내가 갖고 있던 화두가 있었거든. 근데 답을 찾지 못했어.

- 화두가 뭐였는데?

- 나는 누구인가.

- 그건 스님들이 평생 갖고 가는 화두인데 어떻게 그걸 한 달만에 찾니. 하하하.

- 그것 말고도 딸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 어떻게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는가? 등이 있는데 아직도 모르겠어.

- 나도 잘은 모르는데 결국 자기 부모가 키운대로 자기 자식을 키우게 된데.

- 우리 부모님은 나 키우는거 망했는데? 하하하. 부모님은 자신들이 아는 게 정답인줄 알아. 본인들이 생각하는 최선이 진짜 나를 위한 최선이 아닌데 그걸 착각해. 부모님이 내 인생을 진짜 망쳤어.

노아는 부모님에 대한 원망도 많은 것같았다. 뿐만이 아니었다. 친구들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싶어했고, 사는 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른 나라로 가고 싶어했다. 완전연소시킨 과거의 나를 딱 보는 것같았다. 뒤늦게 알았지만 나는 어려움이 생기면 도망쳤었다.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헤어지고 다른 친구를 만났고, 회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회사를 다녔고, 현실이 싫으면 책을 보거나 여행을 갔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책과 여행은 도피처였다. 하지만 여전히 예전과 같은 이유로 새 친구와 헤어졌고, 같은 이유로 새 회사에서 퇴사했고, 책을 완독하고 여행이 끝나면 같은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문제는 나였다. 내가 바뀌어야 내 주변이 바뀐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 자꾸 회피하지 말고, 도망치지 말고, 너를 직시하고 인정해야 바뀌는 거야!

노아에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어쭙잖은 조언이 잔소리같아 속으로 삼켰다. 나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판에 너나 잘하세요 라는 말이 맴돌았다. 사실 노아도 알고 있을 것이다. 실천이 어려울 것이다. 나나 잘하자.

웃음이 났다. 지금까지 누굴 만나도 내가 제일 부정적인 사람인데 어쩌다 나보다 부정적인 사람을 만났다. 내가 변한건지 걔가 변하지 않은건지 모르겠다. 내가 강하게 긍정적인 사람이었다면 긍정 기운을 퍼트렸을텐데 나는 이제 막 긍정적으로 변하는 단계라 혹시나 부정 기운이 전염이 될까 먼저 노아를 보냈다.

산을 넘고 들판을 지났다. 멀리 해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묵시아다. 알베르게를 찾았다.

- 안녕하세요. 혹시 침대 하나 있나요?

- 하하하. 스페인어 잘 하네. 침대 하나 말고 몇 십 개 있어. 하하하.

짐을 놓고 인자해보이는 주인 아저씨에게 질문했다.

- 여기 특산물이 문어라고 들었어요. 제가 아직 문어 요리를 먹지 못했는데 어느 식당이 문어가 맛있나요?

- 아직도 문어 요리를 못 먹어봤어? 지도에 표시해줄게. 여기, 여기, 여기, 여기 괜찮아.

- 한 끼만 먹을건데 그 중 문어 요리가 제일 맛있는 제일 저렴한 집을 알려주세요.

- 제일 저렴하고 제일 맛있는 문어 요리는 문어를 사서 직접 요리해 먹는 거지. 식당에 가봤자 문어는 조금밖에 주지 않아.

- 아 그럼 마트가 어디 있나요?

- 그러고보니 냉장고에 문어 한 마리가 있어. 부엌에서 요리하는 순례자도 있어. 빠에야랑 같이 요리해서 같이 나눠 먹으면 되겠다. 

- 진짜요? 좋은 생각이에요!

- 주방으로 가자.

뜻밖에 현지인의 집밥 문어를 먹게 됐다. 아직 다른 사람들은 없고 아저씨가 주방에서 문어, 감자, 마늘 양파, 계란을 꺼냈다. 오늘 잡은 문어라며 싱싱하다고 자랑했다. 내가 맡은 일은 감자껍질을 벗기는 것이다. 아저씨는 문어를 익숙한 듯 손질했다. 감자를 찹찹찹 잘라서 계란, 양파, 마늘에 담궈 섞었다. 후라이팬 불을 달구고 파에야 재료를 올렸다. 일반 식당에서 파는 파에야와 달리 감자가 큼직큼직하고 계란옷도 두꺼워서 노릇노릇 구운파에야가 먹음직해 보였다. 아저씨는 요리하다 말고 와인을 권했다. 싫어하는 요리 시간도 즐거워졌다. 물컵에 와인을 한 잔하고 파에야를 피자처럼 잘랐다. 아저씨는 문어를 끓는 물에 푹 삶았다. 소금을 약간 쳤다. 중간에 잘 익었는지 확인을 하시더니 됐다!를 외치고 문어를 건져 올렸다. 문어를 한 입에 쏙 넣기 좋은 크기로 잘라 접시에 담았다. 탱글탱글해보이는 문어 한 마리를 보고 너무 신나 빨리 먹고 싶었다. 

빠에야와 삶은 문어를 식탁에 올렸다. 와인 한 병과 와인잔 2잔을 갖고 오셨다. 어느 비싼 식당보다 융숭한 서비스와 높은 질의 음식이었다. 문어는 적당히 쫄깃쫄깃했다. 간도 딱 적당했다. 두꺼운 빠에야를 입어 넣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감자가 부드럽게 씹혔다. 지금까지 먹은 빠에야는 빠에야 흉내를 낸 것이었다. 와인은 말할 것도 없이 훌륭했다. 

- 사장님 이거 뭐예요!

- 우리는 식당에서 먹었는데 이쁘다고 요리까지 해주는 건 손님을 차별하는 거 아닌가요!

다른 순례자들이 농담을 하며 음식을 맛보았다. 지난 한 달 동안 먹은 음식 중 가장 맛있는 별미였다. 수다를 떨다보니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묵시아 일출도 예쁘다고 들었다. 놓치면 안되는데!

- 걸어가기엔 너무 늦었는데. 내 오토바이 타고 갈래?

지금까지 오토바이는 커녕 스쿠터도 타본 적이 없었다. 

- 좋아요!

내가 말하는건지 와인이 말하는건지 나는 아저씨 오토바이 뒤에 올라타고 헬멧을 썼다. 어제 피스테레에서 본 일몰은 용암이 모든 것을 완전 연소하는 느낌이었는데, 오늘 묵시아에서 보는 일몰은 아기 담요가 모든 것을 연핑크색, 연하늘색으로 물들이는 느낌이었다. 

- 해변을 달릴까?

- 좋아요!

이건 분명히 와인이 말하는거다. 아저씨는 속도를 올려 긴 평지의 해변을 달렸다. 멀리 노을이 지고 있었다. 헬멧을 써서 시원함은 느낄 수 없었지만 빠른 속도에서 올라오는 쾌감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 야호오옥억!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헬멧을 써서 그 소리가 내 귀로 들어와 아파 관뒀다. 손을 놓고 만세를 부르고 싶었지만 이 속도에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완전히 어둠이 덮이고 마을에 불빛이 들어왔다. 오토바이를 타고 알베르게에 돌아왔다. 아저씨가 레몬 진토닉을 권했다.

- 묵시아에 하루 더 있을래?

- 하하하. 내일은 산티아고로 다시 돌아가야 해요.

나는 진토닉을 들고 내 벙커칸으로 왔다. 아저씨가 20살은 더 젊었으면 함께 진토닉을 마실 수 있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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