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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Sep 24. 2022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26

전혀 눈물나지 않았다. 전혀 아쉽지 않았다. 왔구나 하고 담담했다. 빨리 해치우고 싶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자 사무실에 도착해 그 동안 갔던 성당이나 알베르게마다 도장을 받은 순례자 여권을 보여주고 증명서를 받았다. 

● 총 거리: 802km

● 루트: 북쪽길 및 프리미티보길

● 출발지: 이룬

● 출발일: 2019년 6월 6일

● 도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 도착일: 2019년 7월 1일

- 저는 오비에도에서 북쪽길에서 프리모티보길로 바꿨어요. 802km가 확실해요?

- 네 확실해요. 호호호.

1km라도 고생한 모든 거리를 인정받고싶어 확인한 후 증명서를 받고 알베르게에 갔다. 시간 여유가 있어 토마토 소스 리가토니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대성당, 쇼핑몰이 있었지만 동네 한 바퀴만 돌고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것 자체는 아무 감흥이 없었다.

반면, 산티아고까지 오는 길에 감칠맛 나는 일이 있었다. 

아침에 숲에서 산토끼를 만났다. 회갈색 토끼였다. 토끼를 먹었다는 게 아니다.

한 노부부를 만났다. 두 분이 노랑색과 파랑색으로 색상을 맞춰 입으셨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 부랑자 옷차림인 순례자들 사이에서  패션 센스가 단연 돋보였다.

- 안녕! 너는 어디서 왔니?

- 한국이요. 두 분은 어디서 오셨어요? 

- 아내는 우크라이나, 나는 독일 출신이야. 지금은 프랑크푸르트에 살아.

- 프랑크푸르트는 다른 도시 경유할 때 잠깐 가봤어요. 서울 가보셨어요?

- 그럼 가봤지! 2002년 월드컵 때 갔어! 아 독일이 결승전까지 갔었는데!

- 와 한창 뜨거울 때 오셨네요.

- 그 때 한국 잘했어. 허허허.

- 하하하. 근데 두 분 패션이 멋지네요!

- 아내가 우크라이나 출신이다보니 우크라이나 국기 색으로 깔맞춤을 했어. 허허허.

우크라이나 국기는 상단이 파란색, 하단이 노란색인 2색기였다. 나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 너는 까미노를 왜 하니?

- 인생을 바꾸고 싶어서요.

- 오늘 산티아고까지 가니?

- 네. 드디어 끝나네요.

- 얼마나 걸렸니?

- 오늘이 26일째예요.

- 와 정말 빨리 걸었구나. 아내와 나는 천천히 걷는다. 허허허.

- 두 분이 같이 걷는 모습이 좋아보여요. 두 분은 까미노 왜 하세요?

- 작년에 일부 구간을 걸었어. 올해는 이어서 조금 더 가는거야.

- 두 분이 함께 걸으니까 어때요?

- 좋지 뭐. 허허허. 너는 남자친구 있니?

- 네 한국에 있어요. 근데 어떻게 될지 몰라요. 하하하.

- 왜?

- 걸으면서 사람들이랑 말해보니까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어요. 할아버지는 할머니 만날 때 이 사람이다! 하는 확신이 있었어요?

- 있으니까 결혼을 했지. 허허허.

-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 둘 다 서로 만나기 전에 다른 사람이랑 결혼을 했었어. 그런데 둘 다 이혼을 했지. 나는 다시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다짐했어. 그러다 율리아를 만났는데 첫 눈에 반했어. 정말 아름다웠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어. 허허허.

피터 할아버지와 율리아 할머니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갑자기 뽀뽀를 하셨다. 순간 당황했다.

- 율리아도 이혼을 하고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데. 둘 다 자신들도 모르게 사랑에 빠진거야. 그래서 몇 달만에 결혼을 했어. 사랑은 그런거야. 허허허.

- 하하하. 믿기 힘드네요...

- 처음에는 나는 독일에, 율리아는 우크라이나에 있었어. 떨어져 있을 때 내가 율리아에게 보낸 편지가 있어. 어느 시인이 쓴 시를 썼는데… 뭐였더라…

- 나중에 꼭 알려주세요!

- 그래. 허허허.

어린 커플의 불꽃같은 사랑도 좋지만 노부부의 모닥불같은 사랑이 더 뭉클하다. 

- 근데 이혼하고 나서 왜 다시 사랑하지 않을꺼라고 다짐했어요?

- 아니 결혼을 절대 하지 않을꺼라고 다짐했지 사랑은 다시 할꺼라고 확신했어. 허허허.

- 두 개가 다르군요. 하하하.

- 그렇지. 허허허. 너는 나보다 훨씬 젊으니까 사랑이든 결혼이든 할 기회가 충분하다. 허허허.

- 하하하. 저는 이 사람이다! 하고 확신하는 게 신기해요.

- 확신이 없으면 결혼하는 것에 대해 잘 생각해보길 바란다. 확신은 확신이 들 때 알아. 허허허.

내가 확신했다가 틀렸던 많은 경우가 생각났다. 편견, 선입견, 착각, 오해...

- 할아버지는 후회하는 게 뭐예요?

- 일을 덜 하고 나에 대해 더 알아갔으면 좋았을거야. 

- 할머니는 가장 후회되는 게 뭐예요?

피터 할아버지는 영어가 편하지 않은 할머니의 말씀을 통역해주셨다.

- 없어.

- 왜 없어요? 실수하거나 실패한 적 없어요?

- 많지. 많이 실수하고 실패했어.

- 근데 후회하지 않아요?

- 후회하지 않아.

- 왜요?

- 그런 실수와 실패를 했으니까 지금의 내가 있는 거잖아.

- 그럼 처음 결혼한 걸 후회하지 않아요? 이혼한 걸 후회한 적은 없어요? 피터 할아버지를 더 빨리 만났으면 좋았을 거라고 후회하지 않아요?

- 그렇지는 않아. 그 때는 그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에 결혼했어. 결혼하고 나서야 서로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 그래서 이혼한거야. 근데 그건 결혼하지 않았다면 모르는 거잖아. 그 당시에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했고, 그 당시에 행복하기 위해서 이혼했어. 두 결정 모두 행복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야. 결혼을 했고, 이혼을 했으니까 지금 이렇게 왕자님같은 피터를 만난거지. 

피터 할아버지와 율리아 할머니는 서로 눈빛으로 하트를 보내더니 다시 한 번 뽀뽀를 하셨다. 정말 사랑스러운 노부부다.

- 과거 결정들이 지금이랑 다 이어져 있어. 그래서 과거 결정들을 후회하지 않아. 그 결정을 했으니까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거잖아.

피터 할아버지는 율리아 할머니께 보냈다는 그 시를 찾아 나중에 나에게 알려주셨다. 에리히 프리트(Erich Fried) 시다.

Was es ist


Es ist Unsinn

sagt die Vernunft

Es ist was es ist

sagt die Liebe


Es is Unglück

sagt die Berechnung

Es ist nichts als Schmerz

sagt die Angst

Es ist aussichtslos

sagt die Einsicht

Es ist was es ist

sagt die Liebe

Es ist lächerlich 

sagt der Stolz

Es ist leichtsinnig

sagt die Vorsicht

Es ist unmöglich

sagt die Erfahrung

Es ist was es ist

sagt die Liebe

뭐 어쩌겠어

그건 말도 안돼

이성이 말한다

뭐 어쩌겠어

사랑이 말한다

그건 재앙이야

냉정함이 말한다

그건 고통 밖에 없는거야

두려움이 말한다

그건 미래가 없어

직관이 말한다

뭐 어쩌겠어

사랑이 말한다

그건 말도 안돼

자존심이 말한다

그건 바보같은 짓이야

신중함이 말한다

그건 불가능해

경험이 말한다

뭐 어쩌겠어

사랑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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