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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Apr 21. 2023

[설레는 시 필사] 19. 그 방을 생각하며, 김수영

그 방을 생각하며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담뱃진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풍성하다






* 적응하는 것이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속으로는 욕해도 겉으로는 방만 바꾸며 경쟁하고, 배제하고, 억압하는 현실에 적응해왔다. 

** 아름다움이란 말의 연원이 앎이라고 한다. 임의적인 기준에서 탈락되고, 소외되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아름답지 않아 보였던 이유는 내가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관심조차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혁명은 커녕 변화조차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나는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므로,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풍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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