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북부 여행을 하던 당시 게르니카 근처를 지났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마을 외벽에 타일로 만든 작품이 있었는데 당시 나는 스페인 내전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알고보니 스페인과 한국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내전과 독재의 역사다. 그리고 이 책은 프랑코 장군의 독재 36년(1939-1975) 이전에 있었던 스페인 내전(1936-1939)에 오웰이 직접 참전해 목격한 경험을 쓴 르포르타주이다. 옆에 있는 친구 싸움에도 관여하고 싶지 않을 수 있는데 왜 영국인 오웰은 옆 나라 스페인까지 가서 목숨을 내놓았을까.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싸우러 왔다”라고 오웰은 답했다.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가 격돌한 냉전시기(1947-1991) 전에 나치즘과 파시즘 대 반나치즘과 반파시즘이 있었던 제2차세계대전(1939-1945)이 있었고, 그 예고편이 바로 스페인 내전(1936-1939)이었다.
반파시즘을 위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오웰
오웰의 계획은 파시즘 군인 1명을 죽이는 것이었다. 각각 1명씩 죽이면 결국 반파시즘이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파시즘은 프랑코 장군의 지휘 하에 체계적인 전술과 독일 히틀러와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군사 무기를 지원받고 있었다. 반면 반파시즘을 주창하던 세력은 소련 무기를 지원 받았지만 독일 무기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기술이 떨어졌고, 공화파 및 국제의용 군인들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다. 오웰은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트로츠키파로 의심받고 조사받기도 한다. 너랑 너는 같은 편 아니야? 왜 같은 편끼리 싸워? 이 르포르타주를 읽으면서 헷갈렸던게 반파시즘이 파시즘에 함께 대항해도 이길까말까한데 반파시즘 세력끼리 그 안에서 다투는 것이었다. 프랑코 장군의 파시즘이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대상인 공화주의 정부를 지지하는 세력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로 분열돼있었다. 그리고 국제의용군도 있었는데 오웰은 그 중 하나인 영국군이었다. 하지만 오웰은 파시즘 군인은 구경도 못하고 계속해서 “보초 서기와 참호전 파기”의 반복 작업만 할 뿐이었다. 총을 쓸일도 거의 없었지만 총은 대부분 20년 이상 되서 부식하거나, 제대로 쏠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었으며, 제대로 쏘더라도 불발되거나, 엉뚱한데로 날아가기 일쑤였다. 적으로부터 당한 총격보다 총을 작동하다 스스로 부상당하는 횟수가 많았다고 한다.
전투하는 시간이 거의 없다보니 오웰은 전사하는 두려움보다 더 큰 공포가 있었다. 바로 굶주림, 추위 그리고 위생 문제다. 기본적으로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야 하는데 그게 충족되지 않았다. “버터 바른 빵”이 무엇보다 더 효과적인 설득 방법이었다. 쥐와 이가 득실거리는 막사에서 생활하는 장면을 보면서 이건 파시즘과의 전쟁이 아니라 기본적인 생존과의 전쟁이라는 게 느껴졌다. 오웰은 특유의 비꼼을 통해 좋게 말하면 여유 있는, 나쁘게 말하면 정확하지 않는 스페인의 mañana (내일) 문화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총을 쏴도 맞지도 않고, 기차는 정해진 시간에 오지 않고, 업무는 비효율적이었다. 대신 공화군에 속하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군인들은 어찌나 다 정이 넘치는지 담배 1대를 달라고 하면 1갑을 준다. 명령도 위계질서가 아닌 수평질서이기 때문에 신병이 장군을 툭 치면서 담배 있어요? 라고 묻는다. 신병과 장군은 편의상 이름이고 실질적으로 계급이 없어 똑같은 급여를 받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는다. 이념적으로 인간의 평등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학대가 없는 것은 물론 탈영병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교실에서는 교사와 학생들 간의 위계질서가 있고, 평등한 학생들끼리조차 서로 서열을 잡으려고하는데 군대에서 게다가 전쟁 중에 이 런 일이 가능할까?
일상 속 영웅
오웰은 실제 목구멍에 총상을 입는데 극적으로 목숨을 구하고, 진짜 영웅은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 - 담배 2갑 - 을 갖다준 친구라고 한다. 거대한 이념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옆에 있는 그 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이 진짜 영웅이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혹시 일상에서 영웅적인 행동을 한 적이 있나요?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신고를 했다거나, 약한 사람을 위해 대신 발언했던 경험? 이 질문을 듣자마자 비겁했던 일 3가지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때 교사라는 사람이 같은 반 학생의 뺨을 때렸다. 교사 말에 대해 말대꾸도 하지 못하고 책을 책상 위에 쾅 치며 내려놨다는 이유로 학생을 교실 뒤로 불렀다. 그리고 찰싹! 소리가 들리는데 내 귀가 윙윙거리고 교실 중간에 서있던 아이는 반대편 벽 앞까지 날아가다 바닥에 쓰러졌고 안경도 날아가 깨졌다. 나로서는 이런 폭력은 상상조차 할 수 없어 아악!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입만 벌린 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지금이야 신고를 하는 시기지만 그 당시 나를 포함한 모든 아이들은 충격과 공포로 숨을 죽였다. 신고는 하지 못하더라도 때리지 마세요! 라고 왜 소리치지 못했을까. 아직도 마음에 앙금처럼 남았다.
두 번째 사건은 대학생 때다. 길거리에서 한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멀리서 여자 1명이 남자 5-6명에 둘러쌓여있는 듯 보였다. 내가 지금 성폭행 장면을 목격하는건가? 가까이 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고 경찰에 신고하고 싶었지만 범죄인지 확신이 없었다. 어두운 밤이었고, 멀리 있었고, 장난치고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범죄인 경우 경찰 조서 작성에 내가 증인으로 기록되면 혹시 가해자가 나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가 두려웠다. 그냥 가자 - 아니야 구해줘야해 - 아냐 길거리에서 그럴 리가 없어 - 이러면서 그 길거리를 몇 번 왔다갔다 하다가 결국 지나치고 걸었다.
세 번째는 직장인 때 다른 주제로 토론을 하다가 잠시 위안부 얘기가 나왔을 때다. 나와 비슷한 또래였던 한 남성이 위안부는 “자발적인 성매매”였다고 주장하는데 나는 어이가 없어 화가 치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는 것이 없어 반박할 수가 없었다. 너무 아픈 역사라 나조차 외면하고 있었다. 내가 내가 스페인 역사는 이렇게 배우면서 한국 역사에 대해 이렇게 몰라도 되나? 위안부 할머님들께 정말 너무 죄송했다. 하지만 지금도 정보를 찾기는 커녕 위안부 관련 영화조차 보지 못하고 있다. 내 역사를 직시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대단한 영웅이라는 게 따로 있을까. 1명이라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면 그게 영웅 아닐까.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우는 위인 1명보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 1명에게 필요한 것을 챙겨주는 일상 속 영웅들이 있다면 그 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피카소는 “이 게르니카 그림을 당신이 그렸습니까?”라는 한 파시스트의 질문에 “이 그림을 그린 건 당신이지”라고 답했다고 한다. 파시즘이 승세로 가기 전 공화군이 점령했던 카탈로니아 지역에서 싸웠던 오웰은 ‘카탈로니아 찬가'를 남기고, 파시즘을 지원하던 독일 나치가 게르니카 동네를 융단폭격한 후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남기는 것을 보면서 역사를 예술로 승화한 이 예술가들도 영웅인 것같다. 우리는 일상에서 서로의 영웅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