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잠잠해지면 해외여행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아무리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이더라도 인간은 이동하는 특징을 지닌 호모 노마드 homo nomad이기 때문이다. 이 책 역시 그렇게 움직이는 인간, 방랑자들에 대한 것이다.
이 책은 단편소설, 장편소설, 에세이, 철학서 모두에 해당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약 백편의 이야기가 모두 단절되어있기도 하고, 연결되어있기도 하다. 형식과 내용 모두 기존의 것을 파괴했다. 보존된 내용이 있다면 기억하고 싶고 기억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다. 작가는 방부처리된 인체 보존 박물관을 여러차례 방문한다. 그 곳에는 시체가 해체되어 뼈, 근육, 내장 등이 전시되고 있다. 한 곳에 머무는 것은 시체가 할 일이다. 산 사람은 움직이고 이동해야 한다.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에게 요제피네 졸리만이 보낸 서신
요제피네 졸리만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에게 서신을 보낸다. 요제피네의 아버지는 프란츠 1세의 숙부 요제프 2세의 신하였다. 그는 18세기 초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나 갓난아이 때 함선 화물칸에 실려 유럽으로 노예로 팔려갔다가 황실의 충복이 됐다. 하지만 사망 후 화학약품으로 방부 처리되고 박제되어 ‘호기심의 방’에 놓여 관람객에게 전시되고 있었다. 요제피네는 인간은 본디 평등한데 검은 피부 때문에 마치 야생동물처럼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은 인간의 명예와 품위를 송두리째 빼앗기는 것과 같다며 시신 반환해줄 것을 촉구한다. 황제의 회신이 없자 장례 관습을 따를 기회조차 박탈한 황제를 비판하며 계속 서신을 보낸다.
쇼팽의 심장
폴란드와 한국의 역사는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간섭은 물론 지배받은 점에서 비슷하다. 18세기 말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폴란드를 분할 점령해 공국을 세운 것이 19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쇼팽은 폴란드의 대표적 작곡가이다. 그는 살아있을 때 늘 입버릇처럼 조국의 땅, 폴란드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다. 쇼팽이 프랑스에서 사망하자마자 그의 손에 기름을 부어지고 석고를 부어 본을 뜨고, 얼굴도 남기기 위해 데스마스크를 만든다. 그리고 의사는 흉곽을 열고 심장을 꺼낸다. 쇼팽의 누이 루드비카는 오빠의 심장을 치마 틀 속에 꽉 묶어 마차를 타고 공국 국경을 넘어야 했다. 프로이센 헌병대가 폴란드의 독립 의지를 일깨우는 물품을 조사하기 때문이다. 쇼팽의 심장은 그렇게 바르샤바로 돌아왔다.
방랑자들
아누슈카는 선천적으로 마비된 아들과 말 수가 없는 남편과 산다. 일주일에 한 번 시어머니가 와서 아누슈카는 외출을 할 수 있는데 하루는 지하철 역사에서 옷을 겹겹이 입고 욕설을 내뱉는 노파에게 인사를 건넨다. 한 청년과 말을 탄 여성도 보인다. 아누슈카는 아들 또래인 청년을 보며 아들도 그처럼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여성이 말을 채찍으로 내려치자 갑자기 이성을 잃은 아누슈카는 여자에게 주먹을 휘둘러 경찰에게 끌려간다. 함께 잡혀간 노파는 미친 사람처럼 아누슈카에게 계속 중얼거린다. 몸을 흔들고, 움직여! 걷고, 뛰고, 도망쳐! 정지 상태에 있고, 꼼짝하지 않고,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모든 것은 지배를 받아! 멈추는 순간 너의 찬란한 영혼은 평범하게 바뀌는 거야! 그러면 뭘 살지, 뭘 팔지, 어디가 싼지, 어디가 비싼지, 이런 사소한 것에 전전긍긍하게 돼! 멈추는 자는 화석이 되고 정지하는 자는 곤충처럼 박제될 것이야! 권력은 하루하루 반복되는 질서, 기관, 시설, 도장, 위계질서, 서열, 등급, 계급, 숫자, 할인, 마일리지, 수집, 바코드로 세상을 속박하고 생각을 지배하고 있어! 움직이며 계속 가고 떠나는 자에게 축복이 있을 것이야!
이 책은 인체 해부와 영구 보존에 대해 상당량 할애하고 있어 처음에 의아했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걸까. 하지만 이제 알 듯하다. 인체만큼 삶의 유한성을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작가는 불교에서 말하는 생로병사도 인용한다. 작가는 불멸을 꿈꾸지 말고, 죽어서 영구 박제되길 바라지 말고, 살아있는 동안 펄떡이는 심장으로 경계 너머 여행하고, 방랑하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인체는 유한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인생은 필멸하기 때문에 소중하다. 정체된 것은 죽은 것이다. 살아있는 한 생생하게 몸과 마음을 흔들고, 움직여야겠다. 오늘 하루도, 인생 전체도 일종의 여행이다. 방랑해도 괜찮아. 살아있다는 증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