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신
무신론자이지만 가끔 내 운명이 궁금할 때가 있다. 특히 힘들 때 그렇다.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극복하고 계속 밀고나가라는건지, 이 문은 닫혔고 다른 문이 열려있으니 길을 바꾸라는 게 하늘의 뜻인지 모르겠다. 하늘의 뜻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해석하는 것은 내 마음이라 그게 정확할지도 의문이다. 나는 정말 내 미래가 알고 싶다. 현대에는 인연은 만드는 것이고,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인간이 고민이 많아지고 할 일도 많아진다. 하지만 이미 정해진 운명이 있다면 어떠한 나쁜 일이 일어나도 그게 체념이든 수용이든 마음 편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같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했을까?
기원전 8세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가 전쟁을 했다. 트로이의 파리스는 아름다운 헬레네를 그리스에서 데려왔는데, 알고보니 그리스 메넬라오스의 아내다. 메넬라오스의 형 아가멤논는 아킬레우스 등과 함께 그리스 연합군을 꾸려 트로이를 진격한다. 트로이 경우 파리스는 막상 전쟁에 관심이 없고 그의 형 헥토르가 군을 이끈다. ‘일리아스’는 이미 약 10년이 흐른 트로이 전쟁의 막바지 50일을 그린 대서사시이다.
이 책의 재미는 인간 세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신들의 존재이다. 신의 왕 제우스와 신의 여왕이자 그의 아내 헤라, 제우스가 낳은 다음 세대 신들 - 지혜의 신 아테네, 의술의 신 아폴론, 전쟁의 신 아레스, 미의 신 아프로디테 등 - 이 등장한다. 이 신들은 중세시대 인간이 복종하는 권위있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 대들기도 하는 친근한 신이다. 예컨대:
의술의 신 아폴론은 아가멤논이 자신의 사제의 딸을 데려가자 진노해서 그리스에 “무서운 역병을 보낸다”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을 죽이려고 할 때 지혜의 신 아테네는 아킬레우스의 “금발을 잡아당긴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는 아들이 아군 아가멤논 때문에 명예를 잃게 됐다며 아들이 속한 그리스 연합군이 아닌 적군 트로이가 전략상 잠깐 이기게 해달라고 신의 왕 제우스에게 기도한다
미의 신 아프로디테가 헬레나에게 네 남편 파리스에게 가보라고 하니까 아프로디테에게 “그대나 그의 곁에 가 앉으세요" 라며 영화 ‘친구'의 “니가 가라 하와이”같은 대사를 읊으며 반항한다
그리스 연합군의 디오메데스는 미의 신 아프로디테에게 “청동을 들고 덤벼든다"
미의 신 아프로디테는 “한낱 필멸의 인간" 디오메데스가 자신을 찔렀다며 어머니 디오네에게 일러바친다
전쟁의 신 아레스는 인간으로 변장하고 트로이아인들에게 가서 그리스 연합군이 백성을 “도륙하도록 내버려둘 참이오?”라며 열심히 싸울 것을 “격려”하고 “힘과 용기를 복돋우며" 전쟁을 부추긴다
신의 왕 제우스는 인간 글라우코스의 “분별력을 빼앗아버린다”
신의 왕 제우스가 아들이자 전쟁의 신 아레스를 혼내는 장면이다. “이 배신자여! 내 곁에 앉아 징징대지 마라. 나는 올륌포스에 사는 모든 신들 중에서 네가 제일 밉다. 너는 밤낮 말다툼과 전쟁과 싸움질만 탐하니 말이다. 정말이지 네 어미 헤라야말로 참을성 없고 굽힐 줄 모르지. 나도 그녀를 간신히 말로 제어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네가 당하는 이런 고통도 필시 그녀가 부추긴 탓이리라.” 이건 현대사회에서도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놈의 시키! 맨날 쌈박질이나 하고 말이야! 지 어미를 닮아가지고말이야!” 하는 말과 비슷해 1-6권 내용 중 제일 웃겼다.
왜 ‘일리아스’에서는 여러 신들이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 활발하게 개입하고 있는걸까? 신들이 등장하는 장면을 보면 보통 인간이 고민하는 장면이다.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을) 죽일까 말까? (헬레나가 남편 파리스에게) 갈까 말까? 고민하는 장면에서 지혜의 신 아테네와 미의 신 아프로디테가 나온다. 혹시 신을 이용해 인간의 마음을 대표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화가 나서 죽이고 싶지만 그러면 안되고 참아야 한다는 감정(아테네)도 들고, 남편이 실망스럽지만 사랑하는 감정(아프로디테), 즉 내적 갈등을 신을 통해 보여준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감정을 의인화한 것처럼, ‘일리아스'는 이 감정을 신격화해 이해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가끔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바보같은 선택을 한 것에 대해 분별력을 잃었다고 하지 않고 제우스가 분별력을 빼앗았다고 표현한다. 우리말에도 있는 ‘귀신이 씌였다', ‘지름신이 강림했다'과 유사한 듯하다. 이해되지 않은 역병도 신 아폴론이 천벌을 주었다고 한다. 신은 인간의 마음과 세상을 이해하려는 고대 그리스 당시 심리학과 병리학일 수도 있다.
인간과 자연
이 외에 전쟁과 군사들의 열병을 자연에 비유한 점도 인상적이었다. 예컨대:
거위나 학이나 목이 긴 백조따위의 깃털달린 날짐승의 큰 무리가 […] 요란하게 소리지르며 […] 사람의 발과 말발굽 아래 대지가 무섭게 울렸다
그 수가 제철 만난 나뭇잎과 꽃봉오리만큼이나 많았다
봄철에 우유가 통들을 적실 때면 수많은 파리 떼가 새까맣게 무리 지어 목자의 외양간 주위로 쉴 새 없이 날아다니듯 […] 들판에 버티고 섰다
잘 흩어지는 염소 떼가 목장에서 서로 뒤섞여도 염소치기들이 쉽사리 이들을 가려내는 것처럼, 꼭 그렇게 지휘자들은 전투에 들어가기 위해 그들을 여기저기서따로 나누어 정렬시켰다
마치 서풍에 고개를 들기 시작한 바다의 파도가 메아리치는 해안으로 잇달아 밀어닥칠 때와 같이, 파도는 […] 부서지며 벽력 같은 소리를 내는가 하면 암벽들 위로 호를 그리며 높이 솟구치며 짠 거품을 토한다
트로이아인들은 어느 부잣집 안마당에서 흰 젖을 짜주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새끼 양들의 울음소리를 듣고는 끊임없이 매매 울어대는 수많은 암양 떼와도 같았다 [...] 여러 곳에서 불려온 자들이라 언어와 음성이 모두 같지 않고 여러 말이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영화를 보는듯 시청각 상상력을 자극하는 서사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