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7-12권에 분량이 줄었던 신들이 - 신들의 신 제우스, 질투의 신 헤라, 바다의 신 포세이돈, 전쟁의 신 아레스, 아름다움의 신 아프로디테, 잠의 신 히프노스 등 - 재등장하면서 더 흥미진진해졌다. 1-6권에서는 같은 그리스 연합군에 속하는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에게 화가 나서 트로이 전쟁에 당분간 참전하지 않는다. 7-12권에서는 아가멤논이 아킬레우스에게 사과를 해도 아킬레우스가 받아주지 않고 계속 참전하지 않아서인지, 신들의 신 제우스가 트로이편에 가까워서 그런지 다른 장수들이 열심히 싸워도 그리스 연합군은 열세에 놓여있다. 13-18권에서는 트로이의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죽임으로써 아킬레우스가 분노해 드디어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심하며 방패를 만든다.
신과 인간의 선택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등장부터 휘황찬란하다. 황금빛으로 눈이 부시다.
바다의 심연 속에 그의 궁전, 영원히 멸하지 않는 찬란한 황금 궁전이 세워져 있었다. 그곳으로 가서 그는 황금 갈기가 흘러내리는 청동 발굽의 준마 두 필을 수레에 맸다. 황금 채찍을 손에 쥐고 수레에 올라 파도 위로 몰고 나갔다. 황금 족쇄를 발에 채운 뒤 아카이오이족 진영으로 갔다 (13:21)
포세이돈은 그리스 연합군에게 사기를 드높이는 반면 전쟁의 신 아레스는 트로이 군 군기를 북돋는다.
무구들이 헥토르의 몸에 꼭 맞고 또 무서운 전쟁의 신인 아레스가 그의 몸으로 들어가니 그의 사지는 투지로 부풀어올랐다 (17:210)
그리스 연합군 편 질투의 신 헤라는 트로이 편에 가까운 신들의 신 제우스을 속이기 위해 미의 신 아프로디테의 힘을 빌려 아름답게 치장해 제우스를 유혹하고, 사랑을 나누고, 잠의 신 히프노스에게 부탁해 제우스를 잠들게 한다.
[아프로디테는] 가슴에서 다채롭게 수놓은 띠를 풀었다. 그 안에 그녀의 모든 매력이 들어 있으니 그 안에는 곧 애정과 욕망과 아무리 현명한 자의 마음도 호리는 사랑의 밀어와 설득이 들어있었다 (14:214)
그리스 신화에서 19금 장면은 이렇게 묘사된다.
그들 밑에서 신성한 대지가 이슬을 머금은 클로버며 크로커스며 히아신스 같은 싱그러운 새 풀들을 두껍고 부드럽게 돋아나게 하니 이것이 그들을 땅 위로 높이 들어올려주었다. 그 속에 그들이 누워 아름다운 황금 구름을 두르니 그 구름에서 반짝이는 이슬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14:346)
그리스 연합군 편에서는 파트로클로스와 메넬라오스, 트로이 편에서는 헥토르가 전투를 주도하다가 파트로클로스가 전사한다. 메넬라오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수습하려고 할 때, 현재로 치면 경제 활동이었던 약탈전, 즉 무구의 수거를 하고 싶은 욕망에 갈등한다.
아아 슬프도다! 내 만일 이 아름다운 무구들과 내 보상을 위해 싸우다가 여기 누워 있는 파트로클로스를 버리고 달아난다면 다나오스 백성들 중에 내 꼴은 본 자는 누구든 화를 내겠지. 그러나 불명예를 피한다고 나 혼자 헥토르와 트로이아인들에 맞서 싸운다면 혼자인 나를 다수인 그들이 포위하고 말겠지. 투구를 번쩍이는 헥토르가 이리로 모든 트로이아인들을 데려오고 있으니까. 한데 무엇 때문에 내 마음은 이런 생각을 하는거지? 어떤 사람이 하늘의 뜻을 거슬러 신이 존중하는 자와 싸우려 한다면 머지않아 그에게는 반드시 큰 재앙이 굴러떨어지겠지. 그러니 내가헥토르 앞에 물러서는 것을 보더라도 다나오스 백성들은 아무도 화내지 않겠지. 그는 신의 도움을 받으며 싸우고 있으니까. 목청 좋은 아이아스를 어디서 찾을 수만 있다면 다시 전의를 가다듬고 함께 돌격해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를 위해 시신을 끌어낼 수 있으련만 (17:90)
시신 수습과 경제 활동 중 무엇이 그리스인의 최고 가치, 즉 명예로운 일인가? 고대 그리스 때 명예는 현재와 같이 권력이나 성공이라기보다 공동체를 위한 헌신을 의미했다고 한다. 선택의 기로라는 같은 맥락에서 아킬레우스 또한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심한다.
제가 모든 전우들보다도 더, 아니 제 머리만큼이나 사랑하는 전우 파트로클로스가 죽었으니 말예요 (18:81)
이제 저는 나가겠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헥토르를 만나기 위해. 제 죽음의 운명은 제우스와 다른 불사신들께서 이루기를 원하시는 때에 언제든지 받아들이겠어요 (18:114)
아가멤논이 어마어마한 선물로 사과하고 참전을 설득하려고 해도 꿈쩍하고 있지 않다가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아킬레우스는 마음을 바꾼다. 개인의 부와 권력이 아닌 친구와의 우정, 공동체를 위한 본인의 명예가 참전의 기폭제가 될 수 있다니 감동적이다. 요즘 시대에는 친구와의 우정도, 공동체의 공익도 개인의 이익을 위해 희생시키는 일이 많은데 어쩌면 그리스 시대의 가치관이 필요한 때인 듯하다.
잔혹하고 생생한 묘사
일리아스 18권까지, 500페이지가 넘도록 다 싸우는 이야기이지만 죽음 묘사 장면은 점점 더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약 3000년 전 트로이 전쟁이니 청동 창과 방패를 썼는데 이마, 미간, 쇄골, 어깨, 배, 가슴, 팔, 손, 허벅지, 무릎이 창에 꽂히는 건 이제 뻔해서 놀랍지도 않않다. 그래서 작가는 죽음 묘사의 강도를 올린다.
창은 그의 심장에 꽂혔다. 그의 심장은 아직도 버둥대며 창대의 끝을 흔들었으나 (13:442)
청동이 그의 내장을 쏟자 (13:507)
창으로 그의 샅과 배꼽 사이를 맞히니 (13:568)
화살이 그의 오른쪽 엉덩이를 맞히니 곧장 방광을 꿰뚫은 화살이 치골 밑으로 나왔다 (13:652)
눈알을 빼버렸다. 그리하여 창이 곧장 눈을 뚫고 들어가 목덜미로 빠져나오자 (14:494)
귀밑 목을 쳤다. 그러자 칼날이 완전히 잠기며 살가죽은 지탱했으나 머리는 한쪽으로 축 늘어졌고 (16:340)
청동으로 입을 찔렀다. 그리하여 청동 창이 입 밑을 뚫고 골밑으로 나오며 흰 뼈를 박살내자 이빨들이 튕겨 나오고 그의 두 눈에는 피가 가득 고였다 (16:345)
창과 함께 횡격막도 따라 나왔다. (16:504)
상처에서 창목을 따라 피투성이가 된 뇌가 쏟아져 나왔다 (17:296)
총, 수류탄, 폭탄을 사용하며 현대전에 임하는 사람들이 비겁해보일 정도로 고대 그리스 연합군, 트로이 군은 청동 창과 칼로 코 앞에서 사람을 죽였다. 흔히 “어둠이 눈을 덮었다"라고 표현하는 죽음을 맞이하면 영혼이 빠져나가 시신은 아무렇게나 훼손해도 된다고 고대 사람들은 믿었다고 한다.
구두로 전해져 내려온 서사시라 사람들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묘사는 잔혹하기도 하지만 아름답기도 했다. 그리고 비유는 온갖 동식물을 활용한다.
그들은 여전히 시신 주위에 모여 있었으니, 그 모습은 봄철에 외양간에서 우유가 통들을 적실 때 파리 떼가 넘치는 우유 통들 주위로 윙윙거리며 날아다닐 때와도 같았다. (16:641)
마치 물이 넉넉히 솟아오르는 탁 트인 장소에 농부가 심어놓은 올리브나무의 튼튼한 묘목이 사랑스럽게 무럭무럭 자라나 온갖 바람의 입김에 흔들려도 흰 꽃을 가득 피우지만 어느 날 갑자기 큰 폭풍이 거세게 불어와 그것을 뿌리째 뽑아 땅바닥에 내던지듯, 꼭 그처럼 판토오스의 아들 훌륭한 물푸레나무 창의 에우포르보스를 아트레우스의 아들 메넬라오스가 쓰러뜨려 무구들을 벗겼다. 마치 산 속에서 자란 사자가 제 투지를 믿고 풀을 뜯는 소 떼 중에서 가장 훌륭한 암소를 붙잡아 그 강한 이빨로 먼저 암소으 목을 바수고 이어서 피를 빨고 내장을 게걸스레 먹어치워도 개 떼와 목자들은 사자를 둘러싸고 멀리서 소리만 지를 뿐 팛게 겁에 질려 누구 하나 감히 덤비려 하지 않을 때와 같이, 꼭 그처럼 트로이아인들도 누구 하나 감히 영광스러운 메넬라오스에게 덤비려 하지 않았다 (17:53)
분노란 똑똑 떨어지는 꿀보다 달콤해서 인간들의 가슴 속에서 연기처럼 커지는 법이지요 (18:109)
인간과 신, 자연을 넘나들며 상상력을 자극하는 ‘일리아스'는 전쟁 영화를 보는 듯한게 아니라, 전쟁 영화가 이 책을 참고해 만든 듯하다. 잔혹하지만 박진감 넘치는 트로이 전쟁 서사시다. 다음 편에는 이 책의 주인공인 아킬레우스가 드디어 다음 편부터 등장한다.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