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일리아스 19-24, 호메로스

by 카멜레온

700페이지 넘는 고대 그리스 서사시을 완독했다. 아 뿌듯하다. 주인공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킬레우스는 책 맨 처음과 맨 끝만 등장했고, 영웅이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줬다. 하지만 그런 허당스러운 모습을 - 심지어 찌질하고, 소심하고, 이기적이고, 배려심 없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모습을 - 그와 같은 모습을 가진 나를 포함한 보통 사람들과 비슷해서 사람들이 더 좋아하는 듯하다. 아킬레우스의 ‘허당 매력’을 통해 운명에 대해, 신에 대해, 명예에 대해 다시 성찰했다.


운명에 대해


“네가 인생의 주체자야", “인생은 개척하는거야"라는 관점을 평생 갖고 살아왔다. 이런 관점에는 장점도 있지만 단점은 인생에서 일어나는 결과에 대해서도 100% 내 탓이다. 내가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자학으로 쉽게 빠지곤 했었다. 하지만 운명을 믿는다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제우스가 비웃고 있다면, 아무리 싸워도 아폴론이 경쟁자에게 힘을 실어준다면, 자책을 조금 덜어내고 결과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될 일은 되고, 안될 일은 안된다면, 덜 긴장하고 더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죽을 것이니 죽음에 초연하고, 살아있는 동안 더 의미 있고 명예로운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책 곳곳에는 신이 편을 나누어 인간을 돕거나 방해한다. 트로이 전쟁에서 헤라, 아테네, 헤파이스토스 등은 그리스 연합군 편이고, 아폴론, 아르테미스, 아레스 등은 트로이 편이다. 전쟁의 결과도, 인간의 목숨도 이들 손에 달려있다. 트로이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제우스는 마치 사이코패스처럼 웃고 있다.


그 책임은 나[아가멤논]에게 있지 않고 제우스와 운명의 여신과 어둠 속을 헤매는 복수의 여신에게 있소이다. 아킬레우스에게서 내가[아가멤논] 손수 명예의 선물을 빼앗던 그날, 바로 그분들이 회의장에서 내 마음속에 사나운 광기를 보내셨기 때문이오 (19:86)


[아킬레우스] 아버지 제우스여! 그대는 인간들에게 엄청난 미망을 주시나이다. 그러지 않았던들 아트레우스의 아들[아가멤논]은 내 마음속 마음을 격분시키지 않았을 것이며, 내 뜻을 거슬러 고집스레 소녀를 데려가지도 않았을 것이오, 이는 결국 제우스께서 많은 아르고스인들에게 죽음이 닥치기를 원하셨던 탓이오 (19:270)


[헤라] 그 책임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위대한 신과 강력한 운명에게 있어요. 트로이아인들이 파트로클로스의 어깨에서 무구들을 벗긴 것도 우리가 게을렀거나 부주의한 탓이 아니라 머릿결 고운 레토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신이 선두 대열에서 그를 죽이고 헥토르에게 영광을 내렸기 때문이지요 (19:408)


제우스는 [...] 신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마음이 흐뭇하여 웃었다. (21:390)


신에 대해


이 책에서 가장 재밌는 장면은 인간과 자연이, 자연과 자연이 싸우는 듯한 장면이다. 아킬레우스가 강에 떠내려가는 장면을 작가는 강과 싸우는 것으로 묘사한다. 아킬레우스가 트로이 군인을 많이 죽이자 강의 신 크산토스가 너가 만든 시체 때문에 강이 막혔다며 아킬레우스에게 그만 좀 하라고 한다. 대장장이의 신이기도 한 헤파이스토스는 헤라의 아들이기도 한데 헤라의 지시에 따라 불을 지른다. 요즘 산불을 보면 불이 났구나, 하지만 신을 개입시키면 헤라가 헤파이스토스에게 불질러라고 시켰기 때문에 불이 난 것이다. 자연과 자연, 즉 물과 불이 싸우는 장면도 있다. 강이 범람하고 화재가 나는 것을 강의 신 크산토스 그리고 불의 신 헤파이스토스의 대결로 그렸다.

나[크산토스]는 시신에 막혀 흐르는 강물을 신성한 바다로 쏟아 보낼 수 없는 지경인데, 그대[아킬레우스]는 무자비한 살육을 계속하는구나. (21:220)


아킬레우스가 강둑에서 강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강물이 솟구치며 그에게 덤벼들었다. 강은 모든 물줄기들을 전부 치솟게 하더니 아킬레우스 손에 쓰러져 그 속에 무더기로 쌓인 시신들을 밀어냈다 (21:233)


[헤라] 사랑하는 아들 헤파이스토스를 향해 지체없이 말했다 […] 되도록 빨리 아킬레우스를 도와 큰 불길이 타오르게 하라. (21:331)


[헤라] 헤파이스토스여, 그만두어라 […] 인간들 때문에 불사신에게 이렇게 폭행을 가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이렇게 말하자 헤파이스토스는 맹렬히 타오르던 불을 껐고 강물은 다시 아름다운 물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 그리하여 크산토스[강의 신]의 기세가 꺾이자 둘 다 그만두었다. 헤라가 노엽긴 하지만 그들을 제지했기 때문이다 (21:381)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군이 싸울 때, 그리스 신들끼리 역시 전쟁을 했다. 부모자식, 형제자매 다 상관없고 서로가 서로를 - 어차피 신이라 죽지도 않는데 - 죽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아레스[전쟁의 신]가 [지혜의 신 아테나를] 긴 창으로 찔렀다 (21:402)


아테나는 […] 아레스의 목을 쳐서 그의 사지를 풀었다 (21:405)


아테나는 그녀[아프로디테]의 가슴을 쳤다. 그 자리에서 아프로디테는 무릎과 심장이 풀렸다 (21:422)


헤라가 그녀[아르테미스]의 귀 옆을 후려치니 (21:492)


명예에 대해


그리스 연합군 수장 아킬레우스는 너무 쉽게 트로이 수장 헥토르를 이긴다. 헥토르가 자신의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죽였기 때문에 분노에 찬 아킬레우스는 수많은 트로이 군인과 애원하는 헥토르를 무자비하게 살육하고, 헥토르의 시체를 전차에 질질 끌고 그리스 연합군 막사까지 달린다. 그 모습을 본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는 충격을 받고 아내 안드로마케는 실신한다.


헥토르여 잊지 못할 자여! 내게 합의에 관해 말하지 마라 (22:261)


이 개자식아[헥토르]! 무릎이나 어버이를 들먹이며 내게 애원하지 마라 (22:345)


헥토르[의 시체]를 끌고 죽은 파트로클로스의 무덤을 세 번 돌고 나서 다시 막사로 돌아와 쉬었고 (24:16)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수습하고자 혼자 막대한 재산을 들고 아킬레우스 막사를 찾는다. 프리아모스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아킬레우스의 무릎을 잡고 양 손에 입을 맞추며 시신을 돌려달라고 탄원한다. 자신의 명예가 아니라 아들의 시신 수습을 위해 혼자 적진에 들어온 용기, 곧 자신이 죽을 것이라 프리아모스처럼 아들을 잃을 자신의 아버지의 아픔에 공감하며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신도 프리아모스에게 돌려주고, 같은 편이지만 공정한 분배를 하지 않았던 아가멤논과 겸상을 하지 않은 것과 달리 프리아모스와는 식사도 한다. 아킬레우스는 친구의 죽음 때문에 이성을 잃고 잔혹하게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데, 프리아모스는 아들을 죽인 살인자 앞에서 어떻게 이렇게 침착할 수 있을까? 밥이 목으로 넘어가긴 했을까? 내 손으로 아킬레우스를 죽여버리고 싶지 않았을까? 이런 프리아모스의 모습을 보고 아킬레우스는 진정한 명예에 대해 돈오하듯 갑자기 탁 깨우친 듯하다. 이 클라이막스 장면에서 아킬레우스는 갑자기 깨닫고 갑자기 성장한다.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이 자신에게 한 불공정한 분배에 대해 분노 때문에 전쟁에 나가지 않았고,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으로 인한 복수심 때문에 전쟁에서 싸웠는데, 그건 진실된 명예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듯하다.


아아 불쌍하신 분[프리아모스]이여! 그대는 마음속으로 많은 불행을 참았소이다. 감히 그대의 용감한 아들들을 수없이 죽인 사람의 눈앞으로 혼자서 아카이오이족 함선들을 찾아오시다니! (24:520)


아킬레우스도 다르다노스의 후예인 프리아모스의 고상한 용모와 언변을 보고 듣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24:631)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의 발 앞에 쓰러져 남자를 죽이는 헥토르를 위해 흐느껴 울었고 ,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때로는 파트로클로스를 위해 울었다. 그들의 울음소리가 온 집안에 가득찼다 (24:510)


남을 위해 우는 것은 진정으로 상대방의 아픔을 느낄 수 있을 때 할 수 있다. 남의 고통이 아니라 나의 고통으로 받아드릴 때 가능하다. 나 또한 명예를 가장 높은 가치라고 생각하고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는 명예와 일리아스에서 나온 명예의 개념은 달랐다. 참된 명예란 권력과 명성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존중과 공감이라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가르침을 잘 새기고 헛된 명예를 좇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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