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by 카멜레온

‘멋진 신세계’는 ‘1984’와 함께 디스토피아 소설의 양대산맥이라고 한다. ‘1984’는 감시하고, 억압하고,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인 반면, ‘멋진 신세계'는 사방이 설탕같고, 달달하고, 눈부시게 하얗고, 생각과 감각을 모두 마비시키는 분위기였다. ‘1984’를 읽을 때는 이런 전체주의 세상은 안돼! 여기 싫어! 라는 마음이 들었다면, 모든 것이 갖춰진‘멋진 신세계’는 아 괜찮은데? 살만하겠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1984’ 세계에서는 비판과 불만이 생기지만 표현이 금지되었다면, ‘멋진 신세계'는 의식의 싹부터 잘라내서 애초에 반항할 마음부터 들지 않게 만든다. 다시 말해 ‘멋진 신세계'가 더 무서운 세계다.


현실은 이미 ‘멋진 신세계'


작가의 의도는 충분히 알겠다. 모든 것이 완벽한 ‘멋진 신세계'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알겠다. 근데 이런 세계가 디스토피아라고 느껴지지 않을만큼 이미 우리는 ‘멋진 신세계'와 비슷한 세계에 살고 있는 듯하다. 독자가 먼저 경악하는 장면은 ‘멋진 신세계' 사람들은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오메가 5등급으로 나눠 실험실에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실험실에서 온도와 산소를 조절하지 않아도 이미 태아의 계급이 나눠져 있다. 매일 월세를 전전긍긍하며 사는 산모의 아이와,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태교에 집중하고, 2주에 몇 천만원짜리 조리원에서 관리 받고, 고급 사교육을 제공하는 산모의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계급이 다르다. 임신, 출산, 양육의 수준이 이미 경제 수준에 따라 나눠져 있기 때문에 약 100년 전에 쓰여진 이 책은 예언서처럼 정확한 듯했다.


비판의식을 싹부터 잘라내는 ‘소마'


고통과 걱정을 없애주는 소마 soma도 마찬가지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소마가 알약이라는 것뿐이지 이미 현실에서는 아픔을 회피하기 위한 온갖 상품들이 있다. 흔한 것으로는 술, 담배, 심각하게는 마약이 있고, 가볍게는 커피, 수시로 광고와 쇼핑 등 정신을 딴 곳에 팔게 해서 문제 해결이 아닌 망각을 하게 만드는 장치들이 현실 곳곳에 즐비하다. 그런데 소마가 꼭 나쁘다고만 할 수 있을까? 해결해야 하는 문제거리가 아니고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일이라면 굳이 스트레스 받지 않고 두통약 먹듯이 소마 한 알 먹으면 다시 행복해지고 즐거워지는 해결책도 나쁘지 않아보였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생각보다 약물 의존도가 심각했다. 최근 컨설팅 회사 맥킨지가 진통제 오피오이드 남용을 부추긴 혐의로 미국 주 정부들에게 5억 달러 이상의 합의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약물이 필요해서가 복용하는 게 아니라 광고, 홍보, 마케팅의 노예로 이용될 수도 있으므로 경각심이 필요하다. ‘1984’ 읽을 때와 달리 ‘멋진 신세계'를 큰 저항감 없이 받아들였다는 것은 몇 십년 동안 내가 자본주의와 과학에 세뇌됐다는 반증인 듯하다. 작가의 의도는 알지만 생산성, 효율성에 대해 오랫동안 주입받았고, 이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려고 하니 그만큼 인간다움이 줄어든 것은 아닐까 우려된다. 소마는 개인의 고통을 없애주는 것과 동시에 사회에 대한 불만도 없애기 때문에 약은 계급,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의식을 싹부터 잘라내고 그곳 사람들은 각자의 계급과 현실에 행복하고 만족해한다. 개인의 성장도 사회의 발전도 결핍에서 시작된다. 불만이 없었다면 사회가 여기까지 발전할 수 있었을까? 인종차별, 남녀차별 등이 사라지고 있는 이유는 누군가의 불만 덕분이다. 만족하면 안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불만족하면 개선할 의욕이 생긴다. 스트레스는 받지 않되 성장의 자극으로 삼는 적당한 고통이 필요하지 않을까?


단절된 사랑의 언어


야만세계의 존과 문명세계의 레니나는 서로에게 호감이 있지만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 이어지지 못한다. 사랑이란 내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둘은 마치 각자 러시아어와 아랍어를 하듯 서로 이해하지 못했다. 존은 야만인이 하듯 정서적으로 표현하는 반면, 레니나는 문명인이 하듯 육체적으로 연결되려고 하자 존은 레니나를 창녀라고 부른다. 이런 소통은 남녀뿐만 아니라 부모-자식, 선배-후배, 서양인-동양인 등 마찬가지다. 상대방의 입장과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 타인과 연결되어있음과 동시에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도 필요하다. 그래야 성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행복해지기 위해 불행해질 권리


이 책의 클라이맥스는 야만인 존이 주장하는 ‘불행할 권리'에 대해서다.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야만인이 도전적으로 말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늙고 추악해지고 성 불능이 되는 권리와 매독과 암에 시달리는 권리와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고생하는 권리와 이 투성이가 되는 권리와 내일은 어떻게 될지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아갈 권리와 장티푸스를 앓을 권리와 온갖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할 권리는 물론이겠고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런 것들을 모두 요구합니다.” 마침내 야만인이 말했다.> 행복은 상대적이다. 불행을 느껴본 사람이 뼈저리게 행복을 안다. 후진국에 다녀온 사람은 한국에 돌아왔을 때 이런 안락함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정말 감사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 건강을 잃었을 때, 실제로 내가 다시 팔을 올릴 수 있고, 다시 눈으로 볼 수 있고, 다시 걸을 수 있었을 때 발과 다리의 소중함을 진짜로 알았다. 무언가 부재했을 때, 박탈됐을 때, 결핍됐을 때 그 불행함을 몸소 느끼고 그 후에 내가 그 것을 얻거나 되찾았을 때 비로소 행복을 느끼는 듯하다. 그래서 우리가 상상하는 천국이라는 곳이 만약에 있다고 하더라도 막상 갔을 때 행복하지 않고 지루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도 든다. 항상 모든 것이 갖춰져 있고, 모든 것이 좋다면 정말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 불행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고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의미라서, 지금 이 순간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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