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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cobalt Jan 26. 2023

스물 다섯 일기에 서른아홉의 내가 답하다

         그녀는 존재했고 성장해 갔지만 아무것도 되지 못했던 것이다

                                                                                                      페터 한트케, <소망없는 불행>




14년 전, 나의 일기를 우연히 보게 됐다. 강남과 안양지역에서 영어 강사와 과외를 하기 위해 길을 오가며 카페에서 대학원 공부를 병행할 때다. 카페에서 시끄럽게 이야기하는 아주머니들이 대단히 거슬렸는 모양. 2005년 10월의 일기다. 


<50대의 수다는 대부분 자녀 교육에 관한 것이다.

단 한 문장도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없다.

가끔씩은 나도 나의 모든 것을 나의 후대를 위해 쏟아부을 까봐 걱정이 된다. 

나는 30년이 지나도 나와 사상을 공유할 친구들과 함께 나의 인생과 나의 배움에 대해 말하리라.

훨씬 정진된 나의 감정과 지성으로.

그들의 대화는 과연 그들이 10대에 저렇게 열변을 토하며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았을까를 의문스럽게 만든다.

마치 잃어버린 과거를 절망적으로 벌주다 못해 그들의 현재, 50대로서의 삶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20대의 내가 39세의 나를 혼내고 있다. 나도 어느새 카페에서 엄마들과 자녀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아줌마가 되어있었다.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보다 아이들의 이야기하는 것이 더욱 편한 내가 되어있었다.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준비와 교육, 그리고 무엇보다 먹을거리와 아이들 옷쇼핑에 여념이 없던 오늘의 나를 저 멀리서 스물다섯의 내가 보고 말하는 듯했다. 나는 이렇게 스물다섯, 꽃다운 시기를 학비와 생활비 벌이, 그리고 공부에 쏟아붓고 있는 데, 너는 거기서 무슨 생각과 삶으로 하루를 채우며 보내고 있느냐고. "내가 그때 영어를 더 제대로 배웠다면.... 수학을 잘했다면.... 더 많은 다양한 경험을 했더라면.... 유년시절 유복했더라면...."이라고 끊임없이 나의 과거를 아이들에게 투영해서 아이들의 삶에 집중하느라 정작 39세, 현재 나의 삶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느냐고.  오늘 단 한순간이라도 나 자신을 위한 생각은 했느냐고. 

     그리고 스물다섯의 나에게 이렇게 답하고 싶었다.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 나의 일상과 현재의 삶에 대해 스물다섯의 내가 실망은 하지 않을 수 있도록. 


<참... 면목이 없다. 

그래도 변명은 하고 싶어. 너는 딱 3개월 뒤 이상형의 남자를 만나게 될 거야. 

첫눈에 너는 사랑을 느끼고 그리고 2, 3년간 너의 첫 번째 연애를 시작하지.

그렇게 누군가에게 빠져있는 상태로 '사랑'이 온 우주의 중심인 것을 경험하며 20대 후반으로 들어섰어.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어. 첫아들을 낳았을 땐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어. 아득하게 따스하면서 내 존재를 빈 공간 없이 행복으로 가득 채운 날들이었어. 그리고 나의 우주의 중심은 그 아이가 되었지. 

너를 완전히 잊은 듯 살다 보니 아이를 셋이나 낳았어. 당연히 내 것이라고 느꼈던 것들이 매일매일 한 줌의 머리카락처럼 사라져. 체력과 더불어 여성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많은 것들이. 

그런데 눈앞에 너무나 아름다운 여자 아이들이 있어. 내가 스러져가는 것과 반대로, 존재자체로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뿜어 내는 아이들... 그래서인지 거울을 보는 것보단 아이들을 보는 걸 선택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하지는 않아. 모든 초점이 오로지 '나'였던 삶보다 다른 존재와 함께 성장하는 지금이 더 가치 있고 행복하다고 느껴져. '나'의 행복, '나'의 만족, '나'의 성공을 위한 삶은 그로 인해 내가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외롭더라. 

너를 기억하며 사는 것이 거추장스러워서, 그냥 하루하루 건강한 아이들에 감사하면서 치열하지만 안온하게 살았네. 행복한데, 이상하게 허전한 것이 뭔가 싶었는데, 그게 너였나 봐. 

미안해. 내가 더 잘할게. 이제 널 기억할게.>


       <소망없는 불행>에서 페터 한트케는 "독서를 함으로써 그녀(어머니)는 처음으로 자신을 감싼 껍데기로부터 벗어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법을 배웠다"고 지적하지만, 그 독서가 "결코 미래를 향한 꿈으로"이어지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25세의 나를 기억하기위해 오늘도 독서에서 나아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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