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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cobalt Oct 25. 2022

놀이터에서 책 읽는 엄마

   어떤 엄마가 놀이터에서 아주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주변 환경과는 다른 공기가 형성되는 것 같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에서 책 읽고 있는 모습이 전혀 안 어울리는 두 세계를 겹쳐 놓은 듯 생경했다. 무슨 책 읽까 궁금하기도 해서 그 엄마가 잠깐 아이들을 케어하러 간 사이 무슨 책인지 슬쩍 봤다. 요슈타인 가아더의 철학 소설 <소피의 세계>였다.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놀이터에서 육아서도, 인기 있는 신작도 아니고 라이트 노블도 아닌 때 묻은 <소피의 세계>라니. 갑자기 그 엄마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경로로 저 책을 집어 들었을까. 왜 그 책을 읽고 있을까? 놀이터에서조차 손을 못 뗄 정도로 그렇게 재미있는 책일까? 

   이 소설을 누군가 읽고 있는 장면은 전에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고3 때, 모든 아이들이 시험 준비로 날이 서 있을 때, 한 친구가 <소피의 세계>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두꺼운 소설을 시험기간에 읽는 모습이 충격적이었다. 1, 2등을 다투는 친구였어서 더욱 놀랐다. 자기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무언의 사인인가 싶었다. 

   나도 책을 읽는 모습으로 누군가에게 충격을 준 적이 있다. 고 1 때, 언니 책장에서 꺼낸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교실에서 읽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새로 부임한 담임 선생님이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나를 부르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급기야는 옆반 영어과 선생님에게도 그 사실을 전달해 옆반 선생님도 내가 <율리시스>를 읽는 모습을 확인하러 왔다. 나야말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이게 무슨 책 이길래 저렇게 호들갑을 떠나 싶어 책을 더 자세히 봤다.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니 그 상황이 이해가 됐다. 명문대 영문학과 출신이던 담임 선생님은 군대를 다녀와 모더니즘 수업을 들어야 했을 거다. 그리고 그 수업에서 제임스 조이스를 배웠을 것이고, 아마 욕을 뱉으며 그에 관한 리포트를 썼을 것이다. 그리고 졸업을 하고 학교에 부임을 했는데 고1짜리가 그 난해한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다. 나는 선생님의 반응에 조금은 우쭐했던 것 같다. 아일랜드 역사와 성경,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책이기에 내가 그 소설을 이해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글귀마다 달려있는 주석과 역주를 훑어보면서 한 문장 속에도 이렇게나 많은 의미와 상징들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 뒤로도 나는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선을 들고 다녔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너는 조이스가 좋구나? 허허허..." 하며 웃었다. 

   지금 왜 그때 그 책을 읽었냐고 묻는 다면 현실을 직시할 힘이 떨어져서, 회피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어렵게 입학한 고등학교의 치열함, 내가 잘해 낼 수 있을지 모호한 입시. 점점 상위권과는 멀어지는 나의 성적을 직시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웠다. 대신 대학생 언니의 어려워 보이는 책을 몰래 들고 나와 지금 내가 처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대신 어려운 책을 읽으며 자기 위로를 했던 것이다. 

  그 책을 읽은 이유가 내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고 도피하기 위해서였다 해도, 그때 언니의 책장에서 <율리시스>를 꺼내던 순간 나의 20대의 삶이 정해졌던 것 같다. 그 책이 나에게 어떤 주문이라도 걸었는지 난해한 상징으로 가득한 그 세계를 알고 싶다는 열망을 나에게 불어넣었다. 이후로 나는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했고 20대 중반까지 영문학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았으니 말이다.

   일상이 매일 똑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지금 나의 삶을 전환시킬 책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좋은 책이 안내하는 경이로운 세상을 만난 지가 최근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제는 회피가 아니라 나의 삶을 가꿔가며, 나의  일상과 함께 책을 읽고 싶다. 놀이터에서 만난 그 엄마처럼 말이다. <소피의 세계>를 주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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