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에서 앤디워홀까지"라는 전시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근현대 서양 미술사에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화가들의 작품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어쩌다 이 많은 작품들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는 미술관에 소장될 수 있었을까?
예술 애호, 기증, 그리고 미술관 건립
전시의 시작은 총 9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었다. 네덜란드의 황금기, 빅토리아 시대 영국미술,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 인상주의, 인상주의 이후, 20세기 초반 아방가르드, 등 미술사의 교과서라고도 할 수 있는 흐름이 순서대로 정리되었다. 가장 인상적인 점은 이 전시의 시작이 "필립스 부부"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플로렌스 필립스 부인(Lady Florence Philips, 1863-1940)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나고 자랐다. 런던생활 후 필립스 부인은 미술에 깊이 관심을 갖게 되었고, 당대 미술을 적극적으로 구매하기 시작한다. 이는 그의 남편 라이오넬 필립스 경(Sir Lionel Philips)이 전형적인 란드로드(Randlords, 남아프리가 광산 자본가 집단)였으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필립스 부인의 예술에 대한 애호는 단순히 수집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남아프리카에서도 서양 미술을 관람할 수 있는 미술관을 짓기 위한 프로젝트에 들어간다.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미술품 기증은 물론, 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회화를 소장하고 있던 막스 미카엘리스(Max Michaelis)를 설득해 미술관에 다수의 네덜란드 회화가 소장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로 인해 1910년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가장 큰 요하네스버그 미술관이 설립되었다. 유수 미술관 건립 과정 공식적으로 통하는 단계인 거부의 예술 애호- 기증- 그리고 미술관 설립으로 통하는 과정을 그대로 밟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프랑스 근대미술 컬렉션
이번 전시에서 가장 독보적인 컬렉션은 프랑스 근대미술이었다. 드가, 모네, 시슬리 등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프랑스 미술이 한 자리에 모여있다. 특히 모네의 스승인 외젠 부뎅부터 시작해서 알프레드 시슬리등 인상주의 시발점과 정점에 이르기까지 그 흐름을짚어볼 수 있을 정도의 컬렉션 이었다. 당대 최고의 것들을 소장하고자 했던 필립스 부인의 열망이 보였다.
드가의 이 파스텔 작업은 마치 파스텔의 마법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시력이 나빠지자 유화의 섬세한 작업을 할 수 없었던 드가는 본격적으로 파스텔화 작업을 했다. 이 작품은 특히 따뜻한 색감을 사용해 실내조명을 부각했고 파스텔 색을 혼합하고 긁어서 더욱 오묘하고 인상적인 색을 만들어간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모네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가 빛에 따라 변하는 찰나의 순간을 그려냈듯, 드가는 따뜻한 조명 아래 민첩한 발레리나들의 동작을 직관적으로 표현한다.
아름다움이 사진에는 담기지 않는 모네의 <봄>이다. 대중적으로 많이 소비된 모네의 작품 가운데서도 흔히 볼 수 없었던 작품이었기 때문인지 눈부신 꽃이 만발한 들판 앞에서 많은 관람객들이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보통 <봄>의 시리즈 가운데 모네의 아내 끌로드가 양산을 쓴 채 눈부신 빛을 받는 그림을 많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인물 없이 그 자체로도 자연은 눈부시고 찬란하다.
모네를 지나, 신인상주의로 넘어가 폴 시냑의 '빛의 바다'에 당도한다. 요트를 타는 취미가 있었던 그는 남프랑스의 생트로페, 마르세유, 베네치아와 같은 물의 도시를 그렸다. 세잔, 드가와 마찬가지로 시낙은 부유한 집안 환경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작품활동에 집중할 수 있는 호사를 누렸다. 수많은 점을 찍어 색과 빛을 나타내는 점묘법은 당대에는 혁신적인 기법이었다. 화단의 비판이나 대중의 이해를 받지 않고도 조르주 쇠라와 함께 점묘법 화파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에는 그의 배경이 있었다. 그는 다양한 색채를 캔버스에서 직접 섞지 않고 대신 점을 찍어 관람자의 눈에서 색이 혼합되게 했다. 이로써 그의 색채는 바닷가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듯, 더 신선하게 느껴진다.
한국에서 보기 힘들었던 영국 근현대 미술
개인적으로 이 전시를 꼭 보고 싶었던 이유는 한국에서는 소개된 적이 드물었던 영국미술 작품이 대거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영국의 식민지였다는 것의 연관성이 큰 축을 차지한다. 필립스 부인이 1890년대에서 1900년대 영국에 거주하던 시절 영국 윌리엄 시커트, 라파엘 전파 작가들, 윌리엄 오펜 등의 영국 근대미술의 정점을 이루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했기 때문이었다.
근대미술 화가로는 윌리엄 터너, 존 컨스터블, 현대미술 화가로는 데이비드 호크니 등 한국에 자주 소개되는 영국 화가들이 있지만 19세기 영국미술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라파엘 전파의 그림은 한국에서 보기 힘들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윌리엄 터너, 존 브렛의 작품뿐 아니라 라파엘 전파의 작품들도 감상할 수 있다.
영국에서 1848년 등장한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s)는 영국 미술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당시 영국은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르네상스 미술을 이상으로 삼고 이를 그대로 표방한 아카데미가 화단의 대부분이었다. 완벽한 비율과 대칭으로 사물과 인간을 묘사한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은 모든 미술학도들이 모방하고 따라야 했던 규범과도 같았다. 이 완벽한 '모범'을 따르기도 바쁠 것 같은 신진 화가들이 역으로 오히려 르네상스 회화의 대가 라파엘로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을 일으킨 것이다.
라파엘 전파는 이상적인 환경과 인물이 아닌, 자연에 직접 나가 풍경을 묘사하고, 당대 회화에선 찾아보기 힘들었던 실제 여성의 모습을 담대하게 그렸다. 그들은 예리한 관찰을 통해 자연에 충실하고자 했고, 신비로운 분위기와 감각을 중시했다. 개인적으로는 아름답고 완벽한 라파엘로의 성모와 같은 여성보다 로제티의 현대적이고 대담하며,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듯한 로제티의 그림 속 여성에 사로잡힌 바 있다.
그중에서도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레지나 코르디움> 이 이 전시에서 볼 수 있어서 반가웠다. 요하네스버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기에 영국에서도 볼 수 없는 작품으로, 명작들 가운데서도 대략 A4용지 사이즈 정도 되는 이 작품의 존재감은 강렬했다.
'레지나 코르디움'은 '마음의 여왕'이라는 라틴어이다. 로제티가 모델인 시덜과 결혼 직후 그린 작품으로, 사랑의 열정, 이상, 숭배의 감정이 드러나 있다. 르네상스 시대 사랑을 상징하는 여성과 비교해 볼 때 이 작품은 파격적이다. 붉은 머리, 창백한 얼굴, 내려다보는 눈과 사랑스러운 표정이라기보다는 무표정에 가까운 인물의 묘사 때문인지 로제티의 그림 중에서도 엘리자베스 시덜을 모델로 그린 작품들은 남다른 감응을 준다. 시덜이 들고 있는 작은 연약한 보랏빛 야생화는 예민하고 병약한 몸, 충실하지 못한 남편, 그리고 아이를 유산 한 뒤 아편 중독으로 사망한 그녀의 비극적인 생애를 예고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레지나 코르디움>과 존 에버릿 밀레이의 <한 땀 한 땀>은 바로 양 옆에 전시되어 있다. 에버릿 밀레이도 라파엘 전파의 화가였으나 1860년을 기점으로 라파엘 전파 화가들은 흩어졌고,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찾아간다. 밀레이는 그중에서도 가장 변화가 큰 인물이다. 라파엘 전파에서 가장 잘 알려진 <오필리아>를 그린 화가이지만 이후에는 주로 여성 인물과 아이들 등 중산층의 일상 풍경을 화폭에 담는다. 이는 구매자의 수요에 맞춰 대중적이고 온건한 회화로 전향하는 것, 상류층의 초상 전문화가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후 그는 로열 아카데미 회원이 되면서 라파엘 전파에서의 활동은 젊은 시절 한 때의 패기를 상징하는 작품이 되었다.
그럼에도 문득 궁금해진다. 만약 밀레이가 대다수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경제적으로 자유롭게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더라면? 떠들썩한 스캔들로 유명 비평가였던 존 러스킨의 아내 에피 그래이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여덟 명의 자녀를 두지 않았더라면 <오필리어>와 같이 당대로서는 혁명과도 같았던 그림을 계속 제작할 수도 있었을까. 그랬더라면 앞서간 예술 세계로 대중과 비평가의 비난을 받았던 라파엘 전파는 와해되지 않고 꿋꿋이 그 철학을 이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더라면, 근현대 영국미술은 어떤 전환점을 맞이했을까.
풍부한 현대미술의 교과서
이번 전시에서는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화가들의 작품이 거의 동원되었다. 피카소, 마티스는 물론이고 팝아트의 시발점 리처드 해밀턴부터, 리히텐 슈타인, 요셉 보이스, 앤디 워홀 까지, 대표작은 아니지만 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들이 대거 소개되었다. 작가 회고전도 좋지만 이렇게 다양한 작품들이 소개 되었을 때는 동시대 다른 작가의 작품을 비교하거나 특정 시기가 지난 후 작품세계가 어떻게 달라지는 지 알아보는 재미가 있다.
이번 전시에서 마티스의 <꽃과 여인>(1923), 피카소 <목걸이를 한 여인>(1947) 등 여성의 인물상을 비교해 볼 수도 있고 전쟁 전후로 인물 재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간의 야만성과 폭력성, 현대 사회의 고독과 불안, 뒤틀린 욕망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인물화에 그대로 드러난다. 인물들은 갇혀있고, 억압되어. 얼굴은 뭉개져있다. 인물화와 자화상은 인물의 묘사하고 감정을 전달하는 도구가 아닌, 인간의 실존적 경험과 복잡한 심리상태를 표현했다.
해외 유수의 미술관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수많은 명화들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쯤, 마지막 섹션에 꽤 상당한 존재감을 간직하고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20세기 미술에 이른다.
그리고, 남아공의 미술
쏟아지는 명화들을 본 후인데도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남아프프리카 공화국의 식민지 역사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명화들을 뒤로하고, 이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윌리엄 캔트리지의 <물의 잠긴 소호>(1999)였다. 어느 미술관에서도 보지 못했고, 이번에 남아공에서 온 작품 중 가장 남아프리카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희귀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작품 속 '소호'는 켄트리지가 창조해 낸 인물이다. 소호는 남아프리카의 역사이자 사적 역사이며, 자화상이기도 하고, 그의 할아버지이자 아버지의 모습이며, 남아프리카 백인의 역사이다. 소호는 남아공의 백인 자본가, 권력가이지만 죄책감에 머리를 들지 못한다.
무릎까지 차오른 물은 누군가의 피와 눈물일 터. 캔트리지의 아버지가 인권 변호사로서 넬슨 만델라 재판에 참여했다는 것이 역사적 죄책감과, 태어나자마자 란드로드였던 그의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을까. 어쩌면 켄트리지의 예술 또한 이미 정체성이 되어버린 남아프리카 공화국 백인이라는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작업일지 모른다.
요하네스버그 미술관은 1940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흑인 예술가의 작품을 소장하게 된다. 그 첫 작품은 제라드 세코토의 <오렌지와 소녀>였다. 세코토는 남아공의 흑인의 일상을 담은 그림을 묵묵히 그렸고, 흑인 차별 정책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했다.
미술관이 세코토의 그림을 소장했다는 것은 아파르테헤이트를 거부한다거나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은 아니었다. 미술관은 여전히 백인들을 위한 문화 공간이었고 흑인의 입장이 불가능하거나 제한되고, 철저히 분리되긴 마찬가지였다.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된 것은 이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1994년이 되어서였다.
명화들이 순회전에 다닐 수밖에 없는 이유
이후 요하네스버그 아트갤러리에 소장된 명화들의 운명은 어땠을까. 남아프리카 공화국 독립 뉴스 주간지 데일리 메버릭은 2022년 "한 때 생기 넘쳤던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가 폐허로 무너지다"라고 보도했다. 미술관 건물은 사실상 방치 됐고, 천장에 금이 가고 물이 새는 등 미술품 관리에는 최악의 컨디션으로 치달았다.
1910년 개관할 때만 해도 당시로선 아프리카 최고의 인프라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 이후 재정지원이 줄다가 2000년 이후는 본격적인 쇠락의 수순을 밟았다.
일부 작품이 도난되고 큐레이터도 이탈하는 등, 미술관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하나씩 그 자리를 잃어 갔다. 무엇보다 미술품들이 사실상 창고에 방치 돼 있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다.
국제박물관협의회(ICOM)와 미국박물관협회(AMM)에서 미술관 재정극복을 위한 미술품 판매(deaccession)를 사실상 국제적으로 제한하면서 미술관이 소장한 작품을 파는 것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미술관 재정 확보를 위해 국가소유, 혹은 기증품을 파는 행위가 비윤리적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그렇기에 남은 선택지는 명화들의 국제 순회전뿐. 그렇게 고향에서 떠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옮겨진 작품들은 쉼없이 순회전을 다니고 있다. 그것에 요하네스버그 미술관에 있는 것보다 안전하기도 하고, 그로 인해 수입이 창출되기 때문일 것이다. 덕분에 가까운 곳에서 명화들을 만날 수 있는 호사를 누렸지만 식민 지배의 대가를 작품들도 함께 치루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https://www.theguardian.com/theguardian/1999/apr/20/features11.g2
https://news.artnet.com/art-world/newark-museums-plan-deaccession-sothebys-19666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