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스 달튼 브라운 회고전: 잠시, 그리고 영원히
푸른 바다를 품은 공간의 작품에 마주한다. 커튼이 휘날리는 사적 공간의 창은 활짝 열려 있다. '집'의 본질적인 한계를 활짝 열어 경계 그 너머의 세계로 안내한다. 집에 있지만 밖을 향하고 경계 안에 있지만 자유롭다.
빛에 반사된 푸른 바다와 연결된 창. 안과 밖의 경계는 얇게 비치는 커튼뿐이다. 놀랍게도 이 작품은 리넨에 유화로 그린 작품이다. 작품에 다가가 자세히 보아야 화가의 붓 터치가 옅게 보인다. 현대미술 작가에게는 쉽게 볼 수 없는 리얼리스트의 경지를 보여주는 앨리스 달튼 브라운(Alice Dalton Brown)의 2025년 최신작, <몽환적 풍경>(Ethereal)이다. 놀랍게도 작가의 나이는 86세.
엄마이자, 예술가 그 어딘가에서
앨리스 달튼 브라운은 미술 대학 졸업 후 바로 결혼생활과 아이 셋 육아에 전념했다. 육아를 하면서도 틈틈이 작업을 이어간 그녀는 38세가 되자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기 위해 갤러리의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그때마다 "38살이세요? 커리어를 시작할 수 없어요. 너무 늙었어요."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 그린 <몽환적인 풍경>을 보고 있으니 86세의 나이도 무색하다.
작가의 말한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으로 삶을 계속 이어 나갈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로운 작품들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80이 되면 자신의 그간 작업들과 인생을 돌아보며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개인적으로도 아이 셋 기저귀 떼고 말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키워내고 '엄마'가 아닌 '나'를 인식하게 된 나이가 38세였다. 아이들을 낳기 전 받은 교육과 꿈이 38세의 나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던 시절, 그 막막함이 떠올라 그의 작품이 더욱 울림이 컸다. 전시를 다니다 보다 보면 주변의 공기와 다르게 어떤 작품이, 혹은 작가가 말을 건넬 때가 있다. 그 울림은 가슴 가득 퍼져 존재의 한 부분을 건드린다. 이번 앨리스 달튼 브라운의 회고전에서 만난 작품들이 그러했다.
회고전인 만큼 작가의 초기 시절 작품도 볼 수 있다. 육아와 예술 그 중간 어딘가에서 분투하며 그린 미완성 작품들이었다. 부엌을 작업실 삼아 작업을 이어간 작가의 그림들을 흠없이 완성도 있는 작가의 후기작과 비교하면 같은 사람이 그렸다는 것이 안 믿길 정도다.
<주방에서>, 엄마는 우두커니 서 있다. 아무런 디테일 없이 그려진 엄마의 그림자는 매일 일상적으로 자신의 존재가 조금씩 지워져 가는 작가의 모습을 담은 듯하다. 설거지를 하던 중이었을 까. 조금이라도 엄마와 함께 있고 싶은 아이는 주방 아래 선반을 열어젖히며 놀고 있다. 2025년 작품에서 창은 바다로 향하고 더 넓은 세계로 향하는데, 이 엄마 앞에 열린 것은 어지러운 주방 펜트리일 뿐이다.
<신문 뒤에 숨은 나>와 <신문을 사이에 둔 우리>도 조금이라도 자신의 공간과 시간을 확보하고 싶은 간절함이 느껴진다. 잠시나마 고요한 시간을 가지고 싶지만 거칠게 칠해진 마룻바닥의 불안한 붉은색이 엄마의 감정을 느끼게 해 준다. 한창 육아와 예술을 병행하며 그린 미완성이거나, 아이들 미술도구인 파스텔로 북북 칠해져 그 현장성을 생생하게 전해 주고 있었다. 아마도 그림을 그리는 동안 세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끝없이 방해받고 침범당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작업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공간, 그리고 장소
이어 공간과 빛에 대한 탐구가 이어진다. 도시에서 벗어나 시골의 외딴 헛간이나 창고 등을 그리며 건축물이 주는 정서를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인들에게는 매일 같이 보는 풍경일 것 같은 일상적인 공간은 그 색채와 공간에 드리워진 빛으로 인해 공간 자체를 관조하게 된다.
1980년도부터 작가는 공간의 외부에서 내부로 점차 들어간다. 베란다, 집의 모퉁이, 현관 등에서 집 내부로 점차 들어가 창문너머 물가가 주요한 테마가 된다. 내부에서 외부 세계를 바라보며 바다와 하늘, 햇빛의 장엄함을 바라보면서도 집 안에 있기에 동시에 안정감을 느낀다.
공간의 외부자적 시선에서 내부자의 시선으로 들어간 작가는 집 곳곳의 고요한 오후를 포착한다. 멀리서 보면 흡사 사진과도 같지만, 달튼 브라운은 '포토리얼리즘'(photo realism)과는 경계를 둔다. 코넬 대학교 존슨 박물관에서 열린 전시 인터뷰에서 그는 "차갑고 비개입적인 거리감"을 갖는 포토리얼리즘이 아니라, 사물과 공간에 "친밀하고 개인적인 관계"(intimate and personal relationship)를 드러내고 있다고 밝힌다.
"나는 이른바 ‘리얼리즘’이라는 방식을 택하면서, 한 대상을 둘러싼 정서적 울림과 우리가 거기에 부여하는 의미에 더 마음이 끌린다. 나에게 있어 ‘무엇을 그릴 것인가’를 정하는 일은 결코 이성적인 선택이 아니다. 때로는 훨씬 나중이 되어서야, 그 이미지가 품고 있는 함의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과 장소 개념을 인용한다. 바슐라르는 장소, 공간 중심의 사유를 회복하려 한 프랑스 철학자로, 물리적 차원의 '공간'과 기억과 꿈이 응축된 내면의 '장소'를 분리했다. 앨리스 달튼 브라운의 작품의 주제는 주로 이 기억 속 '사적 장소'의 풍경 같다.
바슐라르도 인간에게 가장 큰 장소성을 담고 있는 곳으로 집을 꼽았다. 시간을 두고 여러 기억과 감정이 '집'에 중첩되고 응축되기에, 집은 모두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집은 말 그대로 우리가 '꿈꾸는' 장소이자, 감정과 정체성이 스며든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바슐라르를 직접적으로 인용한 바 있다.
“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생각, 기억, 꿈을 통합하는 가장 위대한 힘 중 하나이다. 이 통합의 결속 원리는 바로 몽상(daydream)이다... 모든 위대하고 단순한 이미지는 하나의 심리적 상태를 드러낸다. 집은 ‘심리적 상태’이며, 외관만으로도 친밀함을 말해준다.”
1993년 호지킨병을 진단받은 후 그는 이탈리아 소도시 루카에 체류하며 곳곳을 그렸다. 테라스에서 본 풍경, 안뜰의 나무, 이탈리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풍경들이다. 이탈리아에서 직접 찍은 사진들보다, 왠지 그녀의 그림이 더욱 기억 속 이탈리아를 자극한다. 그 고요함, 평안함, 맑은 기후의 감각까지.
정서와 감각의 리얼리즘
엘리스 달튼 브라운의 리얼리즘은 정서와 감정을 담은 리얼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비교해 볼 수 있는 인물로는 공간과 사물을 재현하는 데 있어 인간의 심리를 건드리는 리얼리스트 화가 에드워드 호퍼가 떠오른다. 그렇지만 호퍼의 리얼리즘과 달리, 달튼 브라운은 이미지와의 친밀하고 개인적인 관계를 추구한다.
호퍼의 그림에서는 브라운의 작품에서와 달리 공간의 묘사에서도 심리적 거리감이 드러난다. 인물은 공간과 융화되지 못하고 집과 같은 장소 또한 사람들로부터도 유리되어 있다. 벌거벗은 여인이 창을 바라보며 서 있다. 그러나 창가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그녀에게 가 닿지 않는 것 같다. 흩날리는 커튼은 감각을 상기시킨다기보다는 마치 비즈니스호텔 같이 차갑고 정서적으로 유리된 장소 속 인물의 심리적 고립감을 부각한다.
반면 달튼 브라운의 집 곳곳의 공간은 호퍼보다 더 세밀한 묘사를 하고 있음에도 작가가 공간에 갖는 감정, 그리고 그 공간이 주는 감각이 살아 있다. 그의 그림 앞에 서 있으면, 살랑이는 바람과 눈부신 빛이 그대로 느껴진다. 마치 평소에는 가족들이 복자여서 느끼지 못했던, 공간이 주는 감각을 혼자 있게 된 조용한 어느 오후 온전히 느끼는 기분이다. 일상적이지만 생경한, 그 미묘한 감각을 포착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묘사하지만, 앨리스 달튼 브라운의 공간은 차갑거나 외롭게 느껴지진 않는다. 사람을 묘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림이 어떤 인물을 묘사할 때, 우리가 그 인물에 공감하거나 자신을 투영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그림은 결국 '그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장소와도 정체성을 공유할 수 있고, 저는 제 작품 속을 보는 사람(viewer) 그 공간 속 인물이 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둡니다."
말하자면 관람객이 공간 속 인물이 될 수 있도록 작품의 공간 속으로 한 사람을 초대하고 싶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그의 그림 앞에 서면 우리는 그 공간으로 들어가 그 공간이 주는 감각을 느끼게 된다. 그 장소와 정서적으로 교감하게 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작품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공간 안에 비현실적이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 봤을 공간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어 그는 안도 밖도 아닌 "경계적 공간"(liminal space), 즉 그가 집의 안과 그 너머로 이동하는 현실과 비현실의 공간을 통해, 우리 마음속 '장소'를 재현한다. 맑고 푸른 바다가 보이는, 빛과 바다, 바람이 들어오는 실내 공간, 안과 밖의 경계는 살랑이는 커튼뿐이다. 원숙한 리얼리즘 화가답게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도 이질감 없이 재현해 냈다. 마치 바다의 신선함, 물결이 출렁이는 소리까지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하다.
주방의 팬트리를 바라보고 그림자를 드리우던 주부는 어디로 갔을 까. 달튼 작품세계의 백미는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창이다. 그의 초기작과 비교하면 회화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뜻깊고 놀라운 도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조용히 말하는 듯하다. 그가 그려낸 끝없이 이어진 바다처럼, 푸르고 밝은 하늘처럼, 당신도 당신의 바다와 하늘을 그려낼 수 있다고. 늦은 때는 없다고 말이다. 그는 이제 관조하며 평온한 물을 바라본다. 혼자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관객을 그 따스하고 안전하지만, 넓게 펼쳐진 공간으로 초대한다.
참고
http://alicedaltonbrown.net/wp-content/uploads/2023/01/Alice-Dalton-Brown-Fischbach-catalogue.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