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록 Nov 07. 2024

“맞긴 해요.”   

- 가훈처럼 전해질 우리 집안의 유행어


남편이 저런 사람인 줄 몰랐다.

우리는 고등학교 때 과외도 한 적이 있다는데 서로 얼마나 못났으면 직장인이 되어 서로의 집에서 소개팅 시켜준다는데 전혀 기억이 없다.


 당시 나이는 30살이었다. 엄마는 걔는 아직 한창때이고 어려서 아마 결혼 생각이 없을 거라고 했다. 그냥 연습한다 생각하고 만나 보라고 했다.

  그날이 왔다. 버스 타고 약속장소로 갔는데 약속장소가 골목 안쪽에 있었던 바람에 약속시간보다 5분 늦게 도착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런 나를 보고 5분 늦게 왔다고 눈을 흘겼다.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우리의 인연은 동네친구까지...' 그래도 밥도 먹고 차도 마셨다. 헤어질 때 집 근처까지 데려다준다는 이야기에 괜찮다며 극구 거절했다. 왜냐하면 나는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인데 우리는 다시 만날 일이 없으니(!) 나를 데려다준 것을 갚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연이란 게 참 신기하게도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은 절대로 안 하면서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떻게든 견디는, 한마디로 개인주의를 모토로 삼는 나를 길들인 남편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와 남편 (누가 맹수일까)


남편은 신기할 만큼 자존심을 세우지 않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들어주고 반영도 적극적으로 한다. 나의 이야기를 듣고도 날을 세운적이 없다. 그런데 이런 성향이 팔랑귀의 결과 닿아 있는 점이 있어 본인이 힘들어할 때가 있다. 어떤 결정을 함에 있어 속담처럼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사람이 많을 때 스스로 결정하기를 힘들어한다. 특이한 점은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사람이 없어도 힘들어한다는 것이다. 말인즉슨 누군가의 조언을 듣고 하는 결정을 더 신뢰한다.



  하지만 나는 조언을 즐겨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말이 누군가의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가능성에 지레 겁먹고 몸을 사리는 편이다. 조언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조언을 하는 것도 문제지만 조언을 좋아하는 사람한테 조언을 못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나의 말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기 싫다는 생각에 남편도 포함되었고 그 결과 남편에게 조언은커녕 '다 괜찮아 보이네'라는 말로 뭉뚱그려서 내 의견을 말했다. 신혼 때야 결정할 것들이 많지 않았지만 살아갈수록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부딪히고 한발 물러서고를 거쳐 여기까지 왔다. 남편은 내가 조언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란 걸 받아들였고 나는 나의 말로 누군가를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남편은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는 만큼 유연한 사람이라는 것이 내게는 큰 안심이 되었다. 내가 부정적인 평가를 내도 그 부정적인 평가를 한 나를 부정적으로 볼 사람이 아니라는 게...


내가 가끔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낼 때도 남편은 "맞긴 해요."라는 말로 부드럽게 넘어가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에 얼마나 감사한지.



오늘도 누군가의 통화에 힘들어하는 남편에게 비빌언덕이 되어주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