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이 짧은 사람이다
나는 말이 짧은 사람이다. 조금 편해졌다 싶으면 안갯속에 파묻힌 것 마냥 말 끝이 사라져 버린다.
어떡해
해야 되는데
아 그러네
'요'자 하나 빠졌을 뿐인데 느낌이 많이 다르다. '요'자 하나만 더 붙이면 되는데 그게 자꾸만 누락된다. 그럴 수 있겠거니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게 꼭 윗사람한테 그런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한두 살 말고 막 열 살, 아니 시어머니한테도 말이 짧아진다. 한 글자만큼의 목소리만 더 내면 예의가 중간은 갈 텐데 음절 하나와 함께 매너점수가 우수수 떨어진다.
한편 또래나 조금 어린 친구들한테는 존댓말 지킨다고 애쓰고 난리다. 올케한테도 말 놓는데 한참 걸렸다. 목구멍 근육으로 말을 삼키고 삼켜서 해냈다. 야 우리 사이에 무슨 존댓말이야- 언니 말 편하게 하세요-라는 말을 들어도 그노무 '요'자가 철썩 붙어서 도통 떼어내기가 어렵다. 윗사람 따위 무섭지 않다는 객기를 부리는 건가. 어리다고 함부로 말 놓지 않는다는 희한한 자부심을 키우는 건가. 어떤 무의식인지는 몰라도 그 한 글자를 지키고 버려야 할 때에 대한 고집이 대락 난감하다.
곧 20개월 되는 아들이 내일이면 세 살이 된다. 내가 서른여덟 되는 것보다 더 억울하다. (여섯이나 일곱이나 여덟이나.) 우리나라 나이 시스템은 왜 이모양인가 생각해보니 왜긴 왜야 족보 꼬이니까지. 그러니까 어제까지는 형이라 존댓말 썼는데 오늘부터는 친구라 반말 쓰고 그럴 수가 없는 거지. 그래서 1월 1일이 되면 모두 사이좋게 한 살을 더 먹게 된 것이다.
존댓말의 존재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존댓말 자체는 정중하고 점잖아서 괜찮은데 반말이라는 옵션이 따라오는 게 문제다. 누구는 선택권이 있고 누구는 없냐. 그렇다면 나는 선택권을 가질 테다. 원칙대로는 행사할 수 없는 구역에서. 그러니까 열 살 더 먹은 상사도, 몇 살 더 많으신지 모르겠는 시어머니도 내 짧은 말을 받으십시오.
짧은 말을 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사실은 받는 걸 더 즐긴다. 특히 어린 친구들이 말을 놓을 때는 일종의 쾌감이 느껴지는데 약간 변태스러운 기분이다. 그들이 말을 놓을 때는 허락 따위 받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랑 같은 부류인 것이다. 윗사람에게 말이 짧은 타입. 어쨌든 내가 어느 정도는 편해졌다는 건데 그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항상 무서운 선배 캐릭터를 등에 지고 다녔어서 그런지 어느 정도는 막 대해주는 게 좋다. (변태)
최근에 또래 몇몇이 마치 원래 그랬다는 듯이 나에게 말을 놓는 현상을 발견했는데, 아무렇지 않게 끝나가는 올해처럼 아무렇지 않게 우리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것 같은 기분에 혼자 소리 없이 기뻐했다. 내일이면 다 같이 조금 더 늙는 이 나라에서 '요'자 하나에 마음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다.
다 좋다. 좋은데, 아들이 '요'보다 '야'를 먼저 배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