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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멈춤] 여행책방지기
송은정 인터뷰

여행과 인생 사이

by 룬아

기상을 알리는 알람 소리에 간신히 눈을 떠 무거운 몸을 침대에서 일으키고, 엄마가 식탁에 차려놓은 토스트를 허겁지겁 대충 쑤셔 넣은 채 매일 똑같은 출근길을 매일 똑같은 사람들과 걷는다. 오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 채 이메일 체크와 회의를 하다 보면 정해진 점심시간이 되고, 배가 고픈 것, 먹고 싶은 것과는 상관없이 끼니를 때우고 밥보다 비싼 커피 한 잔을 사 들고 수다를 떨다 보면 다시 오후 업무의 시작. 야근이라도 안 하면 다행, 집에 도착하면 신발과 정장을 벗어 던지고 몇 달 전부터 읽으려고 사두었던 책을 손에 듦과 동시에 졸기 시작하여 하루를 마감한다.

그 와중에도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하고 싶은 건 뭔지, 어떤 고집을 부리고 어떤 타협을 하는 게 맞는지 머릿속은 복잡하고 세상은 빠르기만 하다. 갚아야 할 대출금이 밀려 있고, 대학을 보내준 부모님의 기대는 꺾일 줄 모르며 결혼 생각을 하면 직장이 있다는 것만도 감지덕지하다. 남들은 평범하게 잘 사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생각이 많을까,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걸까.


일단, 잠시만 멈춰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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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을 열고 나서 인터뷰를 많이 하게 됐어요. 기자 생활을 해서 그런지 언론이 원하는 대답을 하게 되는데, 조금 지치네요. 아무래도 대중은 실제 이야기보다는 회사를 그만두고 홀연히 여행을 떠난 사람의 영웅담을 듣고 싶어하거든요. 저에게는 결정적이었던 일이었지만 남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것 같아서 잘 오픈하지 않게 돼요.


그럼 여행책방을 열게 된 진짜 이유가 뭐예요? 그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결정적인 계기가?


아일랜드에서 1년을 지내다가 한국 오기 직전에 더블린에 갔어요. 영화 ‘원스’의 배경이 된 바닷가를 꼭 가보고 싶었거든요. 절벽 위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정신이 번쩍 드는 거예요. ‘아, 이렇게 살면 되는구나. 아름다운 걸 보면 아름답다고, 좋은 걸 보면 좋다고 느끼며 살면 되는데 왜 그렇게 복잡하게 살았을까.’ 1년 동안 켜켜이 쌓였던 감정들이 한순간에 정리된 것 같았어요.


그 전에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했나요?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출판계에서는 최소 3년 이상 일해야 경력이 된다. 그래서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죠. 하지만 한계가 왔고, 아시다시피 퇴사를 했어요. 이직하려고 출판사를 알아보던 중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제 내 앞에는 수많은 선택지가 놓여있는데 왜 국내 출판사 개수만큼의 옵션만 놓고 고민할까. 당시 26살이었는데, 모험하기에 괜찮은 나이인 것 같아서 아일랜드로 떠났죠.

여행을 업으로 삼아야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좋아하는 게 뭔지 명확히 아는데 왜 타협을 해야 하나요. 그래서 가이드, 여행 기자, 공정여행 기획자 등의 일을 알아봤죠. 하지만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일 뿐인 저를 받아주지 않았고, 한 리빙잡지사에서 일하게 됐는데, 결정적인 경험이 됐어요. 어찌나 가혹했던지, 제가 가야 할 길을 확실하게 일깨워준 거예요. 보통 막연한 다짐으로 퇴사를 하고 확신이 없어서 다시 돌아가곤 하는데, 고맙게도 결심을 단단하게 만들어준 시간이 됐죠.


그러고 보면 밑바닥까지 긁는 경험이 주는 분명한 장점이 있는 것 같아요. 당시에는 너무 힘들지 몰라도 결단력을 길러준다고 해야 하나. 버려야 할 것과 취할 것을 알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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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책방이 제가 상상하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요. 그야말로 순수하게 책을 파는 서점을 꿈꿨는데, 지금은 제품도 팔고 워크숍도 하고 있거든요. 문제는 책이 별로 없다는 거예요. 유통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는데, 독립출판이 아닌 단행본들은 모두 사입이라 부담이 커요. 하지만 이런 작은 책방을 운영하는 사람치고 자본금이 얼마나 있겠어요. 우습지만 책을 한 권씩 사와요. 그 책인 팔리면 재고가 없다니까요. 양질의 해외서적도 가져오고 싶은데 엄두도 못 내죠. 제가 생각하는 리스트가 있는데 지금은 그것의 1/10밖에 안 돼요. 물론 양보다는 질적인 문제이지만.


관심과 지식이 있다 보니 눈이 높겠죠. 그런데 현실적인 부분이 못 따라주니 아쉬울 수밖에 없고.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기준이 높아지고 성에 안 차는 건 당연한 것 같아요. 전문가가 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봐요.


당연히 시간이 걸리는 일이겠지만, 지금의 책방에 대한 자신감도 많이 낮아져 있고, 여러 가지로 스트레스가 심해서 불면증이 왔어요. 이렇게까지 잠을 못 잔 적이 없었는데.

제 마음이 원점으로 돌아간 거예요. 이럴 거면 왜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했나. 소소하지만 행복하려고 한 것 아니었나. 그래서 요즘 계속 되뇌는 건, ‘진지하게 하지 말자’예요. 오픈은 딱 한 달이 걸렸는데(빠른 겁니다), 진지하지 않아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너무 무거워지지 말자는 거죠, 흐르는 대로 가자.


네, 제 인생의 최종적인 꿈이 책방 주인인 것도 아니고, 그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하나 해보는 중이거든요. 그 과정 중에 책방이 껴있는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무겁게 매달릴 필요가 있나 싶어요. 임대 계약이 2년인데, 계약이 끝나면 한 달간 여행을 떠날 거예요. 여기 있는 동안 가능한 것들을 다 해보고, 확실한 정체성은 나중에 찾으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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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독립출판 서점이 눈에 띄게 많아졌어요. 이런 현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도 처음에는 독립출판 서점을 생각했었어요.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진부할지 몰라도 독특한 문화임에는 분명하고, 독립출판은 위탁이기 때문에 투자금도 많이 안 들거든요. 그런데 출간되는 책 종류가 너무 뻔해요. 서점 투어를 다녀보면 느끼시겠지만 거의 비슷한 책을 보유하고 있어요. 전 그래서 더욱 여행책방을 생각하게 된 거예요. 지금은 독립출판 반, 단행본 반 정도의 비율을 유지하고 있고요.

이런 문화가 확산되는 건 얼마든지 환영하지만, 고생할 게 훤히 보여요. 경쟁력이 없으니까 워크숍 등의 부가적인 사업을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독립출판이 어려운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유통도, 생산도, 시장이 너무 작아요. 서점을 운영하면서 알게 된 점 중 하나는, 단행본 판매율이 훨씬 높다는 거예요. 그도 그럴 것이, 독립출판이나 단행본이나 가격대는 비슷한데 퀄리티는 단행본이 더 높거든요. 정말 독특하고 창의적인 콘텐츠가 아닌 이상 독립출판물을 구매하게 될 확률은 낮아요.


거기에서 파생되는 또 다른 고민은 뭔가요?


시장이 너무 작다 보니 각 책방의 색깔이 없어지는 게 문제예요. 콘텐츠는 비슷하니까 공간이나 오너에 따라 선호도가 달라지는 거예요. 전 내성적인 편이라 많은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툰데, 책방과 주인을 동일시하는 게 힘들어요. 아늑하고 따뜻한 공간과 저를 같은 존재로 보는 거죠. 그런 부분이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에요.


책방이 책이 아닌 다른 요소들로 평가받게 되는 거군요. 시장이 활성화돼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발전할 텐데, 안타깝지만 까마득한 이야기로 들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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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주인으로서 가장 좋을 때는 언제일까요? 아무리 힘들어도 행복감이 왔다 가실 때가 있잖아요.


더블린 절벽에서 받았던 느낌을 이 작은 소금길 공간에서 느낄 때가 있어요. 한적하고 햇빛 좋은 날 열린 문으로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들어오면 충만함을 느끼죠.

제가 날씨 타는 사람이란 걸 이번에 알았어요. 봄이 오면서 해가 조금 길어졌다고 기상 시간도 빨라지고, 밥도 잘 챙겨 먹고, 밖에도 잘 돌아다니고. 아, 나 정말 단순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책방에 들어서면 행복한 느낌이 물씬 들어요. 원래 이렇게 아기자기한 취향인가요?


딱히 그렇진 않아요. 남자친구랑 함께 꾸몄는데, 준비하면서 우리가 이렇게 자잘한 것들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누가 보면 쓸데없는 잡동사니일 수도 있지만, 그것들이 모여서 다른 쓸모가 생기는 게 재미있어요.


오랜 시간 동안 모아 온 물건들이라 그런지 연출된 느낌보다는 자연스러워서 편안해요.


새로 생긴 공간 같지 않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요. 손때가 탄 물건들이 모여서 만든 곳이라 그런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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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책방 주인이니까 세계여행을 했다거나 여행에 대한 엄청난 내공이 있을 거라 기대하시는데, 전 그냥 걷는 걸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에요. 굳이 비행기를 타야 여행인가요.

회사에 다닐 땐 휴가라는 게 없었어요. 한 마디로 백수가 돼야 여행을 갈 수 있었던 거예요. 월차가 있어도 못 쓴다니까요. 마감일이 모든 것의 기준이었고, 월간지의 경우에는 특히 심하죠. 그래서 이제 드디어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하고 싶은 여행을 할 수 있는 삶.


어떤 마음으로 여행을 가나요?


전 기대하지 않아요. 여행을 통해서 뭘 얻어야겠다는 생각을 안 해요. 제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해질 수 있어서거든요. 일상이 너무 복잡하니까, 심플해지는 것에 대한 갈구가 항상 있어요.


그러면 일부러 한적한 여행지를 찾나요?


그렇지도 않아요. 항상 혼자 여행을 해서 그런지 어디에 가도 그런 자세가 되는 것 같아요. 낯선 곳에서는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에서 자고, 뭘 먹는지 등 생존에 대한 생각만 하다 보니 다른 고민이 끼어들 틈이 없어요.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 여행을 떠나는 분들도 있는데, 전 여행 가서 생각 안 해요. 그냥 신나요. 공기, 언어, 색깔, 사람들을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히 좋아요.


혼자 하는 여행이 왜 좋아요?


스스로 살아남는 방법을 배운 것 같아요. 전 재산을 털리기도 하고, 기차를 놓치거나 길을 잃는 일들이 발생하곤 하는데, 그 모든 사건을 알아서 해결해냈다는 뿌듯함과 자신감이 생겨요.

너무 빠르고 고된 세상에서 단순함과 멈춤의 미학을 여행이라는 장르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곳에서는 누구나 평온함을 느낄 터였다. 더블린 절벽에 가보지 못한 사람까지도. 그 찰나의 기운을 전하기 위해 잠 못 이루는 기나긴 밤들을 지새우는 그녀는 다시 떠날 여행을 그리며 오늘도 책방 주인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오픈한 지 3개월 남짓 된(조금 지난 인터뷰입니다) 이곳이 그녀의 눈에도 만족스러워질 날이 기다려진다. 책이 넘치고 넘쳐서 오로지 책만으로도 생존할 수 있는 공간.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여행을 이야기하는 책방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나면 책을 만드는 사람도, 책을 사는 사람도, 그 중간에 있는 사람도 모두 행복한 사회가 되지는 않을까 순진하게도 바래본다.


일단멈춤

서울 마포구 염리동 9-30 1층

13:00 ~ 20:00, 일요일 휴무

blog.naver.com/stopfor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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