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키놉스] 인터뷰
[Echinops / 에키놉스]
꽃말 : 동심, 경계
E를 만나러 가기로 한 날에는 오랜만에 비가 내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빛이 쨍쨍했는데, 왜 하필 오늘이야. 다소 번거로운 크기의 카메라와 녹음기, 장우산을 챙겨 들고 한 시간 반 가량이 걸리는 인터뷰 장소로 이동했다.
E는 내가 인터뷰하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같은, 창작자다. 난 자신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이 사람들은 뭐든지 과하다. 자기애가 강한만큼 자괴감도 강했고, 가끔 느끼는 강한 희열을 잊지 못해 잦은 패배감을 이겨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인터뷰하는 건 오랜만이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형식적인 질문만 던지게 될 것 같아서, 한 번이라도 마주하고 일말의 마음을 품은 사람을 섭외하는 편이었다. E는 두어 달 전의 인터뷰이가 꼭 만나보라며 소개해줬다. 흥미로울 거라 했다.
낮은 건물 지하에 위치한 작업실로 들어서는데, 비 때문인지 꽤 어두웠고, 문을 열자 맞닥뜨린 공기에서는 옅은 담배 냄새와 그보다 조금 더 강한 페브리즈 향이 느껴졌다. 아, 이 정도 조도라면 사진 찍기 어렵겠는데. 하지만 그건 걱정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걸 곧 깨달았다.
E는 내가 만나본 인터뷰이 중 가장 난이도가 높았다. 어떤 질문을 해도 단답형으로 돌아왔고, 그나마 하는 대답들은 그 뒤에 진짜 속내가 숨어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미약하지만 확실한 경계심이 느껴졌고, 난 가시덤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 애쓰고 있었다. 아니, 이럴 거면 인터뷰는 왜 하겠다고 한 거야.
더운 날이 아니었고, 창문으로 햇빛 한 줄기 안 들어왔는데 등에서 식은땀이 송송 돋았다. 준비한 질문에 대한 대답 아닌 대답을 듣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려 하는 틈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을 텐데 E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질문을 적어온 노트를 덮었다. 인터뷰는 망했다. 다른 사람을 찾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포기하니 마음이 한결 놓였고, 앞으로 바짝 당겨 앉았던 자세를 편하게 바꾼 후 물 한잔을 부탁했다. 그리고 다시 빗 속으로 나가는 게 내키지 않아서 내 얘기나 했다. 당신을 소개해준 사람은 이렇게 만났어요, 그 분하고는 어떤 사이이신가요, 인터뷰는 이런 게 참 좋고 어려워요, 저도 작업실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예전에는 다른 일을 했었죠, 사는 게 참 재미있어요, 아 물론 힘듦이 더 많은 게 보통 아니겠어요, 이젠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E는 들었다. 나 혼자 떠들었고. 40분가량 얘기하다가, 민폐가 되는 것 같아 그만 일어서려고 했다. 물 잘 마셨습니다. 즐거웠어요, 하자 E가 입을 열었다. 제가 이거 아니면 뭘 하고 싶은지 물어봐주세요.
누구나 삶에서 도망칠 상상을 하곤 하지만, 그런 얘기는 불편하다. 웬만하면 묻지 않는 질문이다. 그런데 그가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얘기는 그것이었고, 나는 물어봤다. 이게 아니면 뭘 하고 싶으세요? 그리고 그는 긴장이 풀린 입술로 처음 듣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녹음파일을 버리지 않고 있는데, 기사에 실린 것보다 그렇지 못한 부분이 더 많다. ‘오프 더 레코드’라는 단어가 감추는 이야기는 너무 많고, 아마도 그것들이 더 흥미롭겠지만 내 노트북과 기억 속에만 남을 뿐이다. E는 그렇게 하나의 대답을 풀어놓더니 거의 자문자답하듯 계속해서 속삭였다. 하나의 고백이 다른 고백으로 이어지고, 한 번 터진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피어났다. 인터뷰가 마무리될 쯤에는 그의 얼굴이 살짝 어려 보인다는 생각이 스쳤다.
기사가 게재되고 E에게 링크를 보내주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가 기사를 마음에 들어했는지, 아니면 그 날의 모든 걸 후회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내 잡담 속 무언가가 그의 속을 건드렸고, 나는 그의 지극히 부분적인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었다.
나 역시 인터뷰이가 되어봤고, 인터뷰어들은 많은 질문을 준비한다. 그 질문에만 답하기도 벅찰 정도다. 내가 하는 인터뷰의 1/3은 내 얘기다. 인터뷰 시작한 거예요?라고 의아해하지만 곧 인터뷰어의 삶이 내 것과 함께 뒤엉켜 흘러나온다. 인터뷰를 마치고 오는 길에 '그 부분은 싣지 말아주세요'라는 연락을 받기도 하지만. 뭐든 받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렸을 때 친구가 과자를 주면 사탕으로 보답하라고 배웠던 기억이 난다.
에키놉스는 절굿대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마치 절구통에 곡식을 넣고 찧을 때 사용하는 둥그런 절구공이를 닮아서 주어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공 모양으로 가시가 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 끝에서 아주 작은 꽃들이 피어납니다. 수십 개의 꽃들이 모여 하나의 꽃을 이룹니다.
Flower arrangement – 오션송
Text & image – 더콤마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