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흘러 강해지다
그는 사진을 보나, 실제로 보나 매우 강한 느낌의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이름조차 강인기일까.
하지만 한 시간 남짓한 그와의 대화는 겉으로 보이는 그의 모든 것을 깨 주었다. '보기보다'라는 말을 자주 했던 것 같으니까. 이제 그에게 어울리는 단어들은 조금은 손발이 오글거리는 것들일지도 모르겠다.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강함으로 다가왔던 그와의 인터뷰.
사진작가가 된 과정을 얘기해주세요.
전 원래 건축을 하고 싶었어요. 건물이 예뻐 보였거든요. 한 번은 고등학교 기술 시간에 도면을 치는데, 선생님이 제가 전교에서 제일 빠르다는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레고 방이 따로 있을 정도로 레고를 좋아했는데, 정말 레고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결국 대학은 점수에 맞춰서 공학 계열로 가게 됐어요. 방황이 시작된 거죠. 그때는 마냥 그림 그리고 포토샵 갖고 노는 게 재미있었어요. 그렇게 1년을 겉돌다가 시각디자인과로 전과했어요.
그런데 시각디자이너가 아닌 사진작가가 되었네요.
사진은 취미로 찍기 시작했는데, 군 생활을 강남구청 문화공보과에서 하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주로 지역행사 촬영을 하게 됐죠.
친구랑 쇼핑몰도 했었어요. 그때 사진을 정말 많이 찍었던 것 같아요. 하루에 천장씩 찍어댔으니까.
그리고 3학년 때 중학교 동창인 재환이(jdzcity)가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연락이 왔죠. 그렇게 스튜디오를 오픈한 게 2008년 1월쯤인가.
꿈꾸던 것과는 다르지만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온 거군요. 현재의 자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제가 사진작가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안 해봤어요. 그런데 지금 제 삶은 만족스럽고, 더 바랄 것 없이 행복해요. 재미있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거든요.
사진'작가'라고 불리는 건 좀 민망해요. 사진에 대한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깊이가 있다기보다는 이미지를 만드는 것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편이라. 이미지 메이커라는 호칭에 더 가깝겠네요. 사진을 주로 찍긴 하지만 그것에 국한된 작업만 하는 것도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상업적인 작업을 좋아해요. 어렸을 때부터 패션 화보에 관심도 많았고.
마켓이 원하는 것과 본인의 이상향 사이의 갭이 꽤 좁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지속해서 창작을 하다 보면 상업적인 것 외에 조금 더 '작가'적인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드나요?
제가 하고 싶은 작업들이 기본적으로 상업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작가적이라는 게 꼭 개인적이고 대중적이지 않다는 생각은 좀 이분법적인 거 같아요.
물론, 제가 정말 지향하고 도전해보고 싶은 스타일이 우리나라 시장에 잘 안 맞는 부분도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스티븐 클라인이라는 사진작가가 있는데, 굉장히 거칠고, 기괴하고, 다양한 미디어를 엮는 작업을 많이 하거든요. 그 스타일이 시그니처가 되니 그에 맞는 클라이언트(알렉산더 맥퀸, 레이디 가가 등)와 협업하기도 하고. 우리나라 입맛은 그에 비해 많이 서정적이라고 할 수 있죠.
요즘 사진의 진입장벽이 많이 낮아졌죠. 누구나 일상적으로 사진을 찍고,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가 흐려졌는데,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얼마 전 뉴스에 '10년 뒤에 없어질 직업군'에 대한 기사가 나왔는데 그중에 사진작가도 있었어요. 직업의 몰락이라고 하면 사실 이미 시작됐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위기감을 느끼진 않아요. 기술이 좋아졌다고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머릿속에서 뭘 그리느냐가 중요한 거고, 그 능력을 키우는 게 중요한 거죠.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 내가 잘 하고 있으면 문제가 없다는 거예요. 자신의 가치는 대체 불가능해야 높아지는 거잖아요. 여기 저기서 치고 들어온다고 해도 내 판을 잘 만들어놓으면 그건 내 영역이 되는 거예요.
그럼 강인기의 판은 얼마나 만들어졌을까요?
그걸 제가 알 수는 없어요.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 같아요. 100이라는 지점이 있다고 한들 그게 어딘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고, 그 기준 안에서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도 알 수가 없죠.
그래도 '강인기의 느낌'은 어느 정도 확립이 되어있다고 생각돼요.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하는 것 이상으로 추구하는 것이 있나요?
아무래도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이다 보니 미적 기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돼요. 아름다움이라는 게 지극히 주관적인 개념이지만 교집합 또한 분명히 존재하거든요. 절대적인 미에 대한 끝없는 연구를 하는 일인 것 같아요. 전 '대비'라는 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그에 따른 컬러 플레이를 많이 하고, 요즘에는 일정의 블랙이 무게감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이 들어 그림자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요.
그리고 그걸 알아가는 과정에서 한 단계씩 올라가는 것 같아요. 하지만 갈수록 더 힘들어지죠.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저를 100으로 친다면, 앞으로는 그만큼을 더 해야 아주 조금 더 오를 수 있어요.
제일 좋았던 작업을 고를 수 있을까요?
하나만 고르기는 힘들어요. 다 좋은 면이 있고, 다 다르니까. 출장지가 좋았다거나, 모델이 좋았다거나, 브랜드가 좋았다거나. 그리고 그걸 제가 찾으려고 노력해야 돼요. 그래야 욕구가 생기고 열정이 생기거든요. 그걸 못 찾은 일은 결과물도 잘 안 나와요. 재미가 없었던 거죠.
가장 어려운 종류의 사진은 뭐예요?
나에게 감흥이 없는 것들. 그냥 일로써 하는 일 있잖아요. 그리고 그건 작업 자체보다 사람이 커요. 함께 일하는 사람들 말이에요. 촬영장 분위기가 좋으면 사진이 잘 나와요. 사진만 봐도 느껴지거든요.
인물사진을 많이 찍으시는데, 사람을 찍는 게 정말 어려운 일 아닌가요?
인물사진이 어렵다는 건, 찍히는 사람이 자신에 대해 기대하는 이미지가 있어서예요. 모델의 의견도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이상의 '그래픽'을 원할 때가 난감하죠.
점점 협업하는 매체의 스케일이 커지고, 프로의 세계로 들어서면서 생기는 부담은 어떻게 해결하나요? 높아지는 기대치를 채워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을 텐데.
저희 스튜디오는 영업을 안 해요. 클라이언트가 찾아오는 형식인데, 그러다 보니 당연히 어느 정도의 기대치를 갖고 오시죠. 예산과 압박감은 비례해요. 부담은 항상 있지만 그걸 어떻게 해결하려 한다기보다는 익숙해지는 것뿐이에요. 그리고 조금씩 성공률을 높이면 자신감도 함께 늘어나는 거고.
보정을 많이 하는 편인가요?
네. 보정할 것까지 계산해서 촬영해요. 전 몰랐는데, 작업하다 보니 꽤 계획적인 성향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과생이었나.
계획을 잘 세우면 일을 그르칠 확률도 줄 것 같아요.
꼭 그렇지도 않아요. 즉흥적이고 순발력 있게 작업하는 사람들은, 사고에 대처하는 것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계획이 잘 짜여 있다는 건, 어느 지점에서 사고가 나면 그 뒤의 계획도 도미노처럼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거거든요. 뭐가 더 좋고 나쁜 게 아니라, 자신의 업무 스타일을 찾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사진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요?
인생을 바꿔야 해요.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하는 사진은 찍을 수가 없어요. 내 인생이 그래야 그런 사진이 나오는 거죠. 그렇게 살 자신이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정말 거짓말같이 찍은 사람 같은 사진이 나와요. 사진에는 그런 마법이 있죠.
프로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흔히 쓰는 표현으로는, 강 건넌 사람들이라고 해요. 자기의 역할이 뭔지 확실하게 아는 사람. 사람은 누구나 특출난 재능이 하나씩은 있어요. 그게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고 자기만족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면 옳다고 생각하거든요.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찾아야 해요.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버티는 게 정말 중요해요.
능력 여부와는 조금 다른 얘기네요.
특히 이런 일을 하다 보니 능력의 기준을 단정 짓기 힘들어요. 미적 심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결과물만 갖고 논할 수도 없는 부분이거든요. 아무리 사진을 잘 찍는다 한들 대인관계에서 빵점이면, 그 사람의 능력을 높게 평가할 수 있는 건가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은?
어렸을 때부터 나이키를 좋아했었어요. 중학교 때 나이키 풋볼 영상을 보고 충격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나요. 제가 그런 걸 만들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나이키에서 연락이 오고, 아인트호벤에서 박지성을 찍는다는 거예요.
보통 출장을 가면 그 장소를 담으려고 가는 건데, 아인트호벤에서는 스튜디오 촬영을 했어요. 해외 스튜디오를 경험한 것도 재미있었고, 국민적 영웅의 모습을 담고, 나이키와 일을 하게 되고, 스텝과의 호흡도 잘 맞았고,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작업이었어요. 그리고 그 사진이 어딘가에 크게 붙어있는 걸 보면 정말 뿌듯하죠.
어렸을 때 꿨던 막연한 꿈이 이렇게 구체적인 현실로 바뀌어 다가온다는 건 정말 신기한 거 같아요.
사람들이 항상 저보고 운이 참 좋다고 해요. 제가 생각해도 그런 편이고.
사실 인터뷰를 하다 보면 가장 많이 얻는 쪽은 내 쪽이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담아올 때마다 내 안의 작은 틀 하나가 깨져나간다. 항상 그렇지만, 강인기 포토그래퍼와의 만남은 유독 대화를 나누는 내내 마음속에 잔잔한 파동이 계속 일었다. 그가 이루어낸 것들, 그리고 바라보고 있는 것들에 대해 너무도 덤덤하게, 또 강단 있게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본인이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감사할 줄 알고, 겸손할 줄 알고, 성실함의 가치에 대해, 또 현실과 이상의 밸런스에 대해 몸소 체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멋진 작품을 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멋진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나지만, 당사자에게 '갑자기'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다시 100을 채우고 새로운 단계에 올라서는, 멈추지 않는 그의 시간을 응원한다.
+images from Inki K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