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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그래퍼 나상욱 인터뷰

본능에 신중할 것

by 룬아

인생에는 선택지가 지치도록 많고, 그 누구도 대신 골라주지 않지만 장애물은 끊임없으며 책임은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온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여태껏 고심해서 내린 결정들이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때 그 선택 말고 또 어떤 대안이 있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없을 거다. 있다고 한들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 거고.

그토록 자연스럽게 흘러온 사진작가로써의 삶 한가운데에서 다시 선택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나상욱.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도, 결단을 내리는 일은 매번 어렵기만 하다. 치기 어린 지난날보다 더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지금, 그는 소신 있는 생각들로 시간을 메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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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가 된 과정을 얘기해주세요.


어렸을 때 만화를 좋아했어요.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매일 만화책을 보며 막연하게 만화가가 될 거라는 꿈을 꿨죠. 그리고 애니메이션학과에 진학했어요. 사진을 찍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당시에 카메라는 고가의 장비였고, 지금처럼 디카가 많이 보급되지도 않았고. 친구 하나가 니콘 쿨픽스를 들고 다녔는데 그걸로 같이 놀았던 것뿐이에요. 포토샵도 어깨너머 배우고. 그러다 쇼핑몰 촬영을 하기 시작했어요.

친구들이랑 작업실 얘기를 자주 했어요. 저 옥탑이 우리 거였으면 좋겠다는 얘기. 그렇게 대학 졸업하면서 본스튜디오를 열었죠. 그땐 사진 외의 그래픽 작업도 하면서 돈을 벌었어요.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기껏 한 달에 2-30만 원 정도.


그렇게 좋다던 만화를 놓았어요.


청소년기에 뭔가에 빠져있다는 건 정말 중요한 거잖아요. 그때는 그게 삶 대부분을 차지하는 거니까. 정말 그것만이 제 길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학교에 갔더니 제가 생각했던 만화랑은 거리가 멀더라고요. 점점 흥미가 떨어졌어요.

그림을 잘 그린다고 만화가가 되는 건 아니에요. 그건 그냥 기술자일 뿐이죠. 생각이 있어야 한다는 얘긴데, 전 뭔가를 그려내고 싶을 만큼의 철학이나 신념이랄 게 없었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면 계속 만화를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학교에서 배웠던 게 사진 찍는 데도 도움은 많이 되죠. 구도를 잡을 때의 감각이라던가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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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사진이 확실하게 있어요. 영향을 많이 받았죠. 그중 하나가 아라키 노부요시라는 일본 할아버진데, 괴기스럽고 성적인 작업이 많아요. 꽃만 찍어도 야한 느낌이 들죠. 최근에 레이디 가가를 찍었는데 딱 봐도 그분 작업이란 걸 알 수 있었어요.


이런 작업을 어떤 스타일, 또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설명은 할 수 있겠지만, 정의를 내리는 건 어려워요. 스타일이라는 건 작가가 작업을 반복적으로 했을 때 저절로 생겨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과정의 집합체.


반복적이라는 게 정말 중요한 거죠.


그렇죠. 이게 내 스타일이야,라고 사진 몇 장 보여주는 걸로 누가 설득되겠어요. 반복적인 작업을 통해서 대중에게 각인돼야 해요. 하다 보면 자기만의 아이템이 생기기도 하고. 라이언 맥긴리는 사진에 시간이나 시대가 연상되는 요소를 넣지 않아요. 그래서 자연을 배경으로 많이 쓰죠. 렌항의 사진들도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 수 있는데 보다 보면 스타일이 뚜렷하게 느껴져요.

많이 찍는 것도 중요해요. 일단은 많이 찍어봐야 돼요.


양 또한 질만큼 중요하죠. 이번에 작업하신 걸 보니 필름만 120 롤을 찍었더라고요. 필름 작업만 하면 불안하지는 않나요?


처음에는 많이 불안했어요. 그때는 완전 수동 카메라를 쓰기도 했고. 너무 불안한데 결과물을 보면 감탄할 정도로 마음에 드는 이미지들이 있는 거예요. 이상하게 불안할수록 잘 나오곤 해요.


디지털보다 더 신중하게 찍어서 그럴까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한동안 디지털 작업을 하면서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어요. 필름에 비하면 제한이 없잖아요. 셔터를 계속 누르고 있는데,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어떤 행위를 하는 거로밖에 안 느껴지더라고요. 회의감이 들었던 것 같아요.


과정도, 결과도 마음에 안 들었나 봐요. 그럼 지금은 필름 작업을 위주로 하시나요?


가능하면 그러려고 해요. 최근에 불레또라는 브랜드 촬영을 했는데 필름으로 찍자고 설득을 했어요. 작업은 둘 다 했는데 결국 사용된 컷들은 모두 필름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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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다 보면 도촬을 많이 하게 돼요. 정말 찍고 싶은 장면들이 있는데, 돌아서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으니까요. 놓친 장면은 두고두고 후회돼요. 그게 나무나 빌딩이라면 덜한데, 사람일 경우엔 심하죠. 길고양이 같은 경우엔 무조건 찍어요.


지나가 버리는 것에 대한 낭만이 있네요. 사진은 그런 면에서 참 매력적인 것 같아요.


찍는 순간 자체는 별것 없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결과물을 보면 생각이 달라지죠. 전 오래된 걸 좋아해요. 클래식카는 항상 관심이 많았고, 페인트가 갈라진 문짝 같은 게 좋아요. 쓰레기를 찍기도 하고, 부랑자들의 모습도 몰래 찍고.


연출된 것보다는 자연스러운 장면을 포착하는 걸 즐기는 듯해요.


맞아요. 자연스럽게 움직이거나 얘기하고 있는 모습이 좋아요. 화보 촬영을 할 때도 포즈 잡고 찍는 것 외에 자유로운 세션을 갖기도 해요. 그러면서 모델은 자기가 몰랐던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죠.

인상 깊었던 작업은, 한선비/한선천 남매의 춤 추는 씬을 찍는 거였어요. 음악을 틀어놓고, 조명도 하나 세워놓고 촬영했는데, 정말 좋았어요. 그들은 자기 할 일을 하고, 전 제 할 일을 하고.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촬영인 거죠. 이런 작업을 할 때 만족도가 놓고 반응도 좋은 것 같아요.


예측할 수 없는 작업이라 불안감도 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한 장은 꼭 나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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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사진보다 개인 작업의 욕구가 큰 것 같아요.


꿈이에요. 제 길을 찾아서 가고 있으면, 제 작업을 알아봐 주고 찾는 사람들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개인 작업을 하다가도 클라이언트의 요구대로 따라갈 때가 많거든요. 문제는 그 간극이 크게 느껴진다는 거예요. 이상과 현실의 접점이 많이 없는 거죠.


가고자 하는 방향은 뭔가요?


그게 참,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워요. 원체 욕심도, 호기심도 많은 데다 우유부단하기까지 해서. 하나를 선택하는 걸 어려워하다 보니 얕고 넓은 지식을 갖게 됐어요.

굳이 말하자면 필름 작업을 더 열심히 해보고 싶어요. 당장 보이는 게 없더라도 방향을 정하고, 그쪽으로 꾸준하게 나아간다면 결국 그게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밀려오는 불안감을 어찌할 수가 없죠.


소신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는 참 어렵죠.


하지만 이제는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왔어요. 더는 물러설 수 없어요. 제가 잘하는 게 뭔지, 하고 싶은 게 뭔지 아는데 현실에 부합하려고 애쓰는 것 또한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어 하는 거죠. 이젠 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싶어요.


저도 커리어를 바꾸면서 사회적인 기준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어요. 그러다 보니 제 선택에 의심이 들 때가 있지만, 이제 그런 고민은 그만하고 나에게 주어진 것,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려고 해요. 현재에 충실한 게 길이 아닐까 싶거든요.


고민을 하는 건 중요하죠. 꼭 필요해요. 하지만 지나치게 오래 하면 안 돼요. 고민을 계속한다는 건 정체되어 있는 거거든요. 요즘 와서는 그 시간에 뭐라도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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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즐거운 거죠?


즐겁죠. 얕고 넓은 지식 중에 유일하게 판 우물이기도 하고. 지속적으로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직업인 것 같아요. 고민은 많지만, 단 한 번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네요.


사진을 찍는 전반적인 과정에서 제일 좋은 게 있다면?


새로운 걸 발견하게 되는 것. 특히 여행이나 출장 다녀오면 그래요. 항상 똑같아 보이던 서울도 입국하는 날 하루, 아니 몇 시간 만이라도 다르게 보이거든요. 한국에 처음 와보는 사람이라면 이런 데서 재미를 느끼겠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아요. 그런 눈을 길러야 해요. 사진 찍는 과정에서 항상 새로운 걸 볼 수 있어야 좋은 작업이 나와요.

매일 같은 일상 속에서도 매번 새롭게 느껴지는 게 딱 하나 있긴 있어요.


그게 뭔가요?


하늘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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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가 끝난 뒤에도 그는 한참이나 책상 한 켠에 꽂아둔 사진집들을 보여주며 그가 사랑하는 사진들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존경하는 작가의 친필 싸인이 담긴 두꺼운 책을 책방 주인에게 뺐다시피 사왔던 날의 이야기도, 불과 얼마 전 아쉽게도 놓쳐버린 일본의 사진전 이야기도. 신나서 바쁘게 움직이는 그의 손과 입을 보며, 인터뷰 사이사이에 털어놓은 그의 고민들은 욕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하고 싶은 게 많아서, 좋아하는 게 있어서, 그래서 고통스러운 것이다.

좋아하는 일은 마약과도 같다(해본 적은 없지만). 아픈지 알면서도 그 뒤에 따라오는 희열을 못 잊고 다시 발을 담근다. 아마 나상욱은 다시 아프고, 다시 기쁠 것이며, 우리는 이런 사람을 통해 굳이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찾을지도 모른다.


nasangwook.tumbl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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