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e in Stockholm 01
그녀는 머리 색깔이 특이하다. 언젠가는 붉은 핑크빛이었다가, 온통 파스텔톤 무지개색으로 뒤덮였었는데, 이번에는 은발에 가까운 금발을 하고 있었다. 작년에 다 밀어버렸던 눈썹이 거의 다 자라났다고 다행스러워하는 말에 실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다. 다소 멍하다가도 놀라운 기억력과 지식을 뿜어내는, 아이인지 어른인지, 공예가인지 디자이너인지 좀처럼 정의 내려지지 않는 사람. 무지개색 날개를 단 나비처럼 자유분방한 그녀가 성숙해져 가는 중에 잠시 붙잡고 대화를 나눴다.
자기소개를 해주세요.
스톡홀름에서 J0o0lry라는 개인 주얼리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어요. 숫자 0과 영문 o를 써서 얼굴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보이나요? 글자로 읽히지 않고, 얼굴처럼 인식되는 이름을 짓고 싶었어요.
대학에서는 산업디자인 전공을 했는데, 금속공예 공방을 다니다가 스웨덴으로 유학 왔어요.
전공은 왜 바꾸게 된 건가요?
너무 자연스럽게 입학했는데, 막상 가서 보니 제가 원하는 길이 아니었어요. 미술 하면 디자인, 디자인 하면 산업디자인. 졸업 후 선택의 폭이 넓은 학과라고 생각했나 봐요. 스무 살 저는 디자인이란 머릿속에서 번쩍,하고 발견하는 건 줄 알았는데 산업디자인은 지극히 논리적인 프로세스를 담고 있었고.
게다가 그렇게 인기 있는 과가 아니었는데, 제 학번부터 갑자기 입학생이 불어서 수강신청도 제대로 할 수 없었어요. 전공수업도 들을 수가 없어지고... 아 이건 그냥 핑계인 것 같네요.
그냥 산업디자인이 잘 안 맞았던 것 같은데요.
맞아요. 그렇게 학고를 맞고, 휴학을 했어요. 전공에 대한 미련이 없었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저 앞날에 대해 고민하고 싶었어요.
휴학 중에 어쩌다 사주를 봤는데, 금속이나 보석 관련된 일을 하면 좋다는 거예요. 웃기지만 그 말이 금속공예를 고려하게 된 계기가 됐어요. 심지어 중학교 생활기록부를 보니까 장래희망란에 보석 디자이너라고 써놨더라고요. 아무 생각 없이 쓴 것 같았는데.
스웨덴으로 오는 과정은 어땠어요?
석사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참 단순했어요. 한국 학교에 넣었다 수차례 떨어지고, 외국으로 눈을 돌리던 중에 미국의 RISD(Rhode Island School of Design)와 스웨덴의 Konstfack(콘스트팍)에 지원했어요. 콘스트팍은 굉장히 실험적인 작업을 하는 곳이었고, 학비도 무료였고, 유럽에서 영어로 공부할 수 있었고. RISD는 워낙 유명한 학교니까, 정말 가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제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던 거고요. 어차피 학비가 너무 비싸서 갈 수 없는 곳이었거든요.
콘스트팍에 합격하셨나 봐요.
아뇨, RISD에 붙었어요. 부분 장학금까지 준다고. 그러고 나니 콘스트팍을 떨어진 이유가 궁금한 거예요. 학교에 메일을 보냈더니, 교수님이 피드백을 듣고 싶으면 찾아와도 좋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포트폴리오를 들고 스웨덴까지 왔어요. 우리는 실험적인 작업을 지향하는데, 방향이 좀 다른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저 나름 한국에서 실험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노는 물이 달라요. 성향이 다른 거예요. 우리나라는 기법을 중심으로 장인정신이 강조되고, 만드는 사람(smith)으로써의 소명의식에 대한 탐구를 많이 하는 편이라면 콘스트팍에서 장인적 기술은 기본적인 수단일 뿐이고, 그걸 바탕으로 다양한 실험을 많이 하는 거죠. 그리고 이듬해에 다시 지원해서 결국 합격했어요.
그렇게 입학한 학교는 어떻던가요?
나에 대해 배우는 시간을 주는 곳이에요. 자율적으로 작업하도록 두기 때문에, 스스로 열심히 하지 않으면 손해거든요. 자신의 작업 프로세스와 리듬을 알아가게 돼요.
산업디자인과 다른 점을 많이 느꼈을 것 같아요.
생각하는 방식이 전혀 달라요. 하고 싶은 작업이 있다면, 산업디자인처럼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그냥 실험을 해요. 아니면 아닌 거고, 괜찮으면 생각해봐요. '왜 괜찮은 거지?' '연결점이 뭐지?'. 생각의 위치가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에요.
논리적이라고 할 순 없지만 모든 과정에 자신만의 이유가 있는 거군요.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논리라고 하면 될까요.
네, 질감이나 무게 등을 손끝으로 직접 느끼면서 작업해야 하거든요. 그 느낌을 계속 다듬으면서 감각을 단련하는 거예요. 머리와 손이 이어지는 부분을.
스웨덴에 남고 싶다는 생각으로 유학 왔나요?
작정한 건 아닌데, 2학년 때는 그렇게 마음먹었죠. 사실 어디에서 일하든 한국에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왜 한국을 떠나 있고 싶은 건가요?
싫다고 표현하긴 그렇고, 아무래도 제가 한국인이다 보니 그 사회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잖아요. 뉴스도 더 유심히 보게 되고. 그런 정보에 항상 접근해있는 게 지쳤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외국에서는 약간 방관적일 수 있으니까.
그리고 누구나 한 번쯤은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나요? 예전에 파올로 코엘료의 [11분]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거기에서 남미 여자가 스위스로 떠나요. 바다 건너 외국에 가는 게 꿈이었는데, 지금 가지 않으면 영원히 꿈으로만 남을 거라고, 그게 싫다는 식의 내용이었는데. 그게 참 마음에 오래 남아있었어요.
오랜만에 한국에 가면 어떤 느낌이 들어요?
제 삶의 대부분을 살았던 곳이잖아요. 익숙한 과일가게 냄새나 공기의 습도, 길가의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난간을 보면, 마치 한국에서 계속 살았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
시간이 흐르는 템포가 다르다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전 한국에서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요. 학교 다닐 때도 스스로 경쟁을 거부했고. 경쟁하다 보면 제 능력을 백분 발휘할 수가 없어져요. 좀 느긋하게 멀리서 볼 줄 알아야 하는 것 같아요.
스톡홀름에서는 뭔가에 쫓겨서 살기보다 오롯이 자신의 삶을 생각할 수 있는 거죠.
아무래도 이방인이라서 그렇기도 해요. 사회에서 절 열외로 보니까. 일종의 자유이자 핸디캡이죠.
그러다 보면 동기부여가 덜 되기도 하지 않나요? 끊임없이 스스로 일어서야 하니까.
그렇죠. 안 한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졸업한지 얼마 안 됐을 때는, 마치 십대로 돌아간 것만 같았어요. 하지만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니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가장 힘든 건 역시 비자 문제예요. 연장 기간에는 스트레스를 받죠. 수입으로 증명해 보여야 하니까. 사실 지금으로써는 괜찮지만 쉰 살이 돼서도 이렇다면 조금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려면 대중을, 상업주얼리를 무시할 수가 없고, 이 '0,1,7,8,9' 시리즈가 현실적 결심의 첫 프로젝트인 거예요.
상업주얼리를 경험해본 소감은? 현실과 타협한 거잖아요.
시작은 그렇죠. 비자가 아니었다면 굳이 이 시점에서 상업주얼리에 발담그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겪어보니 오히려 아트 주얼리에 대한 회의감이 들더라고요. 몸에 제대로 착장 하지도 못하는 걸 장신구라고 할 수 있나.
이건 공장처럼 같은 걸 계속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 힘들어요.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대로 시작하느라 황동으로 작업했는데, 샘플 작업만 해도 수두룩하니까 정말 죽겠더라고요. 앞으로는 은이나 금 같은 소재를 써서 객단가 높은 커스텀 주얼리를 하고 싶어요. 어쨌든 사업이니까.
스웨덴에 살면서 가장 좋을 때는 언제인가요?
콕 집어서 언제,라고 하긴 어렵고,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워요. 잔잔한 행복이라고 해야 하나. 음식이 별로라고들 하는데 전 음식도 잘 맞아요.
사무치게 외로울 때가 있을 것 같아요. 겨울이 참 긴 나라인데.
가장 행복했던 때도 1학년 때였고, 가장 외로울 때도 그 때였어요. 금요일 밤이었는데 아무것도 할 게 없는 거예요. 우리 반 친구들이 학교에서는 참 잘 지내는데 밖에서는 교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한국인 언니랑 자주 만나곤 했어요. 아직도 기억나요. 당시에 모토로라 휴대폰을 썼는데, 언니가 시금치 파이를 먹으러 오라고 메시지를 보냈어요. 그런데 제가 그걸 몇 시간이나 지나고 나서야 확인한 거죠. 지금도 그 문자가 참 마음에 걸려요. 얼마나 외로웠을까.
또 한 번은, 우리 기차 타고 코펜하겐 갈까?하는 말에 벌떡 일어나 기차역에 갔는데, 좌석표가 매진인 거예요. 그럼 공항 스타벅스나 가자,하고 공항까지 갔는데, 스타벅스는 게이트 안에 있더군요. 그날따라 휑하던 공항 소파에서 둘이 편의점 커피 한잔씩 하고 집에 왔던 일도 있었어요.
이방인으로써 인간관계에 대한 갈증은 없나요?
기본적으로 넓은 인간관계에 대한 욕심이 없어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마다 단짝 친구가 한 명씩 있었고, 학교, 회사 등에도 각각 친한 친구가 하나씩 있어요. 물론 이런 성향 덕분에 여기에서 잘 살아남는지도 모르죠. 어쨌거나 괜찮아요. 외로움도 즐기게 되는 것 같아요.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것에 익숙해지는 거죠. 많은 것들이 자연스러워지고. 어떤 고충이 있을 때 힘들게 바꾸려고 하기보다 익숙해지도록 두는 편이 나을 때도 있는가 봐요. 지금의 모습이 편해 보이는데, 더 바라는 게 있을까요?
내 집을 갖고 싶어요. 스웨덴은 하숙이 보편적이어서, 학생 시절부터 셋방살이한지가 벌써 6년이 돼요. 작년까지만 해도 나만의 공간에 대한 욕심은 없었는데, 정말 사소한 욕구에서부터 시작되더라고요. 우연한 기회로 붕어를 키우게 됐는데, 더 큰 어항을 사주고 싶고, 어항 주변에 화분으로 숲을 만들어주는 게 꿈이거든요. 그러려면 좀 더 넓은 제 집이 필요하겠죠.
사는 게 마냥 편하고 만족스럽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박차고 도망치고 싶은 거예요. 콘스트팍 자기소개서에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 얘기를 썼었어요. 알을 깨려면 먼저 익숙한 환경이 파괴돼야 해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을 파괴해야 변할 수 있다는 그녀의 책상은 달라졌다. 3년 전 책상 위를 가득 채우던 조개껍질, 구두조각, 팝콘과 사과 같은 재료는 온데간데없고, 서로 엮이기를 기다리는 물결 형태의 은조각들이 둥글게 모여있었다. 현실과 손잡은 현장에서, 그녀도 스스로 예상했던 것보다 현재의 모습에 덤덤히 만족하고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처럼. 마침 작업실에는 스톡홀름의 강한 여름 햇살이 비추고, 작업 책상 위의 금속 파편들은 움직이는 빛을 따라 반짝였다.
+project images from J0o0l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