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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룬아 Sep 14. 2015

그래픽 디자이너 조규형 인터뷰

Live in Stockholm 02

문득 생각해보니 더콤마에이의 로고도 그의 손끝에서 태어났다. 로고 디자인 같은 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내가 쩔쩔매며 도움을 청하니 대략 10분 만에 파일을 보내주며, 결혼선물로 생각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싫증 잘 내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내가, 2년 반이 넘도록 단 한 번도 이 디자인을 의심해본 적이 없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과분한 선물을 받은 셈이었다.

치읓과의 연은 어떻게 맺어진 건가요?


테이크아웃드로잉에서 연락이 왔었어요. 졸업작품이 좋다며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추천해주셨고, 미팅을 하는데 치읓의 아이덴티티 얘기를 꺼내시더라고요. 안 그래도 영문 아이덴티티 작업에 약간 싫증이 난 상태여서 재미있게 작업했어요. 굉장히 즉흥적이었고, 다음날 바로 스케치를 보여 드릴 수 있었죠.

책, 꽃, 차 등 모두 치읓이 들어가잖아요. 다양한 콘텐츠를 하나로 묶어주는 무언가를 만든다는 게 재미있어요. 확장성이 좋아서 여기저기 대입하기도 쉬워요. 요즘엔 큐레이터분들이 이 작은 요소를 갖고 기획을 해요. 만들 때보다 만들고 나니 더 효과가 좋은 디자인이에요. 다소 얻어걸린 면이 없지 않지만, 디자인에 정석은 없는 거라서.


스톡홀름에서 작업하신지 꽤 되었죠?


2011년에 콘스트팍을 졸업했죠. 그래픽을 기반으로 텍스타일이나 가구, 오브제 작업들을 하고 있어요.


스웨덴에 가기 전에도 그래픽 디자인을 하셨고요?


브랜딩을 했어요, 회사에서. 그 안에서의 브랜딩이란 오로지 수입창출을 위한 일이었고 그 목적에 신물이 났어요. 아름답고 착한 옷을 입혀서 부가가치를 만드는데, 거짓말쟁이가 된 기분이 자주 들었어요. 개인작업을 하면 나를 위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유학을 준비했죠. 

물론 현실적으로 상업 디자인을 무시할 순 없어요. 다만 좀 더 정직한 디자인을 하고 싶은 거죠. 쉽게 말하자면 오렌지 주스 패키지를 한다고 가정했을 때, 예전 같았으면 예쁘고 맛있게 찍힌 주스 사진을 담았겠지만, 이제는 속이 보이는 투명한 패키지를 디자인하지 않을까, 그런 차이예요. 소비자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브랜딩. 치읓 같은 경우에도 브랜드가 전면에 나서는 게 아니라, 안에서 이뤄지는 콘텐츠를 돋보이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서포터인 셈이죠.


아무래도 스웨덴 영향이 있었겠죠?


그런 솔루션이 통하는 사회니까요. 스웨덴의 광고를 보면 굉장히 투명해요. 제품 사진이 있고, 가격표가 붙어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연예인을 앞세워서 이미지를 만드는 데 집중하잖아요. 북유럽 브랜드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마케팅 때문에 고생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유학을 가니 자신의 이야기가 찾아지던가요?


그렇죠. 그 전까지 제 관심은 곧 클라이언트의 관심이었으니까요. 내가 어떤 관심사를 갖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그런데 학교에 가면 매일같이 스스로 질문할 수밖에 없어져요.


그래서 어떤 이야기를 찾았나요?


큰 주제는 'Unwitting Collaborator'이라고 해요. 의도하지 않은 조력자라는 뜻이에요. 누구나 자신의 고유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회의 기준에 따라 그 재능의 가치가 평가되잖아요. 이 사회에 필요한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루저 취급받는 거예요. 그런 편견을 없애고 각자의 재능을 찾아주는 조력자가 되고 싶었어요. 

예로 들자면, 'Cloud Workshop'이라는 작업을 했는데,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한겨울에 입김으로 구름 만드는 걸 촬영한 거예요. 누구나 자기의 숨으로 아름다운 조각을 만들 수 있다는 메시지의 퍼포먼스였던 거죠. 그런 무대와 환경을 만들어주는 디자이너이고 싶어요.


어떻게 보면 브랜딩과도 연결되는 것 같네요. 실체를 서포트해주는 역할. 졸업작품으로 하신 그림서체 작업은 그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는 건가요?


문자도 쓰여질 때만 존재가치를 인정받죠. 알파벳이 따로 떨어져있으면 의미가 없어요. 마치 잉여인간처럼. 단어로 합쳐지고, 글이 돼야 비로소 제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문자들을 꽃 패턴 같은 걸로 만들어서 아름답고 새로운 가치를 입혀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 작품도 결국에는 글로써 합쳐져야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내잖아요. 결국은 같아지는 거 아닌가요?


최초의 목적과 결과물에 사이에 틈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전 예술가가 아니라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대중에게 설득력 있는 걸 만들어야 해요. 그래서 좀 더 어필될 수 있는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해요. 그것도 제가 찾았다기보다는, 이 문자들이 스스로 역할을 찾은 것 같아요.

지금 구슬모아당구장(대림미술관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키보드 장단에 변신하는 한글'이라는 신작을 전시 중이죠? 한글로 작업하셨는데, 졸작과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일단 저에겐 모험이었어요. 원래는 내년 봄 밀라노에 출품할 작업을 할 계획이었는데 한국에 오게 됐죠. 그림서체는 오래전에 했던 작업이라 동기부여도 필요해서 한글로 해보기로 했어요. 한글은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문자이기 때문에 알파벳과 구조가 전혀 달라요. 알파벳은 숫자까지 해도 대략 6-70개 정도면 충분한데, 한글은 2,750개의 조합이 필요했어요. 그 점이 가장 새롭고 어려운 도전이었던 것 같아요.

거기에 서체가 변신할 수 있게 프로그래밍을 했어요. 타자를 치는 사람이 조합을 고를 수가 있고, 타악기처럼 길게 또는 짧게 치느냐에 따라 서체가 변신해요. 모든 요소들이 연기자인 거고, 전 무대를 만들어주는 조력자인 거죠.


그림서체를 대표작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현재 한국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해외에서는 오브제로 더 알려져 있어요. 다 Unwitting Collaborator이라는  주제하에 작업한 것이라, 저에게는 다 소중해요. 'ROOM Collection' 선반도 존중의 개념에서 출발한 거예요. 보통 선반들은 다 똑같이 생겨서, 어떤 사물이 들어가든지 모두 같은 환경에 놓이잖아요. 사물을 각각의 클라이언트로 보고 그에 맞는 방을 디자인해주는 게 목적이었어요. 꽃이 만개할 수 있도록 꽃병에게 맞는 방, 아이패드가 가지런히 놓일 수 있는 방.

주제들이 크고 무거운 느낌인데, 그에 비해 결과물은 단순하고 마무리가 깔끔해요. 완성품이라는 느낌이 든달까.


많이 중요시하는 부분이에요. 아름다움은 본능에 가까운 거라, 아름다움에서 느껴지는 희열이 있거든요. 그것만큼은 절대적으로 지키고 싶어요. 그리고 무엇이든지 1부터 10까지 해보는 게 중요해요. 중도포기를 자꾸 하면 완성하는 방법을 잃어요.


어떻게 보면 디자인에서 그게 가장 중요할 수도 있죠. 이야기도 논리도 모두 중요하지만, 결과적으로 매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거든요. 대중이 매력적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그 안의 메시지를 전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오브제 작업을 자꾸 하시는 이유가 뭐예요?


즉흥적인 거예요. 뭔가 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면 바로 해야 돼요. 흥미를 유지해야 하거든요. 모멘텀을 잃어서는 안 돼요. 졸업작품을 하면서 그래픽에 약간 질렸던 것도 있어요. 오랫동안 그것 하나만 붙들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게 텍스타일로 이어지고, 가구로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오브제까지 넘어오게 됐어요. 내 디자인이 손에 만져지고 직접 쓰일 수 있다는 게 정말 좋더라고요.

돈 많이 벌었을 것 같아요.


아니에요. 대외적으로 인지도를 높이는 데는 노력하고 있지만, 계속 새로운 작업에 투자해야 하다 보니 금전적으로는 어려워요. 이건 저 뿐만 아니라 모든 아티스트의 고충이죠. 개인작업을  계속하고 싶고,  계속해야 돼요. 사실 두려운 거죠. 가수가 음원 발표하는 것과 마찬가지거든요. 계속해서 신곡을 내놓지 않으면 음원차트에서 금방 내려가고 잊히는 것처럼.


스스로 워커홀릭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스톡홀름에서는 충분히 쉬면서 일하고 있어요. 구슬모아당구장 프로젝트를 하면서 최근에 바빴을 뿐이지.


당연히 대조적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서울과 스톡홀름의 차이가 뭐예요?


스톡홀름 가게들은 문을 일찍 닫죠. 사람도 듬성듬성 있고. 겨울은 길고 여름은 짧고요. 그래서 혼자이기에 좋은 나라예요. 외로울 수 있죠, 물론. 그런데 한국에 오면 그 고독함이 그리워져요. 

서울은 회전이 너무 빨라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데, 여기에서는 저의 모든 빈틈이 빼곡히 채워져 버리는 느낌이에요. 쏠림현상도 심해서 여기에서 활동하면 주목받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반면에 스톡홀름의 듬성듬성함 사이에서는 뭔가 보여줄 여유가 있는 편이죠.

그래도 요즘 전세계적으로 '서울'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핫해요. 이 안에서는 자극적인 것이 지속되고, 그 때문에 생명력을 잃을 수도 있지만, 외국인이 봤을 때 그 자극은 너무나 신선한 거예요.


성공했다고 생각하세요?


뒤돌아보면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어요. 예전에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고 있죠. 그런 의미에서는 성공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뭐.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마음에 들면 지금 당장은 성공한 기분이 드는 정도겠네요.


야망가인 줄 알았는데, 그냥 성실파였네요.

인터뷰 요청을 하니 그는 치읓에서 만나자고 제안했고, 진작 관심을 갖고 있던 공간이라 선뜻 받아들였다. 알고 보니 이 곳에서 전시 준비를 해왔던 거다. 그는 이번 여름을 이 소박한 이태원 끝자락에서 불태웠고, 작업실이 지하라서 시원했다고 말했다. 

성실한 사람, 즐기는 사람은 이기지 못한다고 했는데, 조규형 디자이너는 자신이 즐길 수 있는 것을 계속해서 찾아다니며 끝까지 해내는 사람이다. 이제 밀라노 전시를 고작 3년 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그 앞에서, 너도나도 한 방을 노리는 이 세상은 겸손해질 필요가 있어 보였다. 문득 그가 스톡홀름에서 졸업작품 준비를 하다가 손목에 무리가 오는 바람에 병원에 오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조규형: 그림 서체 – 키보드 장단에 변신하는 한글]

전시일정 : 2015. 09. 05 – 10. 04
전시장소 : 대림미술관 프로젝트 스페이스 구슬모아 당구장 (서울특별시 용산구 독서당로 73-4)
개관시간 : 화-일 11AM – 7PM / 목 11AM – 8:30PM / BREAK TIME 1PM – 2PM
홈페이지 : www.daelimmuseum.org


www.kyuhyungcho.com


+project photos from Kyuhyung Cho

+portrait photos by Stephanie Wie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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