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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레또 대표 차광호 인터뷰

by 룬아

신사동 540-19. 잠깐 어리둥절하다 두 발짝 뒤로 나와 고개를 들어 건물을 살피니 창문에 시트지로 붙여놓은 로고가 보인다. 여긴 무조건 알고 찾아오는 곳이겠구나, 생각하며 3층까지 계단을 올랐다. 투명한 문을 열자마자 향을 피운 내음이 진하게 콧 속으로 들어오고, 무거운 블루스 음악이 귀를 때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LP 플레이어에서는 분명 새 것은 아닐 것 같은 음반이 바늘을 업고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상품 진열대와 작업실을 지나 묵직한 가죽소파와 갖가지 잡지가 놓인 응접실에 들어서니 기다란 향이 연기를 품은 채 피워지고 있었다. 잠시 불씨를 끄고 군데군데 부드럽게 헤진 소파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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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불레또 소개부터 부탁드립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패션 주얼리를 만드는 공방입니다. 불레또는 이태리어로 악동, 또는 꼬마 깡패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이 슬로건을 제품에 녹여 장난스럽고 정형화되지 않은 주얼리를 만들고 있어요. 2011년에 시작해서 햇수로는 6년 차가 되었네요. 이 쇼룸은 5주년을 맞이하면서 옮긴 곳으로 매장과 공방이 함께 있어요.


악동의 아이덴티티는 주얼리의 어떤 면에서 찾아볼 수 있나요?


일반적으로 주얼리나 액세서리라고 하면 하이패션을 떠올리기 쉽죠. 그런 고정관념의 틀을 깨고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요소들로 자유도가 높은 디자인을 하고 있어요. 해골이나 밧줄 같은 모티브를 활용하고, 재료도 좀 강한 것들을 사용하는 편이에요. 3D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다 깎아요. 저 자신의 이미지가 악동 같은 면이 있어서 그게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 같아요. 의도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더라고요.


불레또를 시작한 지도 반십년인데 감회가 새로울 것 같아요. 여기까지 올 줄 알았나요?


원래 자신감이 높은 타입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자신감이 넘쳤어요. 당시에는 불레또 같은 주얼리 브랜드가 없었어요. 시장이 없어서 주변에서 만류하기도 했는데, 무시하고 밀고 나갔죠. 다행히도 시작이 좋았어요. 어쩌면 지금보다 그때 더 잘 나갔던 것 같아요.


지금이야 창업을 많이 하지만 5년 전만 해도 안 그랬어요.


모험이었던 건 사실이죠. 무엇보다 제 이름을 달고 제 일을 하고 싶었어요. 쇼핑몰에서 스타일리스트로 일하고 있을 때였는데, 퇴사하기 전부터 재료를 사서 연습했어요. 방법을 모르니 혼자 공부하고 개발하고, 1년 정도를, 그중 10개월은 무일푼으로 준비했어요. 조바심이 나는 게 제일 힘들었죠. 누가 먼저 만들면 어쩌나 하고.


처음을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그립죠. 지금의 저에게는 그때의 무모한 자신감이 필요해요. 정말 비현실적인 사람이었는데 사업을 하고 현실과 계속 마주하다 보니 불안감이 많이 생기더라고요. 가진 것, 잃을 것이 많아지면서 덩달아 겁도 많아져요. 초심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요즘이에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하는 게 있나요?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원형탈모가 생긴 적이 있었어요. 그땐 소주를 글라스로 부어서 마셨어요. 다행히 지금은 끊었고 대신 서핑에 푹 빠졌어요. 바다를 보고 있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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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디자인을 했었다고요. 커리어를 바꾼 이유가 있나요?

제대를 했는데 과가 없어진 거예요. 그냥 교수님 따라 애니메이션과로 전과하게 되었어요. 어차피 졸업하면 패션 일을 하려던 참이라 크게 관심은 없었지만 다행히 커리큘럼이 좋아서 프로그램도 많이 다루고 작화도 많이 할 수 있었죠. 그때 배운 게 지금도 도움이 많이 돼요.


무형과 유형의 창작을 모두 경험한 셈인데.


당연한 얘기지만, 제품을 만들어서 파는 수익구조이다 보니 하나를 팔면 하나 값을 벌게 되더라고요. 반면 무형적 창작은 한 번 만들어 놓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익도 계속해서 창출해낸다고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지나치게 정직한 이익구조가 조금 억울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불레또도 무형적 창작이라고 볼 수 있어요. 무형에서 유형을 만들어내고, 또다시 유형에서 무형의 이야기나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니까요. 유형과 무형의 차이는 매체의 차이 정도인 것 같아요. 무엇을 통해 창작을 하느냐의 정도.


수작업이 아이디어를 표현하기에 더 좋은가요?


그림이랑 비슷해요. 처음에 그리려고 했던 그림과 결과물이 완전히 다를 때가 있잖아요. 제품도 그래요. 스케치가 있어도 만들다 보면 전혀 다른 게 나오기도 하고, 그게 더 좋을 때도 있어요. 그날그날의 무드가 작용을 많이 하는데 그런 즉흥성도 불레또의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을까 싶어요. 아무래도 손으로 만져가며 작업할 때 그런 효과가 극대화되고요.


심플하면서도 거친 이미지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2년 정도 미니멀리즘에 빠져있었어요. 원래 해체주의나 아방가르드를 좋아해서 꼭 한 번씩 비틀어보곤 했는데, 뒤로 나와서 보니 심플함의 미를 너무 배제했던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한동안 심플하면서도 불레또가 묻어나는 디자인을 했었어요. 이번 시즌은 또 다르고요.


불레또가 타협할 수 없는 것은?


시중에 있는 건 안 해요. 제가 한 걸 남이 베껴도 자존심이 상해요. 그런 제품은 컬렉션에서 빼고 싶어져요. 잘 팔리니까 카피도 늘어나는 거겠지만 저는 그 제품이 점점 부끄러워져요.


그러면 스테디셀러가 없겠어요.


불레또에는 스테디셀러의 개념이 없어요. 시즌이 계속 바뀌니까요. 예외가 있다면 고준희 씨가 착용해서 유명해진 뱅글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죠. 그 제품 카피가 많이 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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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lookbook


가장 최근과 앞으로 나올 컬렉션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2016년 컬렉션의 모티브는 갑옷이었어요.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가서 갑옷을 많이 본 게 계기가 되었는데, 일차원적으로 작업하려고 했어요. 갑옷을 오리거나 체인, 검 같은 요소들을 적용하는 방식으로.

2017년 컬렉션은 아직 정해진 게 없어요. 아예 컨셉 없이 갈까 생각 중이에요. 주제를 잡아놓으면 어쩔 수 없이 그 안에서 맴도는 느낌이 들거든요. 이번에는 무제나 자유가 좋을 것 같아요.


어떤 카테고리가 가장 인기가 많은가요?


겨울엔 반지, 여름엔 팔찌예요. 노출에 따라 달라지는 거죠. 사실 저는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긴 한데 주얼리가 계절을 많이 타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에는 반지만 잔뜩 만들고 있어요.


어떤 사람들을 생각하며 만드나요?


멋있는 사람이요. 멋을 아는 사람들이 멋스럽지 않게 차 주었으면 좋겠어요. 과시용이 아닌 자기의 일부로 의식하고. 주얼리가 사람을 넘어서지 않도록 말이에요. 점점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긴 해요. 사람들은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닌, 자기만의 주얼리를 원해요. 단순히 장식품에서 그치지 않는 거죠. 그래서 의외의 사람이 의외의 주얼리를 하게 되기도 하는데 그게 참 멋있어요. 사람도 그렇지만 주얼리도 반전이 있는 게 매력적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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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P lookbook


Bulletto R.I.P라는 라인이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패션을 좋아했는데 그중 아메리칸 빈티지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BRIP는 빈티지를 기반으로 하는 주얼리를 복각하는 라인이에요. 가장 최근 시즌은 2차 세계대전의 미국 밀리터리 주얼리를 재해석해서 작업했어요. 당시에 아메카지(아메리칸 캐주얼을 지칭하는 일본식 표현)가 유행했는데 군복이나 작업복 같은 아우터, 통 큰 바지랑 부츠를 많이 입었고, USN(US navy)이라는 이니셜도 눈에 많이 띄었죠. 그런 아이템들을 불레또의 느낌으로 재해석한 거예요.


두 시즌 다 미국이네요.


가장 처음에 접했던 빈티지였어서 그런 것 같아요. 유럽 빈티지도 많이 참고하지만 미국의 것이 가장 재미있게 느껴져요. 주제를 잡고 작업하기에 이야기할 요소도 많고.


제가 한국에서 느낀 빈티지는 특정 스타일을 말하는 것이었고, 유럽에서 경험한 빈티지는 그야말로 세컨핸드, 즉 중고의 개념이었어요. 불레또가 이해하는 빈티지란 뭔가요?


불레또에게 빈티지는 그 시대 그대로의 옷에 대한 가치를 알고 입는 행위랄까, 좀 관념적인 개념이에요. 예를 들어 90년도에 나온 컨버스 척 테일러의 디테일과 라인의 특징을 알아보는 것처럼, 오리지널리티가 담긴 걸 빈티지라고 생각해요. 빈티지는 머리로 알기보다 그 가치를 이해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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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향하는 남성상이 있다면?


수염 많은 아저씨.


이미 수염 많은 아저씬데.


제가 원하는 저의 모습이 되어가고 있는 거죠. 중학교 때부터 그랬어요. 그냥 멋있는 거. 나이, 환경 상관없이 멋있는 거.


그런 남자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요?


일단 몸매 관리를 하려고 해요. 타투도 꾸준히 하고요. 원래는 한 달에 한 번씩 받았었는데 바빠지는 바람에 6개월에 한 개씩 간신히 하고 있네요.


브랜드를 운영하면서 가장 기분 좋을 때는?


시즌 준비가 끝나고 결과물을 보면 성취감이 밀려와요. 시즌 때마다 프레젠테이션을 하는데 꼭 그 전날까지 밤을 새우게 되더라고요. 그때가 진짜 힘든데 그걸 넘기고 나면 정말 기분이 좋아요. 성장한 느낌도 들고. 그럴 때는 욕하면서 제 자랑을 해요. 나 천재 같아, 나 미친 거 같아, 하면서. 그때가 제일 행복해요. 돈 버는 건 잠깐 기분은 좋지만 진짜 행복은 제품이 예쁘게 나왔을 때인 것 같아요.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 기분을 시즌마다 느끼고 있어요.


혼자 맡고 있는 부분이 굉장히 커요.


그동안 저 혼자 다 하려니까 과부하가 걸리더라고요. 계획한 것들을 진행하기도 어렵고. 지금은 직원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브랜드를 더 키우고 디자이너를 고용해서 그 사람의 불레또 라인을 만들고 싶어요.

언제부턴가 창작이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했어요. 뭣도 모를 때는 디자인을 쉽고 즐겁게만 생각했는데 이것도 어느 정도 쌓이고 나니 한계가 느껴져요. 시즌 준비할 때마다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기분이 좋긴 한데 많이 힘들어지네요. 아는 게 많아지고 기준이 높아지면서 자신의 벽에 부딪히게 되는 것 같아요. 그걸 부수는 것도 저의 몫이겠죠.


2017년 불레또는 어떤 모습이었으면 하나요?


올해는 쇼룸에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다시 온라인보다 오프라인 쇼핑이 살아날 거라 생각해요. 특히 패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진짜 쇼핑을 할 때는 오프라인이 주력이 될 거예요. 공간에 직접 와서 브랜드를 물리적으로 느끼는 게 정말 중요하고요. 그래서 매장의 음악이나 향, 온도 등 공간의 톤에 신경을 많이 써요.


2017년의 차광호는?


별다른 계획은 없고, 살 좀 빼서 건강하고 섹시하게 서핑하고 싶어요. 다음 타투 스케줄도 잡고요. 예전에는 억지로 걱정을 만들어서 스트레스받곤 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바다를 만나고부터는 그냥 즐기고 싶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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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짧은 듯한 말투를 가진 그였다. 아마도 언어보다는 행동으로 말하는 사람일 것이었다. 몇 번의 인사를 하고 계단을 다 내려와서 길을 건너려는데 뒤에서 누가 불러서 보니 다시 그였다. 작업하던 그대로 앞치마를 맨 채로 소매를 걷고 팔뚝의 타투를 휘저으며 걸어와서는 불레또에서 주는 선물이라며 작은 비닐봉지에 담긴 얇은 팔찌를 쥐어주었다. 소원을 빌고 실을 묶으라는 설명과 함께. 꼭 끊어질 때까지 차고 있어야 소원이 이루어지는 거라고 두 번 말하는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났다. 차광호는 반전과 반전으로 뭉친 사람이었다.


http://www.bullet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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