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고집
바람이 매섭던 겨울의 밤, 패션산업의 심장이라고 할 수도 있을 동대문으로 향했다. 고등학생 시절 웬만한 백화점 부럽지 않았던 동대문 상가, 어느새 많이도 화려해졌다. 시간이 만들어가는 것이 이렇구나, 싶다.
사무실 입구를 못 찾아 서성이다 전화를 거니 감기가 걸린 목소리로 길을 설명해주는 그녀. 몸이 아프나 마음이 아프나 자기가 갈 길을 묵묵히 걷는 사람들이 있다. 고집이라고도, 자존심이라고도 불리는 예술가의 미덕. 다시 한 번 그 강단에 많은 생각이 든 인터뷰였다.
언제부터 주얼리를 하고 싶었던 건가요?
고등학생 때부터 쭉, 손으로 작업하는 걸 워낙 좋아해서 혼자 이것 저것 만들어서 친구들한테 나눠주곤 했어요. 엄마가 미대 교육자이신데, 저를 파악하시고는 공예과를 추천해주시더라고요. 목조, 섬유, 도예, 금속 등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고 선택하게 도와주셨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참 다행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은 대부분 전공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이 대학에 진학하게 되잖아요. 그게 방황, 전과, 편입, 자퇴 등으로 이어지는 큰 요인 중 하나가 되는 것 같아요.
그중 왜 금속디자인이었나요?
제 성격상 섬유나 도예는 너무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재료였어요. 금속은 어딘가 도전적인 느낌이 저랑 잘 맞았고요.
작품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메시지가 뭔가요?
컨셉스미싱이라는 브랜드는, 컨셉을 만든다는 뜻을 담고 있어요. 모든 것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어느새 스토리텔링이라는 게 결과물과는 상관없이 전략적인 도구로만 쓰여지는 게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컨셉에 대한 정의를 확실하게 표현하고 싶어요.
주얼리의 소재라고 하기에 실리콘은 평범하지 않은 것 같아요. 형광색이라는 시각적인 요소도. 이런 것들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요?
치열한 시장 안에서 나름의 아이덴티티를 만들고 싶었고, 눈에 띄고 싶기도 했어요. 실제로 좀 튀는 것 같긴 해요.
사실은 아트주얼리 작가가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경제적인 부분을 배제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나름대로 타협을 한 결과가 지금의 작업이에요. 이것도 여전히 아트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저로써는 굉장히 상업적이에요.
순수 창작으로는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힘들다고 생각하세요?
정말 돈을 잊고 순수하게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나 성격이 된다면, 언젠가는 자리를 잡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요. 단지 그 길고 긴 인내가 너무 쓴 거죠.
예술을 한다는 건 주변의 희생도 어느 정도 요구하게 되는 것 같아서, 사실 그 부분이 더 힘들어요. 혼자만의 싸움이 아닌 거죠.
그럼 작가의 길은 놓으신 건가요?
아뇨, 사실 요즘 순수 창작과 대중산업 사이에서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제는 진짜 선택을 해야 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대중산업의 길을 택한다 해도 공장에서 똑같이 찍어내는 듯한 작업은 못 할 것 같아요. 나를 표현하고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어서 시작한 일인데, 영혼 없이 제품을 생산해야 한다면 그 때부터 전 정말 피폐해질 거예요.
돈벌이가 괴로운 진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얼마나 부를 축적하느냐의 문제도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결국 매출이 제 작업에 대한 하나의 평가의 잣대가 되기도 하더라고요.
요즘에 특히 심해졌죠. 돈 잘 버는 게 곧 성공한 인생이라는 이야기를 자꾸 들려주는 미디어의 영향이 커요. 자본가가 신이 돼버린 것 같아요.
경제력이 증명하는 가치가 워낙 높아져버리니까, 저도 누가 제 작품을 돈 주고 사면 마치 제 가치를 인정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제가 그 안에 담은 열정과 이야기를 이해받은 느낌이에요.
예술을 소비하고 싶은 사람은 많을 거예요. 단지 문화를 향유하는 세대가 너무 가난하네요.
후회되는 점이 있나요?
한 우물만 판 게 조금 아쉽긴 해요. 세라믹이나 목재 같은 재료를 다룰 줄 알았더라면 제 작업의 폭도 훨씬 넓어졌을 텐데.
굳이 배우고 싶다면 간단한 수강을 들어볼 수도 있잖아요.
제대로 된 과정을 체계적으로 배울 게 아니라면 굳이 가볍게 지식을 터득하고 싶진 않아요. 그런 교육이 딱히 저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안 드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뭔가요?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또는 제일 잘하는 게 이거라서.
할 수 있는 걸 하는 거죠. 도전하는 때가 있고, 끈기를 보여야 하는 때가 있는데, 지금은 묵묵히 갈고 닦아야 하는 시간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는 기분이 들어야 비로소 다른 길을 걸어볼 마음이 들 것 같아요.
누군가가 저에게 해준 말이 있는데, 그 말 덕분에 많은 위안이 됐었어요.
“이 세상에는 문화를 향유하며 예술가들에게 혜택을 받는 사람이 많아. 네가 꼭 부를 축적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베풀지 않아도, 이미 사회적으로 공헌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 너무 세상의 잣대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
확실히 아티스트라면 좀 뻔뻔해야 하는 것 같아요. 자신감이 필요한 직업이에요.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가치가 있고, 사람들은 각자의 가치를 좇는다. 사회가 바라는대로 갈수만 있다면 편해질 수도 있겠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이 택한 울퉁불퉁한 이 길이 더 편한 사람들이 있다. 옆에서 보기엔 이해가 안 되는 것 투성이지만, 스스로에게는 너무나 명확한 논리, 그 논리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든다.
세계관이 유독 뚜렷한 사람들이 있다. 세상의 잣대와는 상관없는 그들의 세계, 난 그런 세계들이 궁금하고 기대된다. 그리고 그들의 세계가 힘없이 부서지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컨셉스미싱